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경의 人花方暢 4] 무소유가 주는 행복, ‘들꽃’ 김형석

박애경 기자
  • 입력 2019.04.01 14:46
  • 수정 2021.06.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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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박애경 기자】 김형석. 1920년 평안남도 대동출생. (현)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오늘 내가 마주한 사람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은 올해로 꼭 백년을 살았다. 그의 질곡진 백년 세월은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함께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몰락,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어지는 6.25전쟁과 두 개로 쪼개진 대한민국, 독재정권의 어두운 그림자, 그 속에서 피어나는 민주화의 몸부림, 글로벌 경제위기와 극복, 그리고 이념으로 또다시 서로를 할퀴어대는 지금의 대한민국까지 그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직접 목도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남기는 말은 “백년을 살아보니, 지금이 행복한 세상”이란다. 베푸는 삶, 나누는 삶을 실천하며 사는 지금이 자신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세상이라고 강조한다. 백년의 내공으로 숙성된 그의 행복론을 듣기 위해 나는 그의 강연장을 찾았다.

지난 3월 21일 고려대학교 미디어관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주제로 그의 오픈강의가 열렸다. 100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거친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일정한 음량과 톤으로 120분 동안 강연을 했다는 것이다. 강의 중 “뮁가하면(뭐냐하면)”을 여러 번 반복하는 특유의 평안도 억양은 작고(作故)한 나의 부친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더 따뜻하고 푸근하게 와 닿는 진심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의 그가 준 생생한 메시지를 정적인 활자로 정리해 본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평생 살아오면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여러 번 반복하여 자문한다. 나의 경험에서 얻어진 해답은 인생의 시기마다 추구해야할 가치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크게 30세 이전과 30~60세, 그리고 60세 이후로 나뉜다.

 

30세 전까지 인생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라

30세가 될 때까지는 교육을 통해 인생관과 가치관을 정립하는 때이다. 장래를 위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 계획을 세워야 할 시기이다. 나의 학창시절 긍정적인 영향을 준 지인들이 셋 있다. 시인 윤동주, 의사 홍창의, 소설가 황순원이다. 중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윤동주 군은 ‘살아있는 동안 좋은 시를 쓰는 일’이라는 또렷한 인생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와 같은 분명한 목표를 세우지 않았던 나는 ‘윤동주는 지금은 병아리 시인이지만 훗날 세상에 큰 울림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시는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그는 그의 목표를 이룬 것이다. 홍창의 군은 중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했다. 특히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며 꿈을 구체화했다. 가난과 미진한 의료혜택으로 인해 일찍 생명을 잃는 어린아이들이 많았던 당시의 상황이 그에게 그런 가치 있는 꿈을 꾸게 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나의 선배인 황순원 작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그 선배 역시 중학생 때부터 소설가가 되겠다는 확고한 뜻이 있었고, 결실을 맺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갈지, 목표가 뚜렷했다. 이처럼 30세까지 인생목표를 정하고 성실히 정진한 사람은 훗날 크게 성공했고 또 보람 있게 살았다.

 

30세~60세는 돈보다 일의 가치를 좇아라

30세부터 60세까지는 일하는 시기이다. 일을 통해 인생의 행복과 성공을 끌어가는 기간이다. 저마다 하는 일은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이 내 인생에 가치가 있는지를 자문하고 또 해답을 찾아야한다. 종교가 말해주는 지혜로운 교훈이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며 무소유의 진정한 가치를 설파한다. 기독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가치가 소유에 있지 않음을 구체적으로 설파한다. 무소유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일에 대한 가치관을 세우는데 중요한 척도가 된다. 소유를 위해서만 생애를 바친다면 결국 무의미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래서 30세부터 60세까지 가장 왕성하게 일할 시기에는 돈을 좇지 말고 가치를 좇아야한다. 돈을 위해 일한다면 당장은 이윤이 남지만, 가치를 추구하면 일이 또 다른 일을 낳게 되어 결국 더 많은 수입으로 이어진다.

나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30대 중반에 연세대학교 전임강사로 일하게 됐다. 그때는 옛날이지만 대학에 적을 두게 되면 식생활과 자녀교육 등 기초 생활은 걱정 안 해도 되었던 때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교수들 중에서 가장 가난했다. 고생스럽게 살았다. 그 이유는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시절에 나는 무려 여섯을 낳아 키웠다. 게다가 전쟁 후 북한에 있던 동생들 세 명이 내려와 한집에 살았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갈 나이었던 동생들과 어머님까지 부양해야 할 식구가 무려 10명이었다.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될 줄 안다. 당시 집도 없고 먹을 것도 부족했지만 가족들의 정은 부족함 없이 두터웠다. 나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기 위해 아이들은 버스대신 도보로 통학하고, 염소도 키우며 용돈을 해결했다.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 연세대 봉급만으로는 생활이 안 돼 다른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며 열심히 벌었다. 강사료가 적은 국립대학인 서울대를 1년 반 정도 출강하고 대신 강사료 고려대와 숭실대 등 사립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다행히 그때부터 생활이 좀 나아지고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저 그때에 나의 인생 목적은 궁핍함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다 일의 가치관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일하는 내 제자가 찾아왔다. 찾아 온 목적은 대구지역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600~700명이 1년에 한 번씩 한자리에 모이는데 거기서 기념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가고 싶었지만, 같은 시간에 삼성그룹 강연이 잡혀있어 못 간다고 거절했다. 몹시 아쉬워하는 내 제자의 어두운 표정에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삼성그룹 측에 양해를 구해보겠다 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면서도 내 마음 한편에는 삼성그룹이 거절해 주길 바랐다. 이유는 삼성그룹 강연을 하면 차량도 지원해주고, 강사료를 대구보다 배가 넘기 때문이다. 다행히 삼성그룹에서 나의 대구 강연을 위해 시간을 바꿔주는 배려를 해주었다. 대구 강의를 마치고 서울역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수입이 목적이 되어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돈보다는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날이었다. 앞으로는 돈을 위해 일하는 것을 하지말자. 무엇이 더 중한지 경중을 따져 소중한 일을 찾아서 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일이 더 늘어나고 수입도 더 늘게 됐다. 나는 책을 많이 쓰는 편인데, 어떤 책은 홍보를 해도 많이 팔리지 않았다면, 또 어떤 책은 홍보를 안 해도 많이 팔리는 경우가 있다. 책의 내용이 좋으면 독자가 독자를 불러오고 또 다른 독자에게 전달되면서 많이 팔리게 되더라, 돈만 벌기위해 일을 할 때는 일이 돈과 함께 끝나곤 했다. 그런데 가치 있는 일을 선택했더니, 일이 일을 만들고 수입도 자연히 따라왔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선택의 중요함과 일에 대한 소중함과 애정이었다.

 

60세 이후는 자기성장과 나눔의 삶을 살아라

60세 이후는 인생의 열매를 맺는 시기이다. 인생의 노른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식과 직장으로부터 해방되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때이다. 이 시기를 잘 살아내는 사람이 이후의 노년을 행복하게 경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때보다 인생경영이 중요한 시기이다. 일찍 고령화 사회로 되어버린 일본의 경우 60이후의 세대들에게 권하는 삶의 경영방식이 있다. 첫째, 봉사활동을 하라. 둘째,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라. 셋째, 젊었을 때 못했던 취미활동을 시작해라. 나는 이제 인생 후반전에서 열매 맺기를 소망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 싶다.

첫째, 절대 놀아서는 안 된다. 봉사가 됐든 놀이가 됐든 무슨 일이든 하라. 그리고 무엇이든 배워라. 나를 포함해 안병욱, 김태길을 철학계 3총사라고 불린다. 우리는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이른바 철든 나이인 60-75세까지 성장하려고 노력했다. 김태길은 <한국인의 가치관>이라는 책을 76세에 집필했고, 나 역시 철학에 관한 책을 70대에 썼다. 이처럼 성장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야한다. 노력한다면 성장은 90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은 보람을 가져온다. 나를 성장시키는 방법으로는 독서를 권하고 싶다. 일찍이 문화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의 국민들은 80%이상이 독서하는 나라이다. 독서를 통해 인문학이 이어지고, 인문학으로 인해 사상이 풍부해진다. 사상이 살아있는 사회라야 문화도 융성해진다.

두 번째로는 베푸는 삶을 살길 바란다. 80쯤 되고나니 생활형편이 좋아졌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서 나의 수고스러움이 좀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함임을 깨달았다. 일은 나와 타인의 인생에 행복을 주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80이 넘어 나는 먼저 베푸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자 내 인생도 행복해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면 흐뭇하고 행복했다. 2017년 ‘유일한상’을 받게 됐다. 교수로서 받기 어려운 영광스런 상인데다가. 상금이 엄청 많았다. 교수월급 4년 치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상금을 받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번 돈은 나와 내 가족이 사용해도 괜찮지만, 상금은 사회가 나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돈도 내 가족 돈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회에 다시 돌려주기로 맘먹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부탁해 좋은 곳에 써달라고 당부했다. 인생에 있어 바람직한 경제관은 열심히 일해서 많은 수입이 생기면 사회에 되돌려주는 것이다. 나의 나눔으로 사회가 행복해지면 나도 함께 행복해진다. 불행한 사회 속에서 나만 행복할 수는 없다. 나누는 삶이 별다른 게 아니다. 크게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타인들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도 소중하다. 만약 기업가라면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나누는 것도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아첨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둘째, 선의의 경쟁은 좋으나 이기적인 마음에 상대를 헐뜯거나 비방하지마라. 셋째, 절대로 편 가르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의 당부 속에는 갈수록 어수선해지는 우리 정국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진하게 내재되어 있었다.

그의 힘 있는 메시지는 50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뜨거움과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나는 가치를 좇으며 일을 했던가? 눈앞에 이익에만 몰입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반추했다. 그리고 제2의 인생준비에 앞서 올바른 방향등을 킬 수 있게 한 귀한 강연이었다.

나는 김형석 교수님의 인생에서 들꽃을 보았다. 산 들녘, 강기슭에서 이름 없이 피고 지며 온 강산을 아름답게 꾸미는 들꽃. 때로는 너무 흔하여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욕심 없이 살아가며 이듬해 봄의 전령사가 되어 돌아오는 들꽃들처럼 그의 인생도 그러한 것 같다. 들꽃이 의지하는 들풀 역시 같은 마음이다. 이러한 들풀의 마음을 류시화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들풀처럼 살라 / 마음 가득 바람이 부는 / 무한 허공의 세상 / 맨 몸으로 눕고 맨 몸으로 일어서라 / 함께 있되 홀로 존재하라 / 과거를 기억하지 말고 / 미래를 갈망하지 말고 / 오직 현재에 머물라 / 언제나 / 빈 마음으로 남으라 / 슬픔은 슬픔대로 오게 하고 / 기쁨은 기쁨대로 오게 하라 / 그리고는 침묵하라 / 다만 / 무언의 언어로 / 노래 부르라 / 언제나 들풀처럼 / 무소유한 영혼으로 남으라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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