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⓷] 레일바이크

김경 기자
  • 입력 2019.07.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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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강중근씨는 무작정 차를 몰고 어둑어둑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다. 생각할수록 화가 부글부글 끓는다. 벼르고 벼른 기세였다. 아내 진소미는 가자미눈을 하고서 한여름 소낙비에라도 빙의된 듯 마구 퍼부어댔다.

"지겹다, 지겨워. 떼거리로 몰려다니면 다야? 꼴같잖게 무슨 귀하신 얼굴이랍시고 모자 푹 눌러쓰는 것도 모자라 마스크를 파스인 양 착 붙이고… 도대체 결과가 뭔데? 집은 용케도 잊지 않고 기어든단 말씀이야, 흥!"

아내는 완전히 딴사람처럼 냉갈령부리며 중근씨를 휙 밀치고 돌아섰다. 얼음바람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듯 몰아쳤다. 사실 중근씨는 몇 달째 계속되는 노조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중근씨는 이를 앙다물고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는다. 13년 된 차체에서는 어김없이 폭발적인 탱크 소리가 쏟아진다. 차까지 화를 보탠다. 집회 대오를 향해 거품을 물고 욕설을 퍼붓던 사측 멤버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아내는 평소에도 현실감이 없느니, 아직도 40대인 줄 착각한다느니 하면서 걸핏하면 이죽거리기 일쑤였다. 아내의 그런 태도에 이골이 날 대로 난 지 오래인데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울컥했다. 그 놈 때문이야! 중근씨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친다. 애꿎은 클랙슨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낸다. 차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아내는 쉰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모 잡지사 편집부에서 기선을 잡고 있다. 한 달쯤 전에 아내가 불쑥 H의 얘기를 꺼냈다. ‘모국을 빛낸 주역들’이라는 제호의 특집란을 꾸미던 중에 H가 부상했다는 거였다. 경제난이 심각한 만큼 경제인 쪽으로 초점을 맞췄고, 그 그물망에 H가 덥석 걸려들었다. 무려 30여년을 까맣게 잊고 지낸 중근씨와 H였다. H는 로스앤젤레스에 꽤 유명한 레스토랑 본점을 두고 시애틀, 시카고 등 무려 10여 군데에서 분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정치인에게 두둑한 후원금까지 내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중근씨와 과 동기인 H는 유난히 미끈한 얼굴을 쳐들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거리며 교정을 활보하던, 좀 건방쟁이였다. 4년 후배인 아내를 중근씨보다 먼저 점찍었다며 중근씨의 코뼈를 부러뜨린 사건도 있었다. 아무래도 특집 인터뷰 이후로 아내가 돌변했지 싶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H가 서울에 온다던 날인가? 아니면 모레? H는 미술에 대한 깊은 조예로도 중근씨의 기를 죽이곤 했다. 언젠가 포장마차에서 H는 묻지도 않은 다비드의 얘기를 주절거렸다.

"‘나폴레옹의 초상화’ 봤냐? 다비드와 나폴레옹의 만남, 그 결실로 탄생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지. 삶의 의미란 바로 그런 것 아니겠어?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 특히 예술가에게는 더더욱…."

H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내를 자꾸 흘낏거렸다. 일순간 아내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숨이 멎을 정도로, 아니 밤하늘을 뚫고나온 북극성도 눈을 감을 판이었다.

중근씨는 마른침을 가까스로 삼키며 앞을 주시한다. 밤길에 번쩍이는 차량의 불빛이 쉴 새 없이 눈을 찌른다. 원주 표지판을 본 것 같은데, 벌써 또 횡성을 지난다. 초조하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대산? 설악산? 문득 작년 이맘때 회사 동료들과 워크숍을 했던 가리왕산 휴양림이 뇌리를 스친다. 하늘에라도 닿을 듯 죽죽 뻗은 소나무 숲과 찰랑대던 투명한 옥색 계곡물, 그리고 상큼한 공기…. 식구들을 데리고 꼭 한 번 오리라 마음먹었는데…. 그래, 내친김에 가리왕산에서 산소 흡입, 폐나 세척하고 보자. 중근씨는 장평에서 평창 방향의 국도로 재바르게 접어든다.

뜻밖이다. 휴양림 못미처 민박집들이 제법 달콤하게 손짓한다. 일단 길가에 자리한 슈퍼마켓 앞에 차를 세운다. 2홉들이 소주 세 병과 땅콩, 비스킷, 그리고 초코파이 한 곽을 주섬주섬 챙겨든다.

주위가 떠들썩하다. 중근씨는 그만 눈을 뜨다가 화들짝 놀란다. 방 안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내동댕이쳐진 소주병들, 과자부스러기, 수건, 양말 등이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 가만 있자, 입구를 봉쇄한 경찰을 피해? 아, 아니다. 결코 시위 현장이 아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상막하다. 속까지 쓰려온다. 유리창은 벌써 아침 햇살에 실컷 두들겨 맞은 눈치다. 중근씨는 민박 손님이고, 또 다른 손님이라곤 아이 셋이 딸린 한 가족뿐이다.

"어디로 가십니까? 우린 레일바이크 타러 구절리로 갈 겁니다. 실은 오늘이 결혼기념일인데… 글쎄, 이 사람이 어린애처럼 그걸 타고 싶다네요."

"같이 가요, 아저씨."

예닐곱 살 됨직한 계집애가 살갑게 중근씨의 팔을 잡아끈다. 레일바이크는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다. 화창한 봄날, 레일바이크는 연둣빛 풍경 속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달렸다. 아내가 느닷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야호! 레일바이크라면 얼마든지 탈 수 있다구.”

신혼 초에 중근씨는 아내에게 샛노란 자전거를 선물했다. 나란히 한강변을 달린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아내는 학교 운동장만 벗어나면 페달에 발을 올리고선 벌벌 떨었다.

중근씨는 선뜻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여태 아내는 문자 한 점도 보내지 않았다. 맥없이 올려다본 하늘 저 멀리 잿빛 구름이 잔뜩 진을 치고 있다.

"안전수칙, 명심하세요. 앞뒤로 반드시 20미터 간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자, 브레이크 시험하고 출발!"

안내원이 말이 끝나자마자 중근씨는 폐달을 밟는다. 자전거는 2인용과 4인용이 있다. 중근씨는 그 가족의 장남인 9살배기와 함께 2인승에 올랐다. 한 시간 거리인 아우라지가 종착역이다. 두어 구비를 돌고서 슬며시 앞뒤를 살펴본다. 맨 앞과 맨 뒤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다. 한 번에 움직이는 길이가 그만큼 길다. 바람이 살랑거린다. 수수밭이 통째로 흔들리는 게 참 멋스럽다. 이제 자전거는 완전한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힘들이지 않고 거침없이 바람을 가르며 질주한다. 이 통쾌한 맛이라니. 이번 시위 첫날만 해도 그랬다. 아무런 걸림 없이 내달았다. 냉철한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한 수 위라는 것도 재인식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상황은 예상과 빗나갔다.

“아저씨, 부딪쳐요!”

아차, 중근씨는 급히 브레이크를 움켜쥐었으나 쿵, 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그만 앞의 자전거를 거세게 들이받고 말았다. 정신이 번쩍 든다. 중근씨는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린다. 뒤따라오는 자전거는 저만치 떨어져서 온다. 앞뒤 유념하지 않고 함부로 달린 게 문제였다.

휴게소에 당도해 잠시 멈춘다. 녀석은 자전거에서 훌쩍 내려 가족을 향해 달려간다. 중근씨는 선로 옆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풀밭에 꽃들이 만발했다. 보랏빛 쑥부쟁이, 하얀 구절초, 남빛의 달개비 등등. 하나하나도 각각 아름답지만 한데 모여 있는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아우라지 역을 향해 출발한다는 방송이 나온다. 중근씨는 몸을 돌려 레일을 바라본다. 한 사내가 멍하니 서 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아니 오랜 동안 보아온 낯익은 허깨비 몰골이다. 아, 늘 혼자서만 정신없이 달리던 자기 자신이다. 휴대폰이 부르르 떤다. 아내다. 짧고도 긴 문장이 액정에 수를 놓는다.

‘시한은 오늘밤 자정, 1분의 1초라도 늦으면 영원히 끝!’

아내는 무식하다. 일요일의 상행선을 전혀 가늠하지 못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야박하다. 그나저나 염글리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장이다. 우리의 만남은 바로 이런 절박한 교감이 예술이다. 어중이 예술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근씨는 담배를 비벼 끄고서 열쌔게 레일바이크에 몸을 싣는다. 페달 돌아가는 소리가 휘파람 소리보다 더 경쾌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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