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인간다움’이란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는 것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2.23 10:39
  • 수정 2022.12.2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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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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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사람이 문득 한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 달려가 구하려 하지 않겠는가.
왜 그러겠는가. 아이를 구해서 아이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해서겠는가,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겠는가, 어린아이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어서겠는가.
단지 그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절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맹자> 공손추 上편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사람이라면 당연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맹자는 말한다.

어린아이가 위기에 빠진 것을 보고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여기서부터 맹자의 사단(四端)론이 출발한다.

질문을 한 문장씩 새겨보면 무슨 ‘오늘의 유머’ 같이 들린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찰나에 달려가서 구하는데 무슨 계산속이 이리 많을 수 있겠는가. 아이를 구하고 나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예상하고 계산하고 나서 행동한다는 건 오히려 우스운 일이 아닌가.

위험에 빠진 아이를 달려가 구하는 것은 배워서 깨닫는 것도, 재빠른 계산에 의한 행동도 아니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행동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점차 복잡해진다고 할까.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보자. 
어떤 사람이 도시에서 물건을 사서 시골로 내려가는 길이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그를 때리고 물건을 뺏고 옷까지 벗겨갔다. 거의 죽어가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한적한 곳이지만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먼저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보고 그를 피하여 지나갔다. 종교인이다. 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역시 그를 피하여 지나쳐갔다. 레위인은 유대전통에서 특별히 성별된 신분의 종족이다. 그냥 지나쳐갔다. 아마도 죽어 있는지도 모르는 피해자를 만지는 것으로 자신이 부정을 탈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장사꾼 신분의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간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씻고 응급조치를 한 뒤에 자기 나귀에 태워 마을로 데려가서 주막에 맡긴다. 

여기 돈을 좀 드리겠소. 내가 지금 볼일 때문에 일단 떠나야 하니 대신 좀 돌보아주시오.
그 사이에 돈이 더 든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을 테니 회복될 때까지 돌봐주시오.


이 예화는 예수와 율법학자들 사이의 토론 과정에서 나온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까요.’ 하는 질문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교훈을 상기시키면서, 결론적으로 이같이 모르는 사람이라도 돕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너희도 이같이 하라”

‘성탄절’이니 ‘부활절’이니 ‘부처님 오신 날’이니 하는 절기를 정해서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영혼의 구원이라든지 행복에 이르는 비결을 되새기곤 한다. 그때마다, 필시 수천 번도 더 되게 사람들은 성인들의 가르침을 되새겨 읽고 강론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인간세상은 여전히 삭막하고 여전히 다툼과 분노 억울함과 외로움이 떠나질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
계산이 너무 많은 것 아닐까. 사람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다. 미얀마의 독재가 부활하면서 많은 시민이 총에 맞아 죽어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오랜 도시들이 파괴되고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도, 정치적 득실이 어떠니 역사적 명분이 어떠니 하면서 외면한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을 보면서 이런저런 계산부터 앞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세계가, 생각 많고 아는 것 많아 즉각적인 측은지심을 잘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Truth is Simple.
‘진실은 단순하다’는 말이 있다.
진리도 정의도 그러할 것이다. 많은 변명이 필요하다고 하면 진실이 아니며, 정의도 아니다.

그리 멀리 가지 않고도 우리는 외롭고 힘든 이웃들을 얼마든지 보고 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고, 쉴 곳 없는 사람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는 것이 곧 의로운 행동이라고, 예수도 가르치셨다. 사랑과 자비가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추운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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