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5] 과학관: 아인슈타인 가라사대 ‘시간도 공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정해용 기자
  • 입력 2023.01.18 14:42
  • 수정 2023.01.18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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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에 여섯 편의 논문으로 스타덤...‘현대과학의 상징’ 등극
‘빛도 휘어진다’ 기존 관념 깨뜨린 후 ‘양자역학’ 상대로 숨찬 방어전
‘나의 조국은 인류’...전쟁 없는 세계국가 꿈꾼 평화주의자
물리와 수학, 바이올린 A...어학 생물 과목에 약했던 보통 대학생

미국 프린스턴 시절 노년의 아인슈타인. 퍼블릭도메인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아인슈타인은 ‘천재’의 대명사다. 아인슈타인학교, 아인슈타인거리, 아인슈타인 전철역, 아인슈타인도서관, 아인슈타인연구소…. 그리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권한을 승낙받았는지 모르지만, 아인슈타인 학습지, 출판물, 아인슈타인 장난감, 아인슈타인 우유, 영양제 등등. ‘백 투 더 퓨처’를 비롯하여 많은 영화에서처럼 약간 어벙하지만 실제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과학자들은 영락없이 아인슈타인의 이미지를 패러디한 캐릭터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아인슈타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기본공식. 에너지와 질량, 속도의 관계를 밝힌 이 공식은 작은 양의 물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원자폭탄의 원리에도 적용되는 기본공식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인류의 눈높이를 한 차원 끌어올린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이론’과 ‘광양자 가설’을 포함하여 여섯 편의 중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였고, 이에 놀란 과학계는 이 해를 ‘기적의 해’라 불렀다. 아인슈타인 개인에게서 벌어진 기적일 뿐 아니라, 20세기 과학에 새로운 이정표가 된 논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20세기 과학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마치 철학을 얘기할 때마다 소크라테스가 기원이 되듯) 상징적 인물이 되어 평생 그 영예를 누렸다.

어떤 새로운 이론이나 기술이 등장할 때는 유사한 아이디어를 가진 경쟁자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최초’는 늘 ‘간발의 차이’로 경쟁자에 앞선다. 그래서 누가 더 운이 좋았느냐는 말도 나오고, 애당초 원조는 따로 있다는 군소리도 나온다. 아인슈타인에게도 표절 시비 같은 것이 있었으나, 어쨌든 획기적인 물리학 이론들이 아인슈타인을 기점으로 공식화된 것은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19세기와 20세기 물리이론은 차원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면 뉴턴 이래로 사람들이 믿어왔던, 시간은 어디에 있든지 똑같은 속도로 흐른다는 ‘시간의 절대성’이란 상식은 ‘시간도 공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상대성 이론에 의해 변경되었다. 광양자 가설은 그동안 직진하는 줄로만 알았던 빛이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아 휘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또한 19세기까지의 상식을 뒤바꾸는 내용이다.

인류가 유럽이나 각각의 생활영역을 벗어나 지구촌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된 것이 산업혁명 이후 3백여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면, 20세기 초엽 아인슈타인은 인류의 시야를 우주로 확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슈뢰딩거나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의 새 이론(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도 시작될 수 있었다. 비록 아인슈타인이 정색을 하면서 견제구를 날렸지만 말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스티븐 호킹의 ‘빅뱅’ 같은 천문학의 지식세계도 그 연장선에 있다. 지상에 발을 붙인 근대 인류로부터 우주를 유영하는 미래인류로, 그 지각변동의 중심에 바로 아인슈타인이 있다고 말하면 적당한 비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이론은 후배 학자들에 의해 계속 증명되었으며, 이를 토대로 21세기의 여러 새로운 이론이 천문학과 양자물리학, 나아가 철학에 이르기까지 크게 진전되었다.

설사 ‘아인슈타인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라 해도, 그 또한 아인슈타인이 있었기에 진전된 결실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은 가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16세기)-코페르니쿠스(1543년 지동설)-갈릴레이(1632년 지동설)-데카르트(1630년 우주론)-뉴턴(1687년 만유인력) 등의 뒤를 이어 20세기를 인도한 과학계의 새로운 계단이었다.

1920년 독일 국립 베를린대학 교수시절, 41세의 아인슈타인. 30대에 모교인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강의할 권리는 있으나 의무는 없으며 대학의 행정 시험 인사 등에 관여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받고 베를린에 부임했다.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봉급회원에 이론물리학연구소 소장 자리까지 약속받았다. 퍼블릭도메인

26세에 ‘기적의 논문’…영국 학계가 ‘기적’을 검증

아인슈타인은 26세에 발군의 논문으로 과학계의 조명을 받고 30세에 취리히대학 부교수, 32세에 프라하대학, 33세에 모교인 취리히공대(ETH) 교수가 되었으며, 35세에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던 베를린대학에 초빙되었다. 그것도 ‘강의가 연구에 방해되면 강의는 하지 않아도 좋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말이다. 그리고 37세에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다.

결정적으로 과학계를 넘어 일반사람들까지도 그 이름을 다 아는 스타가 된 것은 1919년이었다. 빛은 본래 직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중력의 영향을 받아 휘어진다는 그의 이론을 영국의 학자들이 관측팀을 동원하여 사실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왼쪽) 1919년 5월, 빛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휜다는 아인쉬타인의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 탐사팀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이 적도 기니에서 찍은 일식 사진. (오른쪽) 그해 11월 영국 왕립아카데미에서 탐사결과가 공식 발표된 직후 ‘뉴욕타임즈’에 실린 기사 스크랩. 표제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새로운 물리학이 시작되었다'. 퍼블릭도메인

영국의 왕립 아카데미와 천문학회가 그 해 5월29일 개기일식에 맞춰 공동으로 파견한 관측팀이 아프리카와 남미로 각각 날아가서 달에 가려진 태양을 찍었다. 1919년은 독일이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막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들이 독일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서를 내밀던 시기다. ‘적국’인 독일의 과학자가 내놓은 이론을 왜 영국 학자들이 돈까지 들여 검증하느냐는 볼멘소리도 없지 않았으나, 과학자들은 이런 정치적 편파를 뛰어넘었다. 새로운 과학의 열정에 타오르던 영국 과학자들이 ‘과학에는 국적이 따로 없다’는 고금의 상식을 직접 증명해 보인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관계가 아인슈타인 논문에 객관적 신빙성과 중대성을 더해주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론이 사실로 검증되었다는 뉴스가 <런던타임즈> <뉴욕타임즈>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이제 막 30세가 된 아인슈타인은 금세기 최고의 과학자이자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다. 전쟁이 끝난 직후 모처럼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새로운 뉴스에 세계 시민들이 느끼는 신선한 감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신문기자들의 관심 표적이 되었다. ‘아인슈타인 가라사대’라는 서두는 일단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은 지극히 소탈하며 권위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권위를 너무 싫어한 죄로 신은 나를 하나의 권위로 만들었다.”
이건 그저 흥밋거리 얘기인데, 오늘날까지 ‘아인슈타인의 말’이라고 알려진 (과학 이외의) 명언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실제로 한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상업적 목적으로 꾸며낸 말들도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대중스타로 떠오른 그해에 첫 번째 부인 밀레바와 이혼했다. 24세인 1903년 결혼 이후 16년 만의 결별이었다. 본래 몸이 약하여 아인슈타인의 부모가 반대한 결혼이었다고 하는데, 아인슈타인이 베를린에 부임하던 1914년 이후 사실상 별거 상태였다(밀레바가 건강을 이유로 베를린에 따라가지 않음).

이혼할 때의 조건이 색다르다. 두 사람 사이에 출생한 두 아들을 밀레바가 기르는 조건으로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보상은, 조만간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 전액을 위자료로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밀레바도 흔쾌히 동의했다는 것으로 보면, 두 사람은 논문의 중대성을 그만큼 실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벨상은 3년 뒤 실현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약속을 지켰다. 밀레바는 상금 전액을 저축 목적으로 부동산에 투자했다. 3채의 주택을 구입한 것이다.

1922년 아인슈타인에게 수여된 노벨상 물리학상의 증서. 퍼블릭도메인

권위를 싫어했던 ‘권위’ 자체… 무덤조차 사양한다

끝이 좋아야 다 좋다는 말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생애 마지막 장면인 장례식 풍경도 남달랐다. 평생 ‘살아있는 전설’로 대우받던 아인슈타인은 죽음이 가까워져 오자 미리 당부했다. “내가 죽으면 최소 24시간 동안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평생 피곤했으니 잠시라도 쉬고 싶거든.”

그는 1955년 향년 76세에, 프린스턴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의 당부대로 외부에 알리지 않고 (기자들도 눈치채기 전에) 조촐한 장례가 치러졌다. 평소 가족처럼 지내던 측근 12여명, 기사 비서를 포함하여 가장 가까웠던 동료와 변호사 등만이 참석하였다. 비서의 약혼녀가 바친 빨간 카네이션 한 다발 외에는 거창한 화환이나 송별사, 격식을 갖춘 종교의식이나 음악도 없었다.

베른대학 역사박물관 아인슈타인관 ⓒZachT, 2007

변호사 오토 네슨이 괴테의 시 한 수를 읽었다.

우리들은 모두 행복한 경험을 했다.
세계는 그의 가르침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그 가르침은
사람들의 근본으로 퍼져가고 있었지.
자신에게만 속해 있는 그 자신의 것
그는 빛을 발하며 지나가 버렸다.
혜성이 사라져버린 것과 같이
무한한 빛에 그 자신의 빛줄기를 이어 나가며.

아인슈타인의 모교인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 Zurich) 기념관에 있는 ‘아인슈타인 라커’ 내부의 기념품들. 이 대학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20여명의 동문 교수 출신 학자들의 라커가 한데 모여 있다. 그 밖에도 9명의 수상자가 이 대학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퍼블릭도메인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해서 프린스턴에 뿌려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그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었지만, 그의 두뇌는 남겨졌다. 사망진단을 맡은 프린스턴병원 부검의가 두뇌만 따로 채취해 보존해두었다. 이 특별한 세기적 천재의 뇌는 무엇이 달라도 다를 거라는 직업적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특별한 위인의 사후에 뇌나 심장만 따로 안치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일종의 ‘전통’이 있긴 하다(쿠베르탱의 심장이 아테네에 안치되었듯이). 사망자 자신이나 가족의 사전 동의 등 절차적 문제는 좀 있었지만 결국 양해되어 지금은 프린스턴대학이 보존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뇌는 일반인의 평균치보다 10% 정도 작고, 대신 아래마루소엽 영역이 15% 이상 크다. 뇌의 교세포 수가 적은 대신 크기는 더 컸다고 한다. 전두엽에는 보통 3개의 주름이 있으나 아인슈타인에게는 그보다 하나가 더 있었다. 마치 일반적인 컴퓨터에 비해 보조 드라이브 하나가 더 달린 것과 같은 컴퓨터와 같았던가 보다.

베를린대학 교수 시절 살던 집. GNU-free domain via wiki

기술자 집안, 16세부터의 공상이 노벨상으로 결실

아인슈타인은 1879년 ‘뷔르템베르크’라는 작은 왕국의 울름에서 태어났다. 독일제국에 속한 영주국이다. 가족은 전기장비를 제조하는 아버지와 삼촌 등이 있었고, 그들은 아들이 유능한 기술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아직 어린 아기일 때 아버지는 장사가 잘되지 않아 공장을 정리하고 뮌헨으로 올라갔다. 그 무렵엔 에디슨의 전구가 발명되었을 때이니, 아인슈타인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대도시의 불빛을 보며 자란 최초의 세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아인슈타인과 여동생 마야. 오른쪽은 15세의 아인슈타인. 후일 노벨상 논문으로 이어진 ‘시간과 속도에 관한 상상’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퍼블릭 도메인

다섯 살 때부터는 가톨릭계 초등학교와 김나지움을 다녔다. 하지만 생각이 많고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규율이 엄격한 김나지움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면 몇 시간이고 그것에 집중하면서 자유로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서너 살 무렵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나침반을 보고 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자석의 성질에 놀랐던 일, 16세에 ‘사람이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린다면 빛은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일까?’ 와 같은 상상에 심취했던 일(그런 일을 중요한 경험으로 기억한다는 자체부터가)은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아인슈타인의 빛의 속도에 대한 상상

만일 빛을 뒤쫓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될까.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서 본다면 빛은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버릴 것인가?

공상에 가까운 ‘사고실험’은 10년 후 빛의 성질에 관한 놀라운 논문들로 결실을 맺는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한권으로 펴낸 ‘상대성이론’(통합) 영역본 초판(1920).
이 책은 경매에 나와 4천 유로를 호가했다.

놀라운 끈기와 집중력,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수업시간의 태도를 중시하는 엄격한 김나지움에서 이런 특성은 방해가 되었다. 결국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중퇴하게 된다.

이후 집에서 독학하며 좋아하는 수학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생 한 사람이 식객으로(밥만 제공받는) 드나들며 아인슈타인을 지도해주었다. 소년은 수학적 천재성을 보였다. 대수와 유클리드기하학 등을 독학으로 터득하고, 14세에는 미적분을 마스터했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독자적인 증명방식을 고안하기도 했다. 13세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는데 이후 칸트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그 논지를 이해했다는 의미다. 그는 스피노자의 세계관에도 공감했다.

네덜란드의 대학도시 라이덴(Leiden)의 보어하브박물관에 그려진 ‘중력렌즈’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 방정식 위의 점선은 모르스부호로 되어 있다. ⓒVysotsky

16세에 그의 가족은 사업을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이사했는데, 아인슈타인만은 혼자 스위스 취리히로 떠났다. 중등학교 졸업장이 없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억나실 것이다. 졸업장 없는 학생들도 수학능력을 입증하기만 하면(입시에 통과하면) 입학할 수 있는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 Zurich). 중등학교 퇴학생 콘라트 뢴트겐이 입학했던 1865년으로부터 30년 만에, 또 한 사람의 천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지원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과학에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어학 점수가 미달하여 입학조건으로 1년 동안 아라우의 김나지움에서 보충학습을 받았다. 빛에 대한 ‘사고실험’은 바로 자연풍광이 좋은 아라우학교 시절에 시작되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점수가 높은 의외의 과목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바이올린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과 함께 평생을 바이올린과 함께 지냈다. 노년에는 저녁시간마다 주방에 내려가 연주했다고 한다. 타일 붙인 벽에 부딪혀 울리는 맑은 음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혼자서 바이올린을 켜다가는 문득 물리학 과제에 대한 영감을 받고 ‘맞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하면서 곧바로 올라가기도 했다. 악보에 얽매인 연주보다는 멜로디를 따라 자유롭게 연주하기 좋아하여 같은 아마추어 연주자들과의 공연을 즐기기도 했다. 원시적 재즈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인슈타인의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입학증명서(1896년, 왼쪽)와 졸업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과외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신문에 냈던 개인광고문. 광고 상단에 ‘최고의 인재’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과외를 받겠다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회사에 알려져 해고당하는 불운을 당했다고 한다. 퍼블릭도메인

대학 졸업 후 동급생 중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하고 아이를 갖게 되면서 아인슈타인은 생계를 위해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수입을 얻기 위해 가정교사 광고를 냈으나 학생은 오지 않고 오히려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경제적 위기에 도움을 준 것은 마르셀 그로스만이란 친구였다. 대학 친구로 뒤에 ETH에서 수학교수가 되었고 평생 친구로 지냈다. 그로스만의 아버지가 방직업자로 취리히에서 발이 넓었는데, 베른특허사무소 간부인 친구에게 부탁하여 아인슈타인의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베른특허사무소에 심사관으로(임시직인 듯) 근무하면서 틈틈이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과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1905년 ‘기적의 해’ 베른특허국 사무실에 근무하던 스물여섯 살의 아인슈타인. 퍼블릭도메인<br>
1905년 ‘기적의 해’ 베른특허국 사무실에 근무하던 스물여섯 살의 아인슈타인. 퍼블릭도메인

업무 특성상 특허심사 과정에서 힌트와 영감을 얻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가 최초로 물리학 연구에 도입한 ‘무중력 상태’는 엘리베이터 관련 기술을 심사하던 도중 착안한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의 체중은 중력의 영향으로 올라갈 때 더 커지고 내려갈 때 줄어든다. 만약 중력이 상쇄될 정도의 속도로 내려간다면 사람의 체중은 제로가 되지 않을까, 즉 ‘무중력상태’가 될 수 있음을 착안한 것이다. ‘무중력’은 우주과학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후일 그가 ‘특수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기적의 해’ 이후에 기자나 과학자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다. 기자들이 그에게 당신의 연구실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몇 가지 문구와 펜이 들어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보여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대의 아인슈타인에게는 물리학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 아이디어로 가득한 머리, 그리고 몇 가지 필기구가 세기적 이론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전 재산이었다.

나치를 혐오한 평화주의자, ‘과학의 칼’에 서명

취리히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하던 해가 1900년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에 취리히 시민권을 획득하는데, 그것은 갈수록 군국화되는 독일(프로이센) 제국과의 사이에 선을 긋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가 태어난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독일제국에 흡수되었으므로 독일이 모국일 터이나, 이 제국은 아인슈타인의 정신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격변하는 유럽 정세 속에서 독일은 무장을 강화하였고, 뒤에 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을 일으키는 전쟁국가가 된다. 애당초 집단주의와 폭력에 반감을 품은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졸업생이란 신분을 활용하여 취리히 시민권을 획득하였고 이후 그는 스위스를 마음의 조국으로 삼았다. 그는 타고난 평화주의자였다.

나의 평화주의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이것은 어떤 지적인 이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잔학과 증오에 대한 나의 깊은 반감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경우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입니다.
국가가 정책적 수단으로서, 대규모로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경우도 살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정열적인 평화주의자이자 반군국주의자로서 모든 민족주의를, 가령 그것이 애국심과 같이 행동한다 해도, 거부하겠습니다.
민족주의는 하나의 소아병으로, 인류에게는 홍역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인류야말로 조국, 아니 모든 것 위에 존재합니다.

아인슈타인 외 2인, 1914년 ‘유럽인에게 드리는 선언’ 중에서

1933년 영국 로얄 앨버트홀에서 세계평화를 위하여 연설하는 평화운동가 아인슈타인. 영국에서 그의 망명비자는 불발되었다. 히틀러의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퍼블릭도메인

1차 대전이 끝난 후 유럽국 중심으로 결성된 국제연맹(국제연합 UN의 전신)에서 아인슈타인은 세계평화를 위한 지식인들의 협의기구 ‘지적협력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e on Intellectual Cooperation)에 참여하게 된다.
이 위원회는 인류의 집단지성을 통해 전쟁 없는 세계평화를 추구하자는 목적으로 1922년 창설된 협의기구다. 앙리 베르그송을 초대 의장으로 당대의 이름 있는 지식인들,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 자가디쉬를 비롯하여 12명의 회원으로 제네바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정회원이 19명으로 늘어나고 헨드릭 로렌츠, 길버트 머레이 등이 의장직을 수행했으나, 결국 히틀러에 의한 2차 대전을 막지는 못하였다. 아인슈타인이 항구적 인류평화 방안에 대해 프로이트에게 자문한 것도 바로, 이 기구에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1930년부터 미국 대학과 학회 등의 초청으로 프린스턴과 캘리포니아 등을 여행하는 동안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당에 장악되어 분위기가 매우 살벌해졌다. 세계 평화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데다 유대계이기까지 한 아인슈타인은 나치당의 청년돌격대 등에 의해 이미 ‘적’으로 규정되었다.
1933년 나치정부는 멋대로 만든 법(전권위임법)을 근거로 주인이 부재중인 아인슈타인의 재산들을 몰수했고, 그가 가르치던 베를린대학의 학생들을 포함한 젊은 대학생은 이른바 ‘불온서적’ 색출운동을 벌이면서 아인슈타인의 저술을 (순수학문적인 물리학 저서까지도) 샅샅이 찾아내 불태우고 있었다.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경계했던 아인슈타인은 스스로를 ‘세계인’ ‘자유인’으로 인식했다.
1925년 1월, 부인 엘자와 함께 아랍국가의 텔아비브를 방문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아인슈타인. 퍼블릭도메인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영국 등을 돌아다녔다. 유럽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받아줄 곳을 찾고 있었다.

나치의 만행에 실망한 아인슈타인이 프로이센(독일) 과학아카데미에 탈퇴서를 제출하자 과학아카데미는 '그가 해외에서 행하고 있는 악질적인 선전활동을 볼 때, 그의 사표를 유감스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내에서 부당하게 퇴출당한 유대인 학자들을 위해 유럽 각국의 정부와 학계에 탄원하였다. 그 덕에 1천여 명의 학자들에게 의지할 곳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유럽에서 보호받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히틀러에 동조하는 우파세력들의 영향력이 아직 컸고, 그가 마음으로부터 사랑했던 스위스는 나치정부에 밉보이지 않으려고 몸을 사렸다. 일부 역사비평가의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가 아인슈타인을 받아주었다면 중립국 스위스도 무사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평가도 있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의 무게는 무거웠다.

아인슈타인은 결국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침 프린스턴대학의 고등연구소가 그를 소장으로 초빙한 상태였다. ‘세계평화’라는 역사의 섭리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핵무기 개발을 서두를 때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미국 과학자들은 한발 먼저 그것을 만들었다. 물론 핵폭탄은 독일이 먼저 패망한 뒤 일본에 가서 떨어졌지만, 만약 독일이 망하기 전 핵실험에 성공했다면 핵폭탄은 그곳에 먼저 떨어졌을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세계평화를 위하여 미국에 협력하고 원폭개발에 힘을 실어준 아인슈타인의 결심을 풍자한 시사만화.
‘비둘기 날개(나약한 평화주의)’를 벗어놓고 칼을 든 그림 아래 ‘아인슈타인이 칼을 빼들다’라고 쓰여 있다. 퍼블릭도메인

‘평화주의자’인 아인슈타인은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배 물리학자들이 그것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에 서명함으로써 이 프로젝트에 무게를 실어준 것은 직접 참여 이상의 영향력이 있었다. 1939년 여름의 일이다. 나치 독일이 핵개발을 서두르고 있다는 얘기, 수천만의 인명이 그 전쟁으로 인하여 살상되고 있으며, 특히 유대인 말살정책은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들이 그의 불가피한 결단을 재촉했다. 그 자신이 학자로서 잠시 당한 수모는 약과였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평화적인 수단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해군자문관 위촉을 받아들였고, 1944년에는 나치 독일에서 망실되어 버린 자신의 ‘상대성 원리’ 원안을 손으로 다시 써서 해군에 기부하였다. 그 논문은 유일한 육필 논문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열린 경매에서 650만 달러에 팔렸다. B-29 폭격기를 3대나 구입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되던 날 아인슈타인은 집에 있었다. 뉴스 내용을 비서가 전해주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비통하게 탄식하였고, 종일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가공할 무기를 만드는 데 자신의 ‘E=mc²’ 공식과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한이 주요한 몫을 했다는 데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이 인류에게 잠재적 위협이 되며 언젠가 다시 사용될 수도 있다는 데 대하여,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평화운동가로서의 아인슈타인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인도 시인 타고르와(1930년) 2)인도 수상 자와할랄 네루와(1949년) 3)미국여행 중 챨리 채플린과(1931년) 4) 맨해턴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와(1950년). 퍼블릭도메인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비평화적 방식의 저항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는 2차 대전과 같은 상황은 한 마디로 ‘미친 세월’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나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아인슈타인은 전쟁 없는 세계국가, 전 세계가 하나의 체제 아래 평화 공존할 수 있는 세계정부의 결성을 바랄 뿐, 극단적인 유대민족주의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오히려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겪어야 했던 유대인의 나라를 외면하지는 못했다. 이스라엘에 히브리대학 설립을 위한 모금에도 동참하였고, 대학에 방문하여 축하의 연설도 하였다.

1952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뜻밖에도 사망하자 이스라엘에서는 후임자로 아인슈타인도 거론되었다. 실제로 주미 이스라엘 대사로부터 의향을 묻는 전보가 날아오자 아인슈타인은 완곡한 표현으로, 그러나 신속하고도 분명하게 사양의 뜻을 전달했다.

큐레이터 & 도슨트=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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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화폐 5리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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