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⑨] 서울도심여행_흥인지문에서 이화마을 지나 장수마을까지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6.24 15:42
  • 수정 2020.06.25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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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흥인지문에서 이화마을 지나 장수마을까지1

 

“일본이 잠자고 있던 한국을 깨웠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국산화와 다변화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보물 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앞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대한민국 보물 1호 흥인지문(興仁之門)에서) 앞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동대문역 1번 출구로 나오니 아침부터 길 양편으로 좌판이 깔려있고 사람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하다. 길 건너편으로 나지막한 낙산의 산등성이 따라 억새가 하얗게 휘날리며 바람이 불 때마다 성곽과 키재기를 한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흰 군무를 볼 수 있다니, 대단한 행운이다.

보물 1호인 흥인지문(동대문1396년 태조 5년)은 숭례문(남대문1396년 태조 5년)과 같은 시기에 태어나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대한민국을 자랑 했는데, 어느 정신 나간 노인이 숭례문에 불을 내어 이제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랑하는 애인이 떠난 것처럼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기만 하다.

(흥인지문 앞 가게. 촬영=윤재훈 기자)
(흥인지문 앞 가게. 촬영=윤재훈 기자)

동대문의 정식명칭은 정도전에 의해 흥인문(興仁門)이라 지어졌지만, 낙산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용을 뜻하는 갈지(之)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바뀌었다.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 등 다른 4대문의 이름은 다 세자이다.

한양의 진산을 정할 때 태조와 친구처럼 지내던 무학대사는 인왕산 주산론을 펴고 정도전은 북악산 주산론을 폈다. 그러나 유학자인 정도전의 “군자는 남쪽을 향해 정치를 한다.”라는 안이 채택되어 북악산이 주산이 되고 종묘와 사직단·궁궐이 남쪽을 향해 들어섰으며, 각 방위에 맞춰 사대문과 사소문이 지어졌다.

그러나 무학은 동쪽의 낙산이 남자와 장자(長子)를 뜻하는데, 좌청룡이 너무 허약하여 장차 <장자 허약론>을 걱정하며 동향(東向)을 주장했다. 이후 조선 왕조는 27대를 이어오는 동안 장자 계승을 단 일곱 차례뿐이 못했다. 그마저도 단종처럼 왕위를 찬탈당하거나, 연산군처럼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하거나, 대부분 단명하였다. 장자로서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은 왕은 숙종 한 명 정도일 뿐이다. 만약 무학의 말대로 했다면 조선 왕조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사색당파(붕당(朋黨)에만 급급하지 않고 멀리 북방의 옛 고구려를 바라보며 좀 더 호기로운 기상을 가졌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또한 흥인지문은 수원 장안문처럼 특이하게 성 앞에 또 다른 작은 성곽인 옹성을 갖고 있다. 이는 군사적 목적도 있지만 동대문 일대는 청계천으로 물이 빠져나가는 지점인데, 지대가 낮다보니 물난리 위험이 있어 취해진 보완책 중의 하나이다.

4대문 중 가장 오래된 문이며, 조선시대 건축형태로 보존된 유일한 대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교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돈의문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왜군대장들 덕에 철거를 면하게 된 기막힌 사연까지 간직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진입할 때 남대문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동대문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자랑스럽게 입성하여 이 두 선봉장이 진입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남겨 두었다.

(낙산 억새. 촬영=윤재훈 기자)
(낙산 억새. 촬영=윤재훈 기자)

우리는 세계의 정세에 어두우면 안 되겠지만 특히나 일본을 잘 알아야 할 이유는 더욱 특별하다. 그것을 등한히 하고 근대 시대에 쇄국의 기치를 내걸며 대원군이 문을 굳게 닫고 있다 보니, 결정적으로 일본에 뒤처지게 되는 우(愚)를 범했다. 그 시절 일본은 명치유신의 깃발 아래 ‘세계를 배워야 한다.’며 항구를 개방하고 총과 군함으로 무장하였는데 말이다.

 

“군대 무기에서는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린 아이도 항우를 대적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다.”
- 숙종 조에 영의정을 지낸 남인(탁남)의 영수, (허적)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전쟁 범죄를 인정하며 전범들은 처단하고 있는데, 일본만 유일하게 백일하에 드러난 사실조차 거짓말로 일관하며, ‘정신대’까지 부정하고 전범들의 합사(合祀)장소인 신사를 총리들이 거리낌 없이 참배한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은 어느 시대에나 진리이다. ‘나라가 없는 민족에게는 인권도 없듯, 개돼지 취급을 받아도 어디에 하소연 할 데가 없다.’ 우리는 과거 식민지 백성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 시대 그들을 터부시 할 이유는 없지만,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오늘 아침에도 반가운 기사를 읽었다. 아베는 작년 7월 4일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겨냥해 ‘핵심소재 수출 규제’을 단행했다. 그때는 한국 기업들이 당장 절단날 것처럼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반·디와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업계는

 

“걱정은 그저 걱정이었을 뿐,
오히려 국산화를 높이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고 입을 모았다.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술학회의 박재근 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도

 

“일본이 잠자고 있던 한국을 깨웠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국산화와 다변화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흥인지문으로 행차 장면, 서울도성박물관에서. 촬영=윤재훈)
(흥인지문으로 행차 장면, 서울도성박물관에서. 촬영=윤재훈)

흥인지문 건너편에는 동대문관광호텔이 있는데, 저곳에 <경성궤도 회사>가 있던 곳이다. 1930년 11월 1일 개통하여 66년 7월까지 있었으며, 동대문에서 뚝섬과 광나루까지 궤도전차(협궤전차)를 운행했다.

동대문 종점(동대문구 제기동 892-71, 한솔 동의보감 빌딩 자리)인 성동구 일대는 조선 시대 물류의 중심지였다. 한강변의 뚝섬·두무개(두모포) 등의 나루에 강원도 등지에서는 목재와 땔감을, 충청도·경상도 등지로 부터는 식량과 잡화가 몰려드는 등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관문 역할을 했다. 또한 왕십리에서 뚝섬에 이르는 길가에는 채소를 키우는 밭들이 널려있어, 서울에 신선한 작물들을 실어 나르는 공급처였다.

본래 일제가 전차를 만든 이유는 군량미와 부식·군수물자 등을 편리하게 운송하기 위해 가설했지만, 해방 후에는 물자와 사람을 태워 나르는 대표적인 교통수단이 되었다. 서민들의 한숨과 사랑을 싣고 달리던 전차는 1960년대 중반까지 다녔다.

특이한 일로는 1936년 6월 18일 큰 사고가 났다. 오후시간 정원이 62명인 열차에 경성사범하교 보통과 3학년 96명을 태우고 가다, 용두교에서 브레이크 고장이 나 열차 간 충돌하여 많은 중경사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나는 흑해와 마르마라해가 내려다보이는 이스탄불이나 대서양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포루투칼의 리스본 시가지를 거닐면서 종일 도심을 가로지르는 빨간빛의 전차를 눈시리게 보았다. 1,900년 대 중반기 우리의 수도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었으리라.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에서 내려온 물이 청계천으로 빠져나가는, ‘오간수문’)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에서 내려온 물이 청계천으로 빠져나가는, ‘오간수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안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만들기 위해 동대문 운동장(경성운동장)을 파헤치다 이간수문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멀지 않는 곳에는 성벽 아래로 청계천 물이 빠져나가도록 수문 5개를 설치한 오간수문이 있었다. 그러나 1908년 성벽과 오간수문이 헐리고 이곳에 오간수교라는 다리가 생겼다.

그러다 최근에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다리 옆에 오간수문의 모형을 만들어 그나마 옛 모습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빠져나가며, 오간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에서 내려온 물이 청계천으로 빠져나간다.

또한 동대문 공원 일대는 본래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하도감(下都監)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원(訓練院,현 국립중앙의료원)이 있었다.

(동대문 운동장 제1회 조선신궁대회 육상 경기 모습)
(동대문 운동장 제1회 조선신궁대회 육상 경기 모습)

또한 히로히또의 결혼기념사업으로 식민지 국가에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경성운동장(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을 건설했다. 당시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니, 상당히 큰 규모였으며 이곳에서 우리나라의 각종 근대스포츠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종목은 경평축구 대항전이었다고 한다. <경성팀>은 축구명문인 경신중학교 출신을 주축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개인기들이 뛰어났다고 한다. 반면 <평양팀>은 일본 최강의 와세다 대학을 7:0으로 누른 숭실학교 출신이 주축이 되었다. 그들은 평양박치기로 표현되는 억센 서북의 기질이 배어있어 몸싸움과 체력전에 능숙했다고 한다.

 

“일부 짓궂은 관중들은 긴 작대기로 골키퍼의 등짝이나 엉덩이를 쑤셔대기도 했다.
스코어보드는 관중석 맨 뒤쪽에 세워놓은 칠판이 대신했다. 골이 터지면 진행요원이
분필로 써놓거나 흰 종이에 붓으로 써서 걸어 놓았다. 조명탑이 없어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경기는 종료되거나, 어떤 경우에는 군부대에서 지프가 동원되어 헤드라이트로
어둠을 밝히고, 경기를 속행했다.”(블러그, ‘송기룡의 푸른시절’)

 

1970년 월드컵 예선 한국과 호주 최종전, 바야흐러 한국은 호주만 잡으면 월드컵 진출이 결정된다. 후반 20분, 1대1 상황에서 천금 같은 페널티킥이 선언됐다.
키커는 임국찬으로 명 미드필더로 우수한 킥력을 자랑하였다.
그런데 주위 선수들에 의하면 그는 “얼굴이 새카맣게 긴장됐고" 급기야 실축을 하고 말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3만 관중은 얼굴이 시뻘겋게 됐고 임국찬의 집에는 돌이 날아들었다.
천하의 역적이 된 그는 끝내 이민을 떠났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마지막 날에 경성 운동장에서 치른 행사도 무척 의미심장하다. 조선의 제 26대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차남 (이우)의 장례식이 거행된 날이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이자 자신에게는 당숙이 되는 이준용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되었다. 그는 조선 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고 일본여성과의 정략결혼을 거부하며, 1935년 박영효의 둘째 서자 박일서의 딸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또한 일본의 패방을 예견하여 일본에 가지 않으려고 설사약까지 먹으면서 버텼으나 결국 끌려갔다. 그리고 해방을 불과 며칠 앞두고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했으며 일주일 후인 8월 15일 조선의 황손 이우의 장례식이 12시에 경성운동장에서 거행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참 아이러니하다. 일본의 동궁 즉 훗날 일본의 왕이 되는 히로히토(쇼와 천황)의 결혼기념으로 세워졌던 경성운동장에서 다시 세계사에 전범자가 항복 방송을 하고, 그 자리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 군 생활을 하던 조선의 황손의 장례가 치러진 것이다. 장례는 오후 5시로 미뤄져서 조선군 사령부 육군장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인 수행 무관 요시나라 히로무 중좌는 그날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를 대신해 자동차를 타고 사령부로 미리 출근해서 피폭을 면했지만, 부관으로 그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유해를 운구한 날 밤에 자살하였다.

(낙산에서 바라본 흥인지문. 촬영=윤재훈 기자)
(낙산에서 바라본 흥인지문. 촬영=윤재훈 기자)

해방 후 서울운동장으로 바뀌고 그 역사적인 현장은 이제 그토록 그리던 해방 정국에서 대규모 정치집회들이 열리기 시작한다. 1945년 12월에는 하루 사이로 반탁과 찬탁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급기야 이듬해 5월 1일 노동절 행사에는 축구장에서는 우익집회가, 야구장에서는 좌익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대의(大義)는 없고 자신의 정치 야욕에 따라 모인 이합집산(離合集散)들은 다시 당쟁의 그늘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동서 좌우로 극심하게 분열되고 만다. 외세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친일파들이 주축이 된 해방정국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특히나 스포츠 분야에서 서울운동장은 큰 역할을 했다. 70년대 <고교야구>는 지금도 가슴 설레게 했던 봉황대기. 황금사지기 등이 열렸다. 뜨거운 청춘들은 해가 저물 무렵이면 텔레비젼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매며 추억 속의 <박스컵 축구경기>를 보았다. 또한 1980년대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민들의 우민화의 서막과 함께 야구의 매력에 빠지게 하는 <프로야구>가 시작되면서 더욱 스포츠 메카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 화려했던 명성도 1984년 <잠실 종합경기장>의 건설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제 서울운동장의 명칭도 한 지역의 명칭인 <동대문운동장>으로 축소되며 사람들에게 추억 속의 장소쯤으로 전락했다. 그러더니 급기야 2007년에는 동대문야구장을 시작으로 헐려나가기 시작하더니, 2014년 동대문디자인 플라자(DDP)가 들어서면서 동대문 스포츠메카는 완전히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들 이인섭이 주간야구에 제공한 야구천재 이영민과 베이브루스)
(아들 이인섭이 주간야구에 제공한 야구천재 이영민과 베이브루스)

그 당시 경성운동장에서는 정말 걸출한 천재 운동선수가 한 명 탄생 되는데, 그가 바로 (이영민)이다. 그는 지금의 눈으로 봐도 정말 보기 드문 운동천재이다.

1923년 대구 계성 중학교에서 배재고보로 스카우트가 되는데, 이는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의 스카우트다. 그리고 바로 진가를 발휘하여 경인역전 경주대회에서 우승을 하더니 2년 뒤 연희전문 시절 400미터 경기에서 54초 6으로 조선 신기록를 수립한다. 같은 해에는 종목을 바꾸어 숭실대와의 정기전에서 연희전문 농구선수로 출전 하더니 승리까지 이끌어 낸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최고의 스포츠는 역시 축구였다. 당시 잡지 <개벽>에도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는 논설이 실릴 만큼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그 인기가 대단했다. 조선의 각 도시마다 축구팀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경기는 <경평전>이었는데 1929년 제 1회 경평전에서 평양 팀이 우승한다.

이에 체면을 구긴 경성팀은 1930년 최강의 멤버 구성으로 경성운동장에서 2차 경기를 하는데, 놀랍게도 이영민 선수가 여기에도 출전한다. 그리고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를 한다. 도대체 다른 선수들은 한 가지 종목에 온 힘을 다해도 빛을 볼까말까 한데, 그는 도대체 얼마나 운동신경이 발달되었으면 하는 종목마다 최고가 되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땅에서 야구로 가장 빛나는 선수가 된다. 연희전문 야구선수로 종목을 바꾸어 출전하여 1928년 경성의전 과의 경기에서 바로 경성야구장 제 1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들을 그는 계속해서 연출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전국고교야구를 총 망라하여 가장 높은 타율을 올린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이 수여 되니, 과연 그의 명성을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불세출의 스타도 술과 여자를 절제하지 못하고 나락의 길로 떨어지고 마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의 방탕한 생활에 가정은 깨지고, 셋째 아들 이인섭이 아버지를 미워하며 일탈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돈이 필요해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돈을 둔 곳을 알려줘
훔쳐오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배재고에 다니며 밴드브 였던 아들은 친구 2명과 공모하여 1954년 8월 12일 종로 필운동 집에 갔다. 아들은 밖에서 망을 보고, 그 중 한 명이 강도짓을 하다 총으로 아버지를 쐈다. 이후 그 친구는 무기징역, 본인은 단기 5년, 장기 7년의 형을 선고 받았으며, 1960년 4,19혁명 때 감옥에서 나왔다.

이 사건은 대서특필되고 전처와 남은 가족들은 숨어 지내다 이인섭을 교도소에 둔 채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모두 이인섭을 죽은 사람 취급 했으며 1994년 이영민의 시신을 화장하고 망우리에 있던 무덤마저 없애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우리 곁에 왔던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는 허무하게 떠나가고 말았다.

 

“그것이 참혹한 비극을 불러 일으킬 줄 정말 몰랐다.”

 

이제 아버지보다 더 많은 세월을 산 70살의 아들은 통한(痛恨)을 억누른 채 13년 만에 재창간 되는 <주간 야구>와의 인텨뷰에서, 속울음을 삭히며 지난 날을 뜨겁게 회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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