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⑧] 서울 도심여행 박물관투어3_용산공원갤러리ㆍ남영동대공분실 기념관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5.29 15:22
  • 수정 2020.06.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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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투어3 용산공원갤러리ㆍ남영동대공분실 기념관

 

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대한민국 미군부대의 산역사, <용산공원 갤러리>

 

“개인이나 국가나
‘공존’은, 힘을 갖추었을 때만 유지 할 수 있다.”

 

(‘용산공원 갤러리’로 돌아오는 일제 시대 건축물. 사진=윤재훈 기자)
(‘용산공원 갤러리’로 돌아오는 일제 시대 건축물. 촬영=윤재훈 기자)

“그대는 아시나요
서울 안에 캘리포니아 땅이 있는지!
나는 오늘 서울 여행 중에 캘리포니아 땅에 다녀왔습니다.
점점 한국으로 이전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그 미군부대 안에서는 카페나 식당 그 어느 것도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한강은 흐른다. 사진=윤재훈 기자)
(한강은 흐른다. 촬영=윤재훈 기자)

 

“이름도 없이 그림자처럼 김씨, 김씨,
그렇게 불리다가 굳어진 이름 ‘캠프킴’”

 

전쟁 박물관 건너편에는 75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는, <용산공원 갤러리, 캠프 킴!>이 있다.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해 감에 따라 현재는 입구 쪽에만 조그맣게 2층까지 전시관으로 꾸며 이 땅에서 누렸던 미군들의 힘과 미래, 그리고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1900년대 초반 건물로 추정되는 이 갤러리는 과거 일제 시대에는 일본군 병영으로 사용되다가 미군이 주둔하면서 주인이 바뀌어, 우리 땅 안에서 남의 나라 건물로 한 세기가 넘어가고 있다. 지도를 보니 서울 안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부지가 있었을까 싶다. 다시 한 번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절감하며 이제 점점 미군들이 평택으로 이전해 가면 대단위 공원으로 조성된다고 한다. 멀지 않아 서울 안에서 푸른 숲이 일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란 즐거움 기대감이 들지만, 평택에서는 또 얼마나 어마어마한 부지를 차지할까 감이 잡히지 않는다.

 

“영내는 아직도 캘리포니아 주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만약 한국인 범인이 있다고 해도, ‘범인 인도협정’을 받아야 한다.”

 

바로 이 용산부대를 <캠프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옛 시절 영내에서 한국인 노무자들을 부를 때 김씨가 가장 많은 듯하여, 이름 대신 “김씨, 김씨” 부르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한다. 나라 없는 식민지 백성으로 살다가 보니 무슨 인권이나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바랄 수나 있었을까?

65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작성된 정전협정문,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W. 클라크 서명이 보인다
(65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작성된 정전협정문,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W. 클라크 서명이 보인다, 촬영=윤재훈 기자)

“대한민국 국토 내, 미국인들의 땅, 캘리포니아
우리는 오늘 대한민국 내 미국 땅에 왔다.”

 

그 후 해방이 되었지만 외세에 의해서 찾아온 해방은 다시 한민족의 가슴을 찢어 버렸다. 친일파들은 다시 몸을 바꾸어 외세의 입맛대로 붙어 관리가 되어 호의호식하고, 생명을 바쳤던 독립군들과 그의 자손들은 다시 가난과 천대를 받으며, 역사 청산은 되지 못했다.

 

"오만한 전쟁 승리자들의 이익에 의해 허리가 잘린 조국,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백성들이었던 한국인들."

(담장 안에서는 노랫소리 가득했을 ‘할로윈 데이’, 사진=윤재훈 기자)
(담장 안에서는 노랫소리 가득했을 ‘할로윈 데이’, 촬영=윤재훈 기자)

 

“저는 용산기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용산기지에서의 시간은 정말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소중히 여기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 다니앤 다너트, 1982년 SAES(기지 내 초등학교) 졸업생

 

5,60년대 영내 밖 한국인들은 찢어질 듯한 가난에 허덕이며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에 급급할 때, 담 너머 미군부대 안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어른과 아이들 할 것 없이 <할로윈 데이>를 즐기며, 한국에서의 추억 쌓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지옥의 <남영동대공분실>

(촬영=윤재훈 기자)

이제 여기서 5분여 걸어가면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민주인권기념관>이다. 다른 말로 우리 민족사에 가장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비인권적이고 국가 권력에 의해 국민들의 인권이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말살 당했던 장소, 정권의 방패가 되었던 슬픈 현장이다.

 

너는 투구와 갑옷으로
방패와 곤봉으로
중세의 기사처럼 우스꽝스럽게 서 있구나
동생아
그대로 장난감 병정처럼 서 있어다오
누가 내 팔목에 잔인한 고춧가루를 뿌리더라도
납처럼 서 있어다오
우리는 형제니까 미워하지 않으니까
싸움닭으로 거리와 광장에서
몇 평 닭장에서 푸드덕거리지만
우리는 아프다
털 뽑히는 싸움보다는 어울려 노래하고 싶다
가슴에 안기어
새와 바람의 자유 햇빛과 그리움
따뜻한 사랑에 젖고 싶다
깨어지고 우리는 싸운다
매서운 할큄과 쪼임을 준다
참담한 등 뒤의 하늘은 언제나 웃고 있다
쓰러져 씻기우는 건
진실로 포옹하고 싶은
이 땅의 무성한 무리
그러므로 그대로 있어다오 가슴은 하나이니까
누가 불칼을 쥐어주더라도
끝까지 우리는 살붙이 형제이니까
-  <투계>, 나해철 시인

 

1976년 5층 규모로 지어져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사용되다가 1983년 7층으로 증측되었다.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검찰청장까지 해먹었던 김치열과 그의 하수인들이 권력에 아부하며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비명횡사하게 만든 장소, 오늘 그 안은 겨울 찬바람만 불고 대단히 을씨년스럽다. 별로 넓지 않은 이 대공분실 안에 많을 때는 400명의 경찰과 100명의 행정병, 청소, 용역 팀들까지 합쳐 모두 500명 이상이 바글거렸다고 한다. 그 시절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 간판은 국제 해양 연구소, 또는 국제 법률 연구소 등으로 달았다고 한다. 이렇듯 철저하게 인권을 유린했던 고문소는 ‘김수근’ 건축가의 철저한 설계에 의해 완성되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고, 평등하다.”
- 세계인권선언 제1조

 

인간의 가장 극단까지 몰고 가 결국은 짐승의 심정만 남게 하는, 아니 결국에는 인간이 짐승이 되게 하고야 마는 고문, 우리나라에는 대표적인 3대 고문기술자가 있다. 일제 치하와 해방공간에서의 ‘노덕술’, 5공 시절에 그 유명한 ‘이근안’, 6공 시절에는 국회의원까지 지낸 ‘정형근 전 의원’이다. 고문 피해자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존재, 그런데 노덕술과 정형근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감옥에 한 번 간 적도 없이 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호의호식 했다.

(드르륵 쇠문이 닫히고 나면 이제 세상과는 단절이다. 사진=윤재훈 기자)
(드르륵 쇠문이 닫히고 나면 이제 세상과는 단절이다. 촬영=윤재훈 기자)

수갑을 찬 채 눈까지 가리고 호송차에서 내렸을 때, 레일을 따라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저 두꺼운 쇠문이 닫혔다고 한다, 얼마나 공포스러웠을까. 이제 ‘나의 조국’이지만 국가 폭력배들에 의해 일제 치하와 똑같이,

 

“나에게는 인권(人權)이 없다.”

(특별히 작은 창문으로 만든 5층. 촬영=윤재훈 기자)
(특별히 작은 창문으로 만든 5층. 촬영=윤재훈 기자)

 

친일파 내무부 장관, <김치열>

올려다보면 5층은 특별히 작은 창문으로 되어있다. 혹시라도 고문 도중에 뛰어내릴지도 모르니 일부러 창문을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김수근은 저 건물을 보고 자신의 작품이라고 자랑스러워했을까?

(앞쪽에서는 보이지 않고 뒤쪽에서만 보이는 문. 촬영=윤재훈 기자)
(앞쪽에서는 보이지 않고 뒤쪽에서만 보이는 문. 촬영=윤재훈 기자)

고문실로 올라가는 문이다. 이제 이 문을 지나면 인권(人權)이 끝나는 지점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왔던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악하고 추악한 짓거리들이 곧 펼쳐질 것이다.

(촬영=윤재훈 기자)
(촬영=윤재훈 기자)

두 눈을 가린 채 두 손까지 수갑에 묶이고 옆에는 저승사자와 같은 개들이 팔을 옭죈다. 그리고 텅, 텅, 거리는 쇠음을 따라 나선형 철제 계단을 빙, 빙, 돌며 5층까지 올라가면, 가기 전에 정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다. 그러니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몇 층으로 올라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한 번이라도 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받고 나온 사람들은 지하실로 내려 같다고 하는데, 이 건물에는 지하실이 없다. 아마도 5층에서 고문 받고 눈을 가리고 내려오다 보며 어디로 가는지 방향 감각조차 잃어버린 모양이다. 김수근은 철저하게 그것까지 계산하며 건축했을까?

(끔직한 고문의 현장. 사진=윤재훈 기자)
(끔직한 고문의 현장. 촬영=윤재훈 기자)

방들의 구조와 색이 똑같아 만일 밖으로 도망 나왔다고 해도 입구를 찾기가 곤란했다고 한다. 그나마 세상이 밝아져 이제는 국민들이 이런 현장을 직접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박종철 열사 고문 현장. 사진=윤재훈 기자)
(박종철 열사 고문 현장. 촬영=윤재훈 기자)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가 이근안 등의 물고문에 의해 숨지게 된 방 509호이다.

(아들의 동상 앞에서 오열하고 계시는 어머니. 촬영=윤재훈 기자)
(아들의 동상 앞에서 오열하고 계시는 어머니. 촬영=윤재훈 기자)

방으로 들어가니 하얀색 벽에 뽕, 뽕, 구멍이 뚫려 있다. 이 구멍들은 고문을 할 때 나오는 소리들을 흡수하여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게 하는 천인공노할 장치라고 한다.

(위에 유리를 통해 밖에서 안을 감시할 수 있다고 한다. 사진=윤재훈 기자)
(위에 유리를 통해 밖에서 안을 감시할 수 있다고 한다. 촬영=윤재훈 기자)
(민주인사 김근태 전 의원이 남긴 책. 촬영=윤재훈 기자)
(민주인사 김근태 전 의원이 남긴 책. 촬영=윤재훈 기자)

민주인사 김근태 전의원이 민청련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 기술자 이근안으로부터 고문을 받고, 그 폭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515호실, <짐승의 시간>이란 책 제목이 그 시절의 참상을 증언한다.

해설자가 한 쪽 벽에 붙어있는 관물대 같은 것을 들어내자 숨어있던 빨간색의 벽이 나온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방마다 색깔들이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전체가 빨간색으로 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끔직하다.

밖으로 나오니 남영동 대공분실 머리돌에는 1976년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라고 써 있다. 인권을 짓밟고 독재정권의 주구(走狗)가 되어, 친일인명사전 법조부문 1차 명단에 수록되었던 친일파. 그는 <사성 김해 김씨>이며 전국에 2,000여 가구 정도가 산다고 한다. 기존의 김해 김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던 왜장 <사야가>가 그들의 시조라 한다.

사야가는 부산 동래에 상륙하여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고 하며 조선에 투항했다고 한다. 그 공로로 왕실로부터 김해 김씨와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임금이 내린 김해 김씨라 하여, 사성 김해 김씨 시조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그 후손이 다시 친일을 했으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 하다.

그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이후락, 김종필 등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자 200억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각서를 써가며 구걸을 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그 땅이 1,000억 정도로 가치가 올라가자 다시 반환해 줄 것을 국가에 요청하여 되찾아 갔다.

해마다 박근혜 고액 명단 후원자에 빠지지 않고 올라간다. 그런 그가 옛 시절의 비리에 물으면 ‘기억이 없다’는 등 하면서 철면피 같은 얼굴을 들고 입을 다문단다.

 

왜색논란의 중심에 선 <김수근 건축가>

(일본의 이세신궁과 꼭 닮은 옛 국립부여박물관, 사진=뉴시스제공)
(일본의 이세신궁과 꼭 닮은 옛 국립부여박물관, 사진=뉴시스제공)

남영동 대공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공포와 고통을 위해 철저히 계산되어 건축된 건물이라고. 모든 방에 욕조를 설치하여 물고문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사람들을 고문하여 그 육체와 정신을 파괴시키는데 최적화된 설계를 했다고. 그도 알았을 텐데, 그는 어이하여 이렇게 치밀한 감옥을 서울 시내 한복판에 남겼을까?

그는 독재정권과도 친해 81년 7월 당시 주한 미국대사 워크를 초대해 인사동 기생집 '동원'에서 전두환 쿠데타 실세 허화평, 허삼수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대부분의 건물을 혼자 독차자하고 당대 최고의 건축가라 칭해졌다. 그러다 일본 신사를 닮은 <부여박물관>까지 건축해 왜색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그 외 잠실 종합운동장(서울올림픽 주경기장), 세운상가, 경동교회, 주한 미국대사관, 국립중앙 과학관, 불광동 성당, 위커힐 호텔, 서울지방법원, 그리고 왜색 논란 후 짓기 시작한 붉은 벽돌 건물로 유명한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아르코 미술관,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는 또한 자신의 건축을 위해서는 문화재 파괴도 서슴치 않는 파렴치한이었다. 1964년 서울 남산 반공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자유센터(당시 반공센터)’ 석축을 쌓으면서, 조선시대 도성인 ‘서울 성곽(사적 제 10호) 성벽의 산 능선을 강제로 깎고 부지를 평탄하게 하며 성벽까지 뜯어내어 축대의 석축으로 사용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1차 도성 축조 당시 경상도민들이 피땀 흘려 축조한 구간이며, 석재 중에는 ‘경주시(慶州始)’와 ‘강자 육백 척(崗字 六百尺)'’의 각자(刻字)가 있어 이를 증명한다.

옛 시절 국민을 탄압하는 정권들이 있을 때, 이런 곳이 3군데가 있었다. 이근안 등이 간첩 조작을 하던 <남영동 대공 분실>, 박정희 시대 때는 중앙정보부로 전두환 때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사용했던 <남산분실>, 전두환 시절 보안사로 사용되던 <서빙고분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웃집과, 수많은 국민들이 전철을 기다리는 남영역 승강대 바로 건너편에서, 국가 폭력에 의해 이런 짐승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현재 이곳은 임시 운영 중이며 2022년 정식 개관 예정이다.

 

“이 공간은 과거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국가가 내 나라 국민에게 행한 폭력에 대해 철저히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만약 부대 내 버스투어를 원다면 매달 한 번씩 용산문화원에서 추첨을 하니 신청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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