[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 '창덕궁 후원' 가을에 스며들다

최영숙 여행작가
  • 입력 2022.12.21 13:52
  • 수정 2023.01.18 10: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니어 좌충우돌 여행기는 '노원50+ 여행작가교실'을 수료한, 시니어 작가들의 작품을 연재한다. 

즐겁게 웃으며 한복 체험 중인 외국인들의 모습.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아메리카노의 쌉싸름함을 느끼며, 이 푸른 새벽녘 여행기를 마무리한다.

[최영숙 여행작가] 창덕궁 후원을 탐방하기로 한 날이다. 아침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에 따뜻한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 뒹굴뒹굴하다가 ‘앗차’ 하며 튕기듯 일어난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울리는 전화 진동, 나보다 몇 년 앞서 명퇴한 앞집 분이다. 전화하다 눈을 들어 보니 바로 앞뒤에서 전화 중이다. 한참을 웃으며 오늘 일정 끝나고, 오후에 우리 전시회가 열리는 갤러리에 함께 가기로 하고 각자 다른 버스를 탔다.

오늘 여정이 버스를 갈아타며 한 시간 넘게 가는 것을 생각하니, 엄청나게 먼 성 밖 사람이구나 싶다. 갈아타는 버스 정류장에서 여성 세 분의 대화 중 ‘비원’ 하는 소리에 귀가 기웃해진다. 세 분은 2인석, 1인석에 앉더니 이내 ‘우리 여행가는 기분으로 맨 뒤에 같이 앉자’ 하며, 마치 소녀적으로 돌아간 듯 하하, 호호, 하며 옮겨 앉는다. 그들이 자리한 곳은 바로 내 뒷자리라 들으려 하지 않아도 한 팀인 듯 그녀들의 이야기 소리가 다 들려왔다. 잠시 들리는 대로 두다가, 이내 그들의 큰 이야기 소리가 소음처럼 거슬려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거리 풍경.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가다 보니 거리가 깨끗하고 예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이고, 다니던 길이 아니기에 앞에 펼쳐진 거리 풍경이 새롭다. 이제 막 관심을 두기 시작한 실버센터 등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저런 곳에선 어떤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차는 오래된 동네를 지나고 있다. 구불구불 비좁은 길이지만 길가의 은행나무는 노란색으로 예쁘게 물들어 있다. 들쭉날쭉 커다란 빨간색, 파란색, 분홍색의 간판들이 지저분해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한편 정겹기도 하다. 컴퓨터 세탁이란 글자도 눈에 띈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컴퓨터 세탁이 무엇일까? 간판 구경을 하며 뒷좌석에서 흔들흔들 흔들리며 가다 보니, 재미는 있지만 이렇게 가다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문득 걱정이 된다. 지하철을 탈 걸 그랬나 후회도 잠시 해본다.

구도심의 혼잡한 곳에 들어서니 도로는 확 넓어졌는데, 그에 못지않게 차량도 빽빽하니 막힌다. 버스가 시내로 접어드니, 다행히 곧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시작되어 그다지 막히지 않아 다행이다. 정류장 안내에서 혜화동로터리라는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대학 시절 아지트였던 000다방이 저기쯤이었을까, 지나며 고개가 돌아간다.

터널 지난다고 창문 닫으라는 안내 방송에 이어 늦지 않게 창덕궁에 도착했다. 조금 늦을지 모르겠다는 문자를 보낸 뒤라 어디쯤이냐는 일행의 전화에 당당하게 도착을 알렸다. 카드를 대고 창덕궁을 입장하는데 신기하다. 평일 오전인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 것이 낯설다. 두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평일 오전의 자유를 어색해하며 선배님들과 반갑게 인사한다. 입장하며 입간판 안내를 보니 10.18~ 11.13까지 후원 개별 관람 병행이란다.

후원에 들어서니 반겨주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화려한 단풍.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짧은 시간에 해설사 따라서 다니며, 제한된 장소를 안내하는 대로 관람하는 것이,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 관람의 아쉬운 점이다. 창덕궁 후원은 특히 서울에서 손꼽히는 단풍명소이므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짧게나마 자유 관람이 가능하게 했나 보다.

이게 웬 횡재인가, 우린 ‘야호’를 외치며 신나 했다. 후원 예매는 인기가 높아 순식간에 마감이라 우리도 인터넷 예매에 실패했다. 두 분의 선배님들이 아침 일찍 현장에 나와 추운데 줄 서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현장 예매에 성공해서 입장할 수 있었다. 인원 제한은 고궁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다지만 더 나은 방법은 없을까.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관람할 수 있도록 뭔가 개선책이 필요해 보인다. 문화재청이나 담당부서에서 좀 더 고민해 주면 좋겠다.

갑자기 추워진 날 이른 아침부터 애써 주신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이 커진다. 궁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많다. 한복을 대여해서 체험 중인 외국인들도 많다. 즐거움 가득한 표정으로, 아름다운 가을날과 그들에겐 이국적인 궁궐, 화려한 전통의상을 즐기고 있다. 대여 한복의 국적 불명인 듯한 모양새와 금박, 은박 장식과 지나치게 화려함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화려하게 물든 후원의 연못과 정자.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어느 곳을 보아도 감탄이 나온다. 숲과 나무와 언덕과 연못 등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이 우리의 전통적인 곡선의 느낌으로 편안하다. 나무와 숲은 온통 노랗게, 붉게 물들었다. 아직 연녹색 이파리들도 있고 주황으로 물들고 있는 과정의 나뭇잎들도 색이 곱다. 여러 가지 부드러운 색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어느 지점쯤에서 합해지고 물들어가니 물감으론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색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앞서가는 선배님들이 기다리니 서둘러 보기도 하지만 나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약간의 언덕길을 내려와 부용지에 다다랐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뜻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이다. 부용지의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연못은 장대석으로 쌓아 올렸고, 남쪽 모서리에는 물고기 조각이 하나 있다.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이다.

이 연못의 남쪽 변에 부용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부용정의 남쪽은 낮은 언덕에 면하고 있다. 현판이 걸려 있는 동쪽이 건물의 정면인데, 이는 이곳의 지형이 남·북·서 삼면이 낮은 언덕으로 둘려있고, 동쪽만이 훤하게 트여 있기 때문이다. 건물 주변을 보면 남쪽 언덕에는 3단의 화계(花階)를 설치하고 꽃을 심고 수석을 배치하여 정원을 꾸며 놓았으며, 북쪽 연못에는 가운데에 섬 하나를 쌓고 연못으로 기둥을 내어서 특별히 멋스러운 느낌이다. 연못 안에 조성한 전통 양식의 작은 섬 정원에는 작은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맑지 않은 연못의 녹색 물과 오히려 어떤 색의 조화를 이루는 듯 보였다.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부용정(芙蓉亭).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그곳의 물색과 작은 섬 정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오른쪽을 바라보니, 높은 언덕에 어수문(魚水門)과 왕실 도서관 격인 주합루(宙合樓)가 있는데, 그 가운데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와 신하의 길이 있다. 우리는 임금의 길 계단 아래쪽에 조심스레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사진을 공유하니 궁궐 해설사 봉사를 하고 계시는 선배님이 한 말씀 하셨다. 임금님만 다니는 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으니 불경죄 80대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다들 대역죄를 지었느니, 시대가 바뀌었으니, 괜찮다느니, 재미있는 말들이 오갔다. 오랜만에 귀한 나들이를 했으니 봐주시겠지 등등의 이야기를 하며 속 시원하게 소리 높여 웃었다. 비록 카톡 문자이지만 웃음소리가 유쾌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부용정과 어수문에 대한 궁궐해설사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 관람객들.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옥류천(玉流川)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년)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선형의 수로를 따라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유상곡수연이란 술잔이 한 바퀴 돌아 폭포 아래로 떨어지기 전에 시를 지어야 하는 여흥으로, 신라 시대 경주의 포석정을 벤치마킹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계곡에는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오래도록 지켜봐도 거리가 좀 떨어진 위쪽에서 꼼짝을 않고 있었다. 고양이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나중에 살짝 움직이는 것을 보며 일행들이 모두 ‘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모형이 아니고 고양이 맞구나” 하는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창덕궁 후원 지킴이 무사쯤으로 생각하나보다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임금이 농사를 지으며 친경례의 의미를 되새겼던 청의정(淸漪亭).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청의정(淸漪亭)이라는 정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옥류천 앞으로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이 정자는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이다. 일반적으로 궁궐에 재현된 집이나 정자들은 기와지붕인데, 기와가 아닌 볏짚을 이고 있는 초가이기 때문에 새롭게 보였다. 임금이 백성의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벼농사를 짓던 작은 논에 지어졌다. 이곳에선 요즘도 해마다 벼를 심고 모내기와 추수를 한다고 한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안의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마침 추수해 놓은 볏단이 있었는데 낱알을 탈곡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떻게 참새들이 잘 익은 벼를 그대로 두었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어떤지가 너무 궁금해서 설마 잡혀가진 않겠지 하며, 참새 대신 한 톨을 껍질 벗겨 먹어 보았다. 너무 작은 쌀알 한 알이라 특별한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임금이 농사짓던 궁궐 후원에서 수확한 쌀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의미는 특별하고 재미있었다.

간단한 어반스케치로 그려 본 후원에서 나가는 돌계단. 그림=최영숙 여행작가

중고등학교 때 백일장으로, 소풍으로 오던 곳 창덕궁. 오늘 어렵게 들어와서, 가을의 절정인 아름다운 풍경을 즐겼다. 그때의 친구들은 아니지만 지금, 여기,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좋다. 후원의 구석구석을 느린 걸음으로 자유롭게 거닐며 기억 속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장면을 저장한다. 언젠가 오늘의 흐린 하늘과 바람, 나뭇잎 우수수 쓸려 가는 소리, 웃음소리 등이 미소와 함께 떠오를 것이다.

창덕궁을 나서며 아쉬운 마음에 돌아보니 노란 은행잎이 손을 흔든다. 촬영=최영숙 여행작가

나오는 길이 돌계단을 올라가는 길이라 특이했다. 전에도 이렇게 나갔었나? 이 계단을 오르면 또 어떤 곳이 나타날까?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계단의 풍경을 간단한 도시형 스케치로 그리며, 참 아름다운 가을 하루를 오롯이 느낀다. 고궁도 후원도 가을빛도, 다 좋은 날이다. 그뿐 아니라, 교육을 위해 서로 격려하고 노력하며 긴 세월 함께했던, 선배님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소중하고 좋은 날이다.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