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⑤] 영월여행, 단종의 숨결을 따라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7.27 10:56
  • 수정 2020.07.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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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여행, 단종의 숨결을 따라2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각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사람들에게 이르나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김수영 문학회 회원들과 단종어소(端宗御所)에서. 촬영 윤재훈)
(김수영 문학회 회원들과 단종어소(端宗御所)에서. 촬영=윤재훈)

인적이 떠나가 버린 초가지붕이 한 채 쓸쓸하게 서있다. 단종을 따라온 궁녀와 관노들이 생활하던 행랑체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일렬로 쌓아올린 담장, 그 아래 장독대는 집의 규모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 텅 빈 독만 6개 엎어져 수백 년 사람이 떠나버린 집임을 알려주고 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단종어소(端宗御所)로 들어간다. 소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기와집 한 채, 마당 가운데는 비각이 하나 있다.

(단종어소(端宗御所에서. 촬영 윤재훈)
(단종어소. 촬영=윤재훈)

담 너머에서 유난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마당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푸른 잎의 소나무 가지 하나. 충절의 소나무로 엄홍도 소나무라고 한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무서운 명에도 물 위에 떠도는 단종의 마지막을 수습한 인물.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잎을 흩날리며 몸을 더욱 낮추어 부복(俯伏)하고 있는 듯하다.

 

(낮게 부복하고 있는 엄흥도 소나무. 촬영 윤재훈)
(낮게 부복하고 있는 엄흥도 소나무. 촬영=윤재훈)

시원하게 문을 열어놓은 방 안에는 단종은 글을 읽고 신하 들이 엎드려 있다. 그 당시 유배를 짐작케 하는 밀랍인형들의 각가지 형상으로 있으며 처마 밑에는 단종이 직접 썼다는 한시가 적혀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숲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로 소나무는 삼계(三界)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시글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주인 잃은 곤룡포. 촬영=윤재훈)
(주인 잃은 곤룡포. 촬영=윤재훈)

세월에 낡은 붉은 어복 한 벌이 걸려 있는데, 단종의 선혈처럼 붉다. 1457년 6월 28일부터 두 달 동안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큰 홍수가 나서 영월읍 영흥리 있는 객사 관풍헌으로 옮긴다. 그 마당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류가 있다. 세종 때 영월군수 신권근이 세운 것으로 매죽루였는데, 단종이 한 서린 <자규사>란 시를 짓고 나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유배당한지 4개월 만인 그 해 10월 24일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가지고 온다. 그는 사약을 드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다른 나졸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뒤에서 화살의 살로 조였다고 하며, 칠공(七孔 눈, 코, 입, 귀 등)에서 피가 솟구쳤다고 한다.

그러다 호장 엄흥도가 물 위에 떠도는 단종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동을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는 것을 보고 그곳에 암매장 했다. 지금 장릉의 위치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 잊어 누각 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었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사람들에게 이르나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단종의 유배길. 촬영 윤재훈)
(단종의 유배길. 촬영=윤재훈)

내 마음 도닥여도 참 많이 흔들리는 구나
타는 갈증이야 물 한 잔이면 가라앉지만
흔들리는 마음이야 무엇으로 가라앉히리오
조선의 왕이 되려는 사심도 욕심도 없었던 열일곱…
세상사에 휘말리지 않고 궁이 마냥 즐거웠던
홍위(弘暐)로 기억해주시오
- <물미 어음정>에서 읊다.

(‘관음송(觀音松’ 아래에서 단종을 생각하다. 촬영 윤재훈)
(‘관음송(觀音松)’ 아래에서 단종을 생각하다. 촬영 윤재훈)

숲 가운데는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된 <관음송(觀音松)>이 있다. 마치 우산처럼 전체 숲을 받치고 있어 그 위용이 대단하다. 어린 날 동구 밖에서 보았던 천 년 묵은 당산나무 같다. 두 갈래로 갈라져 있으며 중간부분에 가지 하나가 용의 구부린 다리처럼 기묘하게 뻗어 그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그 옛날 단종이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 쉬었다고 하며, 그 비참한 상황을 보았다 하여 볼 관(觀)과 그 슬픔의 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을 써서 관음송이라고 부른다. 600여년 가까이 되어가는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한양이 보이는 이곳에 올라와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 촬영 윤재훈)
(한양이 보이는 이곳에 올라와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 촬영=윤재훈)

차라리 창공을 나는 새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청령포에 위리안치(圍籬安置)가 된
나는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섬이 되었소
때론 망향대에 올라 돌맹이 하나씩을 포개며
소원을 빌어 보기도 하고
때론 관음송에 기대어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오
- 청령포에서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겨 정순왕후를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에는 애절함이 절절이 배어있고, 울울창창 숲에 휩싸인 노산대는 고적하다. 단종은 깎아지른 육육봉을 보고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래된 소나무들은 270도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속절없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일반백성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 촬영 윤재훈)
(일반백성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 촬영=윤재훈)

 그 후 영조 2년 1726년 단종의 유배지를 보호하고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을 세웠다. 영조 39년 1763년 9월에는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단종이 이곳에 계실 때의 옛 터이다’라는 비문을 써서 단종이 살던 집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또한 금지 한다. 숭정 99년 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당시 단종에게도 이와 같은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 전해진다.”

아무리 이곳에 오랜 머문다고 그 수백 년 전 어린 단종의 피맺힌 한을 느낄 수 있을까, “가자, 어서 가자!” 그 아픔을 뒤로하고 강을 건너온다.

(장릉 전경. 촬영 윤재훈)
(장릉 전경. 촬영=윤재훈)

이제 단종이 묻힌 장릉으로 향한다. 노산군 묘로 불리다가 숙종 때 능(陵) 지위로 승격되었다. 별칭으로는 노릉(魯陵)이라고 불린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다시 왕으로 복위되어서인지 규모가 대단하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세 개의 장릉이 보인다. 먼저 ‘파주 장릉(長陵)’이다. 조선 제 16대 왕인 인조(능양군)와 인열왕후 한씨의 합장릉이다. 1623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명분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1623년 3월 13일 즉위한다.

광해군의 실리외교에서 벗어나 친명배청(親明排靑)주의를 실시하는 바람에 1627년 후금이 침입한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후에 후금에서 청나라 이름을 바꾸어 침입한 1636년 ‘병자호란’에서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성 안에서 항거하던 인조는 농성 59일 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숭덕제)에게 항복하고, 성 밖으로 나와 우리 역사에 유일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땅에 머리를 찍는 굴욕적 의식을 행한다.

그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론자인 삼학사를 청에 볼모로 보내는 치욕적인 삶을 산다. 1644년 11월 석방된 큰 아들 소현세자는 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백성들의 인망이 높고 친청(親靑)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자기를 쫓아 낼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후궁과 함께 1645년 독살한다. 그 후 며느리와 그녀들의 친족들까지 죽이고, 세 명의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결국 두 명은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둘째인 봉림대군은 제 17대 효종대왕이 된다.

조선 역사에 가장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며, 거기에 자신들의 정적인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반정이니 혁명이니 결국은 한 사람의 야욕과 그 옆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겠다는 몇 명의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커다란 전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안에서 선량한 백성들만 개죽음을 당하기 일쑤다.

다음으로는 ‘김포 장릉(章陵)’이다. 조선 14대 국왕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이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역성혁명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할아버지 선조, 아버지 원종, 그리고 자신까지 적통임을 꾸미기 위해서 그렇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것이다. 아버지 원종(1580~1619)과 어머니 인헌왕후 구씨(1578~1626)의 쌍릉이며, 조선 건국 최초로 자신들의 이득에 따라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광해군은 원종의 이복형이며, 15대 임금인 아버지 선조 이연(1608~1623)과 어머니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정비 의인왕후 박씨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 자리를 굳힌 듯하지만, 오히려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를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 그러다 1608년 음력 2월 2일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살에 왕위에 올라 이런 비극을 당한다.

(단종문화제. 촬영 윤재훈)
(단종문화제. 촬영=윤재훈)

그리고 세 번째로 지금 가고 있는 '단종 장릉’이다. 영월에서 매년 행하고 있는 <단종제례>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 22호이며 <단종문화제>는 올해 코로나 여파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영월의 대표적인 향토문화재로 단종과 그의 충신들의 넋을 축제로 승화시켜 이어오고 있다. 1698년 숙종 24년 이후 270년 동안 제향(祭香) 만으로 그치던 것을 1967년 ‘단종제’로 확대하였고, 1990년 제 24회 때부터 아예 <단종문화제>로 명칭을 바꾸었다.

특히 단종 승하 550년인 2007년부터는 조선 왕 중에 유일하게 장례를 치르지 못한 단종을 위해 철저한 고증을 거쳐 ‘조선왕조 국장(國葬)’ 재현 행사를 영월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정순왕후 선발대회도 같이 진행하고 있어 슬픈 역사 속의 왕비를 다시 소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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