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④] 영월여행, 단종의 숨결을 따라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7.26 19:41
  • 수정 2020.07.2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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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여행, 단종의 숨결을 따라1

 

먼 유배길에 많이 지친 탓인가 보오
졸음에 겨워 잠깐 눈을 붙인 사이
저 하늘 너머로 어렴풋이 한양을 보았소
- <주천쉼터>에서

 

(사공은 배를 돌려 어린 영혼이 잠든 땅, 청령포로 향한다. 촬영 윤재훈)
(사공은 배를 돌려 어린 영혼이 잠든 땅, 청령포로 향한다. 촬영=윤재훈)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 폐위된 단종을 유배지까지 호송하던 의금부 도사, 왕방연

서강은 바보 같다.
그 강 건너, 천고(千古)의 유배지에 어린 단종을 두고 떠나오면서, 행여 이 강가에 앉아 왕방연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까?

강은 그냥 묵묵히 흘러간다. 그 속을 알 수가 없다. 잠시 여울을 만나며 사닥스럽게 큰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도, 이곳 청령포에 접어들면 다시 숨을 죽인다. 뙤약볕 받은 수면은 잠시 반짝거리며 묵상에 든 붓다 같아 도무지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다. 그렇게 잠시 흐르는가 싶더니 동강과 만나 남한강을 이루고, 이내 북에서 내려온 북한강과 만나 해원의 몸부림을 치면 한강(漢江)을 이룬다.

(자연으로 나왔지만 인류는 스스로 저지른 만행때문에 마스크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김수영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촬영 윤재훈)
(자연으로 나왔지만 인류는 스스로 저지른 만행때문에 마스크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김수영문학회 회원들과 함께, 촬영=윤재훈)

코로나의 여파로 실내생활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영락없이 우리들이 일으킨 인재(人災)다. 호모 사피엔스, 극심한 이기주의로 무장한 유전자,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는 모두 없애고 홀로 살아남은 종(種),

지금 지구는 그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 코로나 백신(?)을 이 지구별로 보낸 모양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오니 여름 산하는 뭇 생명들의 관현악으로 조화롭고, 하늘은 눈시리게 파랗다. 뱃사공의 노랫소리가 바람에 섞이어 들려오는 듯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빽빽하게 솟아있는 소나무들의 위용에 기가 질린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흔적이 역려하다. 하늘로 솟아오른 소나무들의 껍질에 깊게 패인 굴곡과 빛깔은 금방이라도 용이 승천할 듯 위용이 깊다. 이곳은 포천에 있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인 국립수목원 <광릉>처럼 보존이 잘 이루어진 봉산(封山) 같다.

(단종도 강가에 나와 이 들꽃을 보았을까, 촬영 윤재훈)
(단종도 강가에 나와 이 들꽃을 보았을까. 촬영=윤재훈)

이곳에 서면 조선 역사에 두 사람의 <정순왕후>가 생각이 난다. 바로 ‘정순왕후 김씨’와 ‘정순왕후 송씨’다. 한 사람은 화려하게 살았지만 한 사람은 까닥하면 노비까지 될 뻔하게 불행하게(?) 살다 갔다.

‘정순왕후 김씨’는 조선시대 가장 치세를 이루었다는 21대 영조의 계비(繼妃)이다. 그녀는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의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1759년 6월 9일 정식 중전간택을 통해 김한구의 딸과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린다.

영조의 나이는 66세, 그녀의 나이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큰 나이차였다. 심지어 1735년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보다도 10살이나 어렸다.이렇게 어린 날 궁궐로 들어온 그녀는 점점 권력의 욕망에 깊게 함몰되어 갔나보다. 역사 속에서 그녀는 사도세자를 모함하여 죽게 만들고, 친정 ‘벽파’들과 공모하여 정조를 방해하고 독살까지 한 여인으로 기록된다. 순조의 새 증조할머니로 수렴청정을 하며 ‘시파’들을 숙청하고 정조의 개혁을 되돌려 놓은 여인으로 조선 왕조의 대표적인 악녀로까지 지칭된다.

1800년 8월 18일 손자 정조가 승하하고 증손자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한다. 그리고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남인과 소론 시파들을 축출한다.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이 저절로 종식될 것”

이라며. 그리고 급기야 1801년 2월 22일 사학의 엄금을 하교하며, 세계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인 '신유박해(辛酉迫害)'을 일으킨다.

(초여름 신록이 진저리친다. 촬영=윤재훈)
(초여름 신록이 진저리친다. 촬영=윤재훈)

먼 유배길에 많이 지친 탓인가 보오
졸음에 겨워 잠깐 눈을 붙인 사이
저 하늘 너머로 어렴풋이 한양을 보았소


유배행렬을 향해 눈물짓던
정순왕후 그대의 마지막 모습도 함께…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길로 접어든
예감이 드는구려
- <주천쉼터>에서

또 한 사람은 정순왕후 송씨이다. 위화도 회군을 하여 역성혁명을 단행한 이성계는 마침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개성 수창궁에서 2년을 있다가 한양으로 조선으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고려의 ‘적자전통’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단종은 아버지 문종에 이어 조선 27대(태조 포함) 왕손 중 2대에 걸쳐 가장 확실한 장손 적통이다.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은 ‘주산(主山) 논쟁’이 벌어졌다. 고려의 신하로 잠시 낙향하는 듯하더니 이방원의 부름으로 장자방이 되어 많은 피를 불렀던 하륜은, 산세가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가 안산(무악산)을 주산으로 하자고 하고, 정도전은 북악 주산론을 폈다.
여기에 절충안으로 젊은 날 이성계의 친구였던 무학은 ‘인왕산 주산론’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동쪽, 즉 좌측은 장자(長子)에 해당하는데, 낙산은 125m로 규모가 너무 작아 장차 장자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태조의 첫째 가는 장자방의 한 사람인 성리학자 정도전은 “군자(君子)는 남쪽을 보고 정치를 한다”며 ‘북악주산론’을 밀어 붙였다. 이 안이 받아들여져 도성의 모든 건물들은 이 방위에 맞추어 설계됐다.
그 후 조선은 무악의 예언대로, 스물일곱 명의 왕(대한제국 고종, 순조 포함) 중 단 일곱 명인 문종(文宗), 단종(端宗), 연산군(燕山君), 인종(仁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순종(純宗)만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대로 왕 노릇을 한 사람은 현종과 숙종 단 두 사람뿐이라고 하니, ‘왕생사(王生死)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흰구름처럼 가벼이 살 일이다.”

(단종어소(端宗御所). 촬영 윤재훈)
(단종어소(端宗御所). 촬영=윤재훈)

단종의 사당이 소나무 숲에 쌓여있다. 기구한 어린 왕 단종은 어린 시절 세종대왕의 품 안에서 사랑 받던 잠깐의 시절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불우한 삶을 마쳤다.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 휴유증으로 돌아가시더니, 6살 때 할머니 소헌왕후마저 돌아가신다. 급기야 10살 때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승하하시더니, 1452년 12살 때는 마지막 보루였던 병약한 아버지 문종마저 지병이던 등창의 재발과 악화로 승하하신다.

명분상 세워 두었던 허울뿐인 어린 영혼은 혈혈단신으로 왕위에 올라 김종서와 황보인, 수양대군의 섭정을 받으며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 1455년 7월 25일 수양대군의 측근세력들이 선위를 강요하여 단 3년 만에 상왕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이듬해 1456년 세조 2년 음력 6월 부당함을 느낀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만다. 이후 그 사건에 연류 되었다는 구실을 만들어 1457년 6월 21일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다음 날 청령포로 유배를 당한다.

1457년 세조 3년 9월 경상도 순흥에서 귀향살이를 하던 세조의 여섯째 친동생인 금성대군 유(瑜)가 단종 복위하려다 발각되어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다가 사사되고, 그해 10월 24일 17세의 단종마저 처참하게 교살당하고 만다.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들은 모두 공신들의 노비로 분배되는 참변을 당하고 멸문지화(滅門之禍) 된다.

“한 마리 슬픈 새 궁전을 나와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이네
밤이 오고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1년이 오고가나 이 원한을 다하지 못하네

새 지저귐 끊긴 새벽, 남은 달빛은 흰데
봄 계곡에 핀 꽃은 피 같이 붉더라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내 슬픈 기도 듣지 못하고
어찌 수심 깊은 내 귀에만 들려오는가.”
- 단종이 마지막으로 머문 관풍헌 ‘자규루’에서 지은 시

이후 정순왕비는 조선 왕조 가장 애처롭게 살아가는 비운의 여인이 된다. 1457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당하고 그녀는 궁중에서 쫓겨나더니, 급기야 남편은 교살을 당하고 그녀는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을 당한다.

조선말의 문장가인 김택영의 글에 보면 세조의 역성혁명에 일등공신이었던 신숙주는 문종의 당부까지 잊고 사육신과 생육신들과의 약속도 저버린 채, 수양대군에게 그녀를 자기 집 노비로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최대의 능욕(凌辱)을 한 셈이다. 그런 그를 우리 역사에서 변절자의 표본으로 삼으며 숙주나물이라는 놀림감으로 수백 년 지속되고 있다.

이후 세조는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으로 보냈다고 한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세조의 일말의 양심이었는지, 마지막 왕가의 체면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청령포에서 바라본 서강. 촬영 윤재훈)
(청령포에서 바라본 서강. 촬영=윤재훈)

지금도 서울 동묘벼룩시장 근처에 가면 시녀 3명을 데리고 가난하게 살았던 정순왕후 송씨를 돕기 위해 마을 부녀자들이 만들었던 여인시장터가 바람 따라 전한다. 여인들은 여기에서 장사를 해 나라의 눈을 피해 먹거리들을 가만히 대문 앞에 두고 사라졌다고 한다. 세조가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집과 재물을 내렸지만 그녀는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외에도 창신동 일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펴낸 <비우당>이 있다. 그 뒤뜰에 가면 ‘자주동천(紫芝洞泉)’이 있는데, 이곳에서 정순왕후가 옷감에 물을 들여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녀가 옷감을 넣으면 저절로 물이 들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원각사’가 있으며, 이별 후 82세까지 정순왕후가 살았다는 ‘정업원 옛터’도 있다. 1771년 영조 47년에 정순왕후가 단종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낸 곳이라는 것을 알고 영조가 정업원구기비를 세우고 ‘전봉후암 어천만녀(前峰後巖 於千萬年)’이라는 친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앞산 봉우리 뒷산 바위, 천만 년 영원하리라"

여기서 한 생각이 인다. 조선 시대 두 명의 정순왕후가 있었다고 앞에서 언급했는데, 두 사람은 또 이렇게 연결이 된다. 중종도 80대의 고령 송씨의 딱한 처지를 듣고 재물을 보내고 단종의 최초 제사도 지내주었다.

바로 뒤쪽을 보니 담장에 붙어 서울 4대 비구니 사찰인 청룡사가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곳 ‘보화루’에서 단종과 정순왕후는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 뒷산인 ‘동망봉’에 올라 매일 영월 쪽을 바라보며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삶을 살았으며, 마지막으로 헤어진,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는 청계천의 ‘영도교(영리교永離橋)’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64년의 길고 긴 세월동안 여기 살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저녁으로 산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한다.

(끝없는 길. 촬영=윤재훈)
(끝없는 길. 촬영=윤재훈)

세조 3년 1456년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1457년 6월 22일 창덕궁을 출발한 단종의 유배 길은 28일 만에 청령포에 도착한다. 한강 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 만에 영월 땅 ‘주천’에 도착해, 어음정이라는 우물에서 목을 축이고 공순원 주막에서 마지막 유배길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 우물이 지금도 남아 슬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시절 왕손으로 태어나 초여름 이 산하 유배길을 혹독했으리라. 그래도 그런 심정을 군데군데 쉬면서 시로 남겼다. 어린 시절 장차 이씨 왕조를 이을 대통(大統)으로서 세종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니 그 교육 또한 특별했으리라.

다음 날은 험준한 군등치를 넘는다. 굽이굽이 첩첩 산길을 돌아 고갯마루에서 어린 단종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 절을 올렸는데, 그 자리에 조각상이 있다. 마침내 청령포에 도착한 어린 단종은 삼면이 깊은 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를 바라보며 얼마나 절망했을까. 뒷쪽으로 솟아있는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을 보고 얼마나 아득했을까.

부모님, 조부모님 다 잃고 쫓기듯 혈혈단신으로 궁을 나와
이제 배가 없으면 나올 수도 없을 것 같은 아득한 유배지,
옆에서는 금부나졸들의 창끝만이 번득이는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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