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⑥】 서울도심여행_박물관 투어1 국립 한글박물관과 국립 박물관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5.13 13:02
  • 수정 2023.02.15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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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심여행_박물관 투어1 한글박물관. 국립박물관

노원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세계에서 6번째로 큰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윤재훈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사진=윤재훈 기자)

여행이란,

자연 속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는데, 박물관 투어도 특별하다. 평소에 우리가 접하기 힘든 문화제와 멋진 예술 작품을 골고루 한 장소에서 구경할 수 있으며, 계절에 따라 열리는 초대전이나 기획전들은 더욱 특별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가는 길도 특별하다. 이촌역에 내려 2번 출구로 가면 지하계단을 오르기 전 왼쪽으로 <국립중앙박물관><국립한글박물관>으로 바로 연결되는 지하통로가 나오기 때문이다.
국립 박물관이 두 군데나 붙어 있어서인지 어머니 손을 잡고 나선 아이들이 많다. 아주 긴 평지 엑스컬레이터가 펼쳐져 있고 아주머니 한 분이 떡을 팔고 있다.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나온 탓인지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다. 홀로 앉아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쓸쓸하다.

(“떡 사세요!”. 사진=윤재훈 기자)
(“떡 사세요!”. 사진=윤재훈 기자)

회원들의 얼굴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다. 초등학고 저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자매가 두 사람 있어 안전에 더욱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미리 사전답사를 한 곳이라 오늘 가야할 길들이 눈앞에 훤히 펼쳐지는 듯하다.

지하통로를 따라 5분여 걸어 밖으로 나오니 정면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커다랗게 서 있다.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박물관이다. 문득 지난해 갔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이태리의 바티칸 박물관, 스페인의 프라도미술관,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이 떠오른다. 나는 지난해 두 번째로 세계여행을 떠나 16개월 동안 지구의 반 바퀴 정도를 돌다가 왔는데, 운 좋게도 세계의 4대 박물관을 다 돌고 왔다.

중앙박물관의 본관은 동관과 서관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지하 1층·지상 6층이며 3개 층으로 나누어 전시되고 있다. 길이는 404미터이며 최고 높이 43.08미터의 건물이다.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바로 뒷편으로 가까운 거리에 전쟁박물관이 있어 걸어가고 싶었지만, 미군부대가 막고 있어 갈 수 없다.

박물관 주위의 대부분의 땅은 일제에게서 해방이 되고 70여년 이상 미군들이 점령하고 있는 치외법권지역이라고 하니, 아직까지 해소되지 못한 약소민족의 서러움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나마 지금은 평택으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라 하니, 머지않아 주인에게 인계되어 남산까지 연결된 거대한 시민공원으로 조성될 거라 한다.

서울 도심 속에서 푸른 숲이 일렁이는 산길을 따라 남산까지 올라가는 꿈을 꾸어본다. 아마도 이 자리에 부대가 자리잡은 것은 물류를 옮기기 쉬운 한강이 바로 근처에 있고, 거기다 용산역까지 있었으니 근대사 수탈의 장소로는 최적이었겠다.

먼저 박물관을 지나 오른쪽으로 5분여 걸어가면 한글박물관이 나온다. 엑스컬레이터로 바로 오르면 2층이다. 1층은 도서관만 있고 특별한 볼거리가 없으니 2층부터 3층까지 보면 될 것 같다. 한글 박물관답게 우리의 모국어인 한글에 관한 두 가지 전시가 있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국립 한글박물관 전경. 사진=윤재훈기자)
(국립 한글박물관 전경. 사진=윤재훈기자)

 

<한글의 큰 스승전>

<한글의 큰 스승>전은 성균관 유생들과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노력, 그 이후 조선에서 현대까지 한글 발달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우리 근대기에 나타난 작품들의 면면은 옛 향수까지 느끼게 했으면, 100여 종류가 넘어가는 『춘향전』 작품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도 인상 깊었다.
우리 한글의 발달에 대해 이렇게 많은 분들의 지대한 공헌으로,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쉬운 글을 국어로 사용하는 긍지 높은 국민이 될 수 있었는 모양이다.

(안과의사보다 지성인다운 면모가 풍기는 공병우 박사. 사진=윤재훈 기자)
(안과의사보다 지성인다운 면모가 풍기는 공병우 박사. 사진=윤재훈 기자)

특히나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아 약간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중에서도 존경 받는 안과의사이면서 진료를 받으러 온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의 영향을 받아, 사재를 털어가며 3벌식 타자기를 개발했던 공병우 박사의 활동이 인상 깊었다. 일제가 극악하게 탄압하던 말기에는 강압적인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금일 공병우 사망’이라는 전보까지 날려 집안을 놀라게 했다고 하니 그 기개가 놀랍다.

1953년 7월27일 체결된 정전협정문의 정본(正本)도 공병우타자기로 작성해, 유엔군의 마크 클라크와 조선인민군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펑더화이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크 클라크와 김일성은 펜으로, 펑더화이는 붓으로 서명했다고 한다. 내용을 한글, 중문, 영문으로 교환했는데, 그때마다 공병우타자기로 작성한 문서가 가장 빨리 나왔다고 한다. 박사의 좌우명은 “시간은 생명이다.”였다고 하니 그의 인생관과 노력에 짐작이 간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우리나라 최고의 안과라는 공안과에 가서 백내장 수술을 받고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정도로 우리 근대의 타자기 발달사에 지대한 공헌을 끼친 줄 몰랐었다. 그런 분이니 의술에서도 인술을 베풀었을 것 같다. 또한 의료인으로서 얼마나 한글 사랑이 지대하셨으면 18년 동안이나 한글학회 이사장를 지냈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에 노력한 민청련에 지원도 아끼지 않았으며, 돌아가시자 PC통신에 그 분에 대한 조의글이 넘쳐나 최초의 <네티즌들의 사회장>이라고 표현되기까지 했다.
그 분의 유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몸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되었다.

(고종 특사로 활동할 당시의 헐버트, 40대. 사진=윤재훈 기자)
(고종 특사로 활동할 당시의 헐버트, 40대. 사진=윤재훈 기자)

또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외국인 중 1위 <호머 베절릴 헐버트>와 <베델> 등도 인상 깊었다. 헐버트는 고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최측근 보필 및 자문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했으며,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그가 온지 3년만인 1889년 세계 지리, 전체, 풍습, 산업, 교육 및 군사력 등을 망라한 최초의 한글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발간하였다.

“그는 서툰 조선어에도 불구하고 한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으며,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쓰고 배우기가 편한 한글 보급과 조선인들에게
국제교류에 필요한 기본지식을 제공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대한제국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대한제국 멸망사』라는 역사서까지 만들고 국제여론에 호소한 덕분에, <국보 경천사 석탑>까지 되찾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역사 속에서 지워져가고 우리 한국인들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니, 역사 선생님들이나 위정자들의 책임이 큰 듯하다. 그분의 크나큰 한국사랑에 감사하면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만 하다.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다.
먼저 한민족은 보통 사람도 1주일이면 터득
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하였다.
한글은 각 글자마다 하나의 소리만 있는 우수한 글자다.”

- <헐버트의 고별증언> 1949.7.2.

“글자 구조상 한글에 필적할만한 단순성을 가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뉴욕트리뷴지』에 실린 헐버트의 글

그의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는 W. E.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조선(Hemet Kingdom)』과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Corea and her neighbors)』을 합쳐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이다.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사진=윤재훈 기자)
(대한매일신보 창간호. 사진=윤재훈 기자)

또한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도 한글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으로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한 그는, 1907년 국한문판 8천부, 국문판 4천부, 영문판 4백부 등 그 시절에 무려 3개의 신문을 발행하며,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의 한국 사랑도 특별했으며 세계 각국에 한국의 각고(刻苦)한 현실을 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일제의 요주신문이 되었으며 통감부의 압박으로 실질적인 경영주인 양기탁과 두 번의 재판까지 회부되는 고초를 겪으며 무죄선고를 이끌어냈다. 이에 일제는 영국 정부를 직접 압박해 상해로 강제 소환시켜 6개월 형을 받게 만들었고, 안타깝게도 1909년 5월 1일 서거하고 만다.

그 후 1910년 5월 21일 통감부에 매수된 뒤 통감부의 기관지가 되었다. 발행인이 이장훈으로 바뀌고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에는 결국 ‘대한’이라는 글자만 때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락되고 만다. 이후 서울신문 전신이 된다. 두 분 다 양화진 외국인묘역에 있다.

(100여 종류 가까이 간행된 춘향전과 박씨전, 사씨남정기, 절세가인 등의 표지, 딱지본, 방각본 소설 잡지들도 보인다. 사진=윤재훈 기자)
(100여 종류 가까이 간행된 춘향전과 박씨전, 사씨남정기, 절세가인 등의 표지, 딱지본, 방각본 소설 잡지들도 보인다. 사진=윤재훈 기자)

개화기 시절, 우리 한글 발달에 소설과 잡지들도 역할도 지대하다. 가장 인기를 끌었던 춘향전은 100여 종류 가까이 간행되었으며, 그 이외에도 박씨전, 사씨남정기, 절세가인 등의 표지가 보이고, 딱지본, 방각본 소설을 비롯한 각종 잡지들도 보인다.

 

<한글 디자인 형태의 전환전>

근대로 넘어오면서 우리에게 생소한 다양한 한글 글꼴의 발달사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한글을 상상하며 디자이너들이 만들어 놓은 옷들이 이채롭다.

(한글과 자모들이 들어간 디자이너들의 작품. 사진 =윤재훈 기자)
(한글과 자모들이 들어간 디자이너들의 작품. 사진 =윤재훈 기자)

밖으로 나오니 박물관 뜨락이 넓고 시원했다. 바로 왼쪽에는 쉼터가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실내에는 책상과 의자들이 잘 조성되어 있어 그룹으로 공부하기에도 좋았다. 도시락도 먹을 수 있으며 단체로 온 아주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오른편으로 나있는 숲길에는 어머니 가르마 같이 하얀 억새들이 바람 따라 나풀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이라도 나온 듯 재잘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니 공터가 나오고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탑들을 복원해 놓았다. 날아갈 듯한 옥개석 끝이 우리의 처마를 닮았다. 마치 하늘 위로 둥둥 떠오르고 싶은 듯이.

<br>(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 사진=윤재훈 기자)<br><br> (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 사진=윤재훈 기자)
(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 사진=윤재훈 기자)

보물 282호인 <고달사 쌍사자 석등>을 보자 오래 전 한강 1,300리 길을 걸으면서 지나갔던 남한강가에 있던 거찰(巨刹), <고달사지>를 생각했다. 이제는 폐찰이 되어 그 흔적만 남아 쓸쓸했던 절터. 그 뜨락에는 두 마리 사자가 앞발로 불발기집(화사석火舍石)을 받들고 있었다. 우리나라 3대 선원 중의 하나인 고달원으로 이름을 떨치던 곳,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고려시대 초기쯤에나 만들어졌나 보다.

(국보 100호인 남계원 7층 석탑. 사진=윤재훈 기자)
(국보 100호인 남계원 7층 석탑. 사진=윤재훈 기자)

딱 떨어지는 숫자로 국보 100호인 <남계원 7층 석탑>, 얼른 보면 8층처럼 보일 수 있지만 7층이다. 탑은 보통 홀수로 쌓는데, 지대석과 1, 2층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대석은 직접 땅과 맞닿은 부분이며 탑의 기초역할을 하고, 1층, 2층 기단은 탑신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2층 기단은 상대적으로 높다.

탑을 이해할 때 목조건축을 생각하고 그 구조를 이해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 여기에 ‘백제탑이나 고려시대의 백제계 탑은 기단이 1층만 있으며, 신라계의 탑은 2층의 기단’을 가지고 있다. 특히 2층 기단은 1층에 비해 매우 높아 탑신으로 착각하기 쉽다. 중앙 박물관으로 올라갈 때는 호숫가 옆에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벽으로 막아져 있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지나치기 쉬우니 잘 찾아야 한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이 온다는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건물로 이사를 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7번이나 이사를 감행해야 했던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의 수난의 역사는, 2004년 4월 19일을 끝으로 경복궁 안 국립박물관 시대의 막을 내렸다.

1991년 한미반환협정에 따라 용산기지 골프장을 돌려받으며 용산 가족공원과 박물관을 만든다. 그 후 1997년 10월 31일부터 약 8년에 걸쳐 완성된 박물관은 이제 60년 수난의 역사를 마감했다. 2005년 10월 28일 약 9만 평의 대지 위에 세계에서 6번째로 큰 위용을 가지고 탄생한 국립박물관은 관람객 수 아시아에서 1위, 세계에서 10위에 해당하는 인기몰이를 하며 마침내 용산시대의 막을 열었다.

우리 한국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은데, 우리 땅에서 해방이 된지 60년 만에 나라의 얼굴인 국립박물관이 단독 건물을 가지게 됐다고 하니, 누구에게 그 잘못을 물어야 하나. 조선은 천도를 하자마자 종묘를 짓고 나라의 정신인 성균관을 지었는데 말이다.

(회원들과 함께, 국립 중앙박물관 앞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회원들과 함께, 국립 중앙박물관 앞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2008년 5월 1일부터는 상설전시관과 어린이박물관은 무료로 전환됐으며 야외 전시장도 별도로 갖추어져 있다. 부설극장으로 '용'이 있으며 부설 시설로는 전통염료식물원과 우리가 지나온 한글박물관이 있다. 총 6개의 관과 50개의 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12,044점의 유물을 전시되고 있으며, 전시물은 외부전시일정과 유물의 보존 상태에 맞춰 주기적으로 교체되고 있다.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삼한, 가야, 삼국시대를 거슬러 발해, 고려, 조선까지 망라하고 있으며, 서화관과 수많은 기증자들의 전시관, 조각, 공예관 등이 있다. 특히 아시아관에는 인도를 비롯해,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유물들이 있으며, 신안해저유물도 있다.

(기운차게 생동하는 사신도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주는 ‘고구려 무덤 벽화’. 사진=윤재훈 기자)
(기운차게 생동하는 사신도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주는 ‘고구려 무덤 벽화’. 사진=윤재훈 기자)

현무(玄武)는 사신(四神) 중의 하나로 생명의 끝, 곧 죽음을 알리는 북쪽(北)의 수호신으로 검은 색을 나타내므로 현(玄)이라고 한다. 오행 중에서는 물(水)을 상징하며 계절 중에서는 겨울을 관장한다.

기운차게 생동하는 사신도는 ‘고구려 무덤 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북벽의 현무가 연출하는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과 회화적 완성도는 조사보고 당시부터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다.

(이집트 지혜의 신 토트Thoth를 상징. 사진=윤재훈 기자)
(이집트 지혜의 신 토트(Thoth)를 상징. 사진=윤재훈 기자)

따오기는 ‘달, 지혜, 글의 신’으로 알려진 이집트 지혜의 신 토트(Thoth)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역병의사가 쓰는 가면이 모습도 따오기 부리랑 비슷하다고 한다. 후기 시대에 ‘신비(神秘)라는 의미의 ’주신(主神)으로 아문Amun/아멘Amen을 대신해 신전에서 최고의 신으로 추앙되는 경우가 많은 새이다.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Amun. 위키페디아)
(이집트 최고의 신 아문(Amun). 위키페디아)

그러나 호주에서는 매우 흔한 새로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서 먹이를 찾는다고 하여 비둘기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비둘기를 닭둘기라고 부르는 것처럼 호주에서는 비칭으로 Bin Chidken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의 조에츠 신칸센에서에서 운행 중인 ‘토키/Max 토키’라는 이름도 따오기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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