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 Pre-View⑤] 이별에 관한 묵직한 울림 ‘조금씩, 천천히 안녕’

박애경 기자
  • 입력 2020.06.0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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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박애경 기자】 가족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가 ‘치매’이다. ‘치매’라는 소재로 가족 간의 갈등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로는 가족애를 더 단단히 이어주기도 한다.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는 과정에서 시청자는 슬픔과 감동이라는 감정선을 극대화시킨다.

치매를 흔히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이라고 한다. 쌓여진 추억과 기억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일 거다. 내 안에 소중히 간직한 시간의 기록이 지워진다면 기록자 뿐 아니라 동시대를 함께한 가족과 지인에게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슬픔에만 침잠하지 않는다. 치매를 ‘긴 이별의 시간’으로 표현하며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소중한 일상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잊혀가는 기억의 공간을 일상의 웃음과 여유, 그리고 사랑을 담아 따뜻한 시간으로 채워간다.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 이야기다. 나카노 료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나카노 료타 감독은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독립 장편 데뷔작 <캡처링 대디>를 시작으로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작품상, 우수 감독상, 우수 각본상 등을 휩쓴 <행복 목욕탕>을 완성시켰다. 이 두 작품을 통해 진한 감정과 세밀한 연출력으로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 세 번째 작품인 <조금씩, 천천히 안녕>도 그 연장선이라 하겠다.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버지 ‘쇼헤이’의 일흔 번째 생일에 그의 아내는 두 딸 ‘마리’와 ‘후미’를 불러 놓고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충격적인 소식에 두 딸은 슬픔에 사로잡힌다. 슬픔을 접어두고 가족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헤어짐을 준비하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조금씩 보듬어간다.

이들의 감정들은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으로 더욱 도드라진다. 나카노 료타 감독은 상대성이론 책이나 생일 케이크 등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장면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며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쇼헤이’의 시간이 특별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감각적으로 연출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장면은 ‘쇼헤이’가 갑자기 사라진 뒤 다시 가족들과 만나게 되는 회전목마 씬이다. 이는 아버지가 현재의 시간을 거슬러 행복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또한 ‘쇼헤이’의 치매 증상을 단계별로 구분하고, ‘마리’의 헤어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신경 썼다.

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집이라는 공간도 주목해야 한다. 나카노 료타 감독의 영화 속에서 집은 항상 또 다른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상징적인 역할을 해왔다.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쇼헤이’ 가족의 집을 세트가 아닌 촬영 전까지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던 곳으로 정했다. 살아있는 집의 분위기를 담기 위해 생활의 온기가 그대로 녹아 있는 장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또한 공간 속에서 가족의 연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예를 들어 거실에서 부엌이 보이는 구조를 선택해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곳을 한 화면에 담는다든지, 둘째 딸 ‘후미’가 아버지 생일 케이크 등을 직접 만드는 공간을 통해 따뜻한 감성을 담아내기도 한다.

감독은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을 제작하면서 “인간관계가 점점 희박해지는 지금 사회에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어져 있는 소통의 가치를 작품 속에 담아내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특히 가족과의 이별에 있어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집중했다. 그래서 엔딩 장면도 ‘쇼헤이’가 아닌 미래를 상징하는 손자 ‘타카시’의 모습으로 끝맺는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서 현재의 소중함과 희망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대본 뒷면에 “기억은 잃어도 마음은 살아있다”는 문구를 써넣은 나카노 료타 감독의 진심이 담긴 영화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묵직한 울림과 여운을 선사하며 관객들의 마음에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영화는 지난 5월 27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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