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③] 서울도심여행···젊음의 성지, 대학로에서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 성균관까지 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3.25 16:44
  • 수정 2020.03.2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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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의 추억 한자락

며칠째 우리를 괴롭히던 황사가 말끔히 사라지고, 걱정했던 추위까지 눈에 띠게 누그려져, 일행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보인다.

혜화역으로 올라오니 맨 먼저 연극표를 싸게 파는 청춘들의 호객소리 요란하다. 이 길은 대학로 연극거리와 손바닥만 한 잎사귀들 속에 중년들의 추억도 함께 나부끼는 마로니에 공원이 나온다. 공원 안에는 젊은 연주가의 기타소리가 들려오고, 어디선가 70년 초반쯤 유신 체제아래 민주주의 허기를 갈구했던 청춘들의 노래, 박건의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 들려올 듯하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내리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윤선도의 생가 터를 품은 ‘예술가의 집’

(예술가의집, 사진=한국문화예술원 제공)
(예술가의집, 사진=한국문화예술원 제공)

공원 안에는 우리 건축계의 선구자인 박길룡(1898~1943)이 설계하고 일제강점기 때 경성 제국대학 본관으로 사용했던 사적 278호의 <예술가의 집>이 세월의 한켠에 서있다. 화단 안에는 조선의 천재시인 윤선도의 생가 터가 있고 <오우가(五友歌)>를 새긴 시비가 우뚝하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 하리….

건축가 김수근의 아르코미술관

(아르코미술관, 사진=한국문화예술원 제공)
(아르코미술관, 사진=한국문화예술원 제공)

광장 안에 붉은 벽돌의 건물들이 몇 개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아르코미술관이다.

(옛 국립부여박물관, 사진=뉴시스제공)
(옛 국립부여박물관, 사진=뉴시스제공)

건축가 김수근은 80년대 민주열사들의 탄압하기 위해 만든 고문전용건물인 <남영동 대공 분실>을 설계했다.

또한 일본 신사와 쏙 빼닮은 국립부여박물관을 지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옛 국립부여박물관‘은 김수근의 초창기 작품성향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인데

한옥의 맞배지붕을 닮았다고 하지만 일본의 대표적인 신사인 이세신궁과 너무 닮아, 건축 당시에도 왜색 논란에 휩싸였다.

 

 

최초의 국립병원 ‘대한의원’

(대한의원,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대한의원,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건너편에는 적벽돌과 화강암을 쌓고 지붕은 동판으로 덮은 네오 바로크 양식의 서울대 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이 있다.
1899년 4월 최초의 국립병원으로 내부병원이 설치되었으며, 1900년 6월에 광제원으로 바뀌고, 1907년 3월 다시 대한의원으로 바뀌었다.
급기야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면서 조선총독부 의원으로 바뀌는 비운을 맞았다.

혜화동 성당 가는 길, 일요일 여는 ‘필리핀마켓’

(필리핀 마켓, 촬영=윤재훈 기자)
(필리핀 마켓,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동 성당 쪽으로 오르면 일요일에만 국내에 거주하는 필리핀인들이 여는 <필리핀마켓>이 나오고 진열된 물건들은 대부분 소박하다.
현지인들을 위해 고국에서 물건을 배송했을까? 옛 시절 소풍갈 때 구멍가게에 간 기분이다.

서울의 3대 성당  ‘혜화동성당’

(혜화문(동소문),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문(동소문), 촬영=윤재훈 기자)

잠시 후 성당이 보이고 멀리 보이는 혜화문이 오늘따라 더욱 장엄하게 보인다. 오늘 우리가 이 성당을 찾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곳이 우리 역사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서울의 3대 성당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3대 성당’을 꼽으라면 <서울의 명동성당>, <전주의 전동 성당>, <대구 계산 성당>이다. 여기에 서울의 3대 성당을 들라면 <약현 본당(중림동 성당, 1893년)>, <종현 본당(명동성당 1898년)>, <백동(혜화, 1927.4.29) 본당>이다. 그중에 가장 오래된 성당은 약현 성당이다.

사실 기초를 먼저 닦은 것은 명동 성당이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약현 성당이 먼저 건축이 되었다. 그 시절 도성 내 사목은 명동 성당에서 맡고, 도성 밖은 약현 성당이 맡아, 현재 서울대 교구 내 본당 대부분은 명동성당이 아닌 약현성당에서 갈라져 나온 본당들이다.

나는 이곳에 오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몇 년 전인가 지인의 안내로 동신 고등학교 옆에 있던 수도원에 우연히 들른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곳으로 산보 나오시던 김수환 추기경님을 만나 잠깐 동안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입적하셨다. 바보라는 이명(異名)이 붙으신 분, 나는 두고두고 그분과의 짧은 만남을 추억할 것이다.

(혜화동 성당,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동 성당,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동 성당은 서울에 탄생한 3번째 본당이며, 대한민국 서울에서 첫 번째로 지정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제 제230호(2006.3월 지정)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절두산 순교성지 기념관의 설계자이기도 한 건축가 이희태 요한(1925~1981)이 설계 했으며, 국내파 건축가로 기존 성당의 개념을 거부하고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인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철저하게 비주류적인 건축인생을 살았으며 그의 소신이 녹아있는 본당의 모습은 단순명료하다. 여기에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대칭의 입면구성 등 기존 성당건축의 정형화된 틀을 깬 양식으로, 1960대 이후 교회 건축의 한 전형이 되고 있다.

특히 당시 한국 성당의 고딕양식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던 붉은 벽돌(김수근 건축가 많이 사용, 아르떼미술관, 경성제대 본관 서울대 병원 등)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모더니즘 건축기법을 도입한 근대적인 건축의 모습을 띤다.

계단 위에 올려진 건물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단순한 상자 형으로 지어졌고 내부는 기둥이 없는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공간을 이루고 있다. 전면 현관 위 <최후의 심판도>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요한복음서)”와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카복음서)”는 성경 구절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서 저자 상징이 좌우에 있다. 화강암 부조로 1961년 김세중 프란치스코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완성하고 장기은 교수와 함께 조각한 부조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103인의 순교성인화,1977년>이다. 이것은 문학진 토마스 화백이 10개월 동아 전례, 역사, 복식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밀도 있게 표현해 낸 작품이다. 시대와 신분이 다른 순교자들이 기쁨에 찬 모습으로 천국으로의 귀환을 기다리는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이남규 루카 교수가 1980년과 1989년에 걸쳐 제작한 유리창에 있는 작품도 숙연함을 준다.

이종상 요셉 화백이 1994년 제작한 <부활 성수대> 위에 임영선 교수가 예수 부활상을 얻은 합작품이다.

상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못 자국이 선명한 두 손을 포개고 있다.

오랜만에 근사한 작품들을 감상하고 마당으로 나오니 아담한 찻집이 있어 우리의 발길을 잡는다.

 

 

 

 

혜화동 성당이 품은 개화기의 수난사

(강화도 광성보 돈대, 촬영=윤재훈 기자)
(강화도 광성보 돈대,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동 성당의 역사를 알려면 개화의 물결이 한창 밀려오던 개항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86년 한불수교가 체결되고 나서야 천주교 박해가 끝나고, 이 땅에도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서양을 배워야한다는 캐치플레이 아래 1868년 메이지(명치明治) 유신을 단행했다. 쇄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던 도쿠가와 막부를 해체하고 천왕중심 중앙집권체제로 회귀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본은 나라의 문을 활짝 열고 새로운 문물을 맞아들이기에 분주했는데, 조선은 대원군의 집정 아래 여직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리고 명성황후와 서로 일본과 청나라의 외세를 끌어 들이기에 바빴다.

이런 조선에 상황을 간파한 일본은 군함과 총으로 무장하고 강화도로 밀려들어와 해안선을 측량한다는 명분으로 운요호(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그것을 빌미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는다. 또한 양인(洋人)들도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을 일으키며 무자비하게 조선으로 진입하여 학살과 문화재 약탈을 일삼는다. 그때의 침략의 흔적은 지금도 강화도 수많은 돈대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한옥으로 지은 ‘혜화동 동사무소’

(혜화동 동사무소,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동 동사무소,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동 로타리 건너편에는 3대째 운영되고 있다는 동양서림이 보인다. 혜화동과 대학로 일대는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한 블럭만 안으로 들어가면 옛 시절의 풍경들이 아직은 많이 남아 하루에 다 구경하기에 벅찰 정도다.

우리는 골목길을 따라 이 땅에 유일하게 한옥으로 지은 <혜화동 동사무소>을 찾았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은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단숨에 탈피시키면서 안온하게 앉아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한소제씨가 지은 한옥으로 2006년 리모델링을 통해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운 동사무소로 재탄생하였다.

(동사무소 담장, 촬영=윤재훈 기자)
(동사무소 담장, 촬영=윤재훈 기자)

궁궐 후원을 본 뜬 벽의 문양들도 푸근하다. 여기에도 입구에는 찻집이 있으며 안에도 한옥 스타일로 지어져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민들이 찾아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서류들을 떼고 있는 모습이 더욱 정겨워 보였다.

뒤란으로 돌아가니 한옥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고 외부로 좁다란 복도가 약간 있는데, 기둥에 작은 돌짐승 조각까지 있다. 특히 자그마한 뜨락에는 소나무 아래 의자까지 놓여있어 여름날 도심에서 잠시 더위를 피하기에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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