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 기자수첩] 서구열강들의 아시아 ‘식재료’ 침략사1…향신료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9.22 11:05
  • 수정 2022.05.3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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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전에 천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은 ‘동아시아’였다.”
-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교수

(유럽 대륙의 끝, ‘호가곶’에서 바라본 대서양, 건너에 이 지상의 최고의 제국주의, 미국이 있다, 촬영=윤재훈)
(유럽 대륙의 끝, ‘호가곶’에서 바라본 대서양, 건너에 이 지상의 최고의 제국주의, 미국이 있다, 촬영=윤재훈)

아시아, 특히 천 년여의 기간 동안 세계의 중심지는 동아시아였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변방이었던 영국과 포루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들이 대포와 총을 앞세워, 중국과 인도, 아라비아 상인들이 장악하던 아시아의 바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열광하는 대표적인 향신료인 ‘후추’를 비롯해 ‘면화’와 ‘차’, 거기에 카리브 해에서 노예들의 피로 만들어진 ‘설탕’까지 철저하게 약탈해 갔다.

그리고 유럽의 침략자들은 거기에서 얻은 부(富)로 영국은 증기기관과 함께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600여년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이 다시 동아시아로 불고 있다. 그 착취의 역사를 4회에 걸쳐 따라가 본다.

(베네치아 운하 사이로 사랑이 흘러간다. 촬영=윤재훈)
(베네치아 운하 사이로 사랑이 흘러간다. 촬영=윤재훈)

'후추'로 성장한 수상제국 베네치아

연인들이 탄 곤돌라가 몽롱하게 흔들거리며 월교(月橋) 아래로 흘러간다. <아드리아 해>의 북쪽에 위치한 운하의 나라 베네치아는 매일 사랑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도시다. 여행자들이 뱃머리에 앉아 하염없이 향수에 젖으며 이국의 정한을 나누고, 이따금 화려한 복장에 꽃모자를 쓴 유럽의 귀부인도 좁은 수로를 따라 흘러간다. 말 그대로 베네치아 명물 <곤돌라>는 ‘흔들리다’는 뜻이다. 과거 ‘후추’를 통한 부로 이룩한 수상제국 베네치아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매년 <곤돌라 축제>도 열리고 있다.

중세 유럽 국가들은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이르는 경로를 통해 아시아와 교역을 했으며, 향신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로 운반되었다. 중세가 끝날 때까지 400년 동안 거의 모든 무역은 베네치아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니 <베니스의 상인>도 우연히 나온 희곡이 아니다. 이 도시는 6세기부터 인근 개펄에서 난 소금을 판매하여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또 베네치아 상인들은 11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200여 년간 치러진 십자군 원정을 지원하며 세계 향신료 시장을 장악했다. 동양산 향신료는 가격 상 동일무게의 금과 비교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후추가 넘쳐나던 시기에는 이 도시의 수입이 프랑스 전체 예산을 능가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 향신료를 공급하던 베네치아 상인들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차지한 ‘맘루크 제국’이었지, 결코 비잔티움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아니었다. 그러니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고 나서도 베네치아 상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향신료를 마음껏 실어 날랐다. 베네치아에서는 이집트 금화까지 통용될 정도였다.

(제국의 그림자, 후추. 게티이미지 뱅크)
(제국의 그림자, 후추. 게티이미지 뱅크)

아시아와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지중해로 수입되는 물품의 반 이상은 향신료였다. 그 당시 후추는 향신료를 넘어 사치품에 가까웠다. 주요성분이 피페린(Piperine)은 혀의 미각을 자극하여 위의 소화액 분비를 도와주며 서양인들을 열광시켰다.

그 대부분은 인도에서 들여왔으며 음식의 부패를 막고 향미를 풍부하게 해 주었다. 또한 운송과 냉장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신선한 음식 확보와 보관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것이 당시 후추와 맞아 떨어졌다. 여기에 열대기후 어디서나 잘 자라 나무 한 그루당 5~6kg 수확이 나왔다.

(험난한 바닷길을 따라 ‘대항해 시대’를 연 범선. 게티이미지 뱅크)
(험난한 바닷길을 따라 ‘대항해 시대’를 연 범선. 게티이미지 뱅크)

'후추',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열다

향신료 무역에 대한 베네치아 상인들의 독점이 계속되자, 중세 유럽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향신료를 구할 수 있는 바닷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15세기 초 아랍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제국을 정복하고 육상 무역로를 봉쇄한 뒤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게 하자, 지중해 일대의 후추무역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유럽의 각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도에서 후추를 사올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뚫기 위해 바다로 눈을 돌린 것이다. 마침내 <대항해 시대> 서막이 올랐다.

"서양문명의 5~600년의 근본은, 도둑질(대항해시대 해적질, 식민지)에 불과하다."

 - 도올 선생

서양의 역사는 터닝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발전은, 특히 관광산업의 활성화는 올림픽이 지나고 1989년 1월 1일 여행 자유화가 되었으니, 불과 32년뿐이 안되었다. 그만큼 터닝 하기가 쉽다고 도올 선생은 진단했다.

루부르를 비롯한 서구의 박물관의 유물은 그 나라들의 식민지와 피를 요구하며 빼앗아 온 약탈물에 불과하다. 그것으로 그들은 자랑삼아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며, 자국민이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다. 얼마나 뻔뻔스럽고 가증한 역사인가.

“인간의 역사는 양심이 사라진, 동물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 선두에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콤럼버스>가 있다. 후추 살인마로 불렸던 그의 서해 항로 발견도 애초의 목적은 인도항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스쿠 다가마>보다 약간 이른 시기에 스페인 국왕을 설득해 인도를 찾아 서쪽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엉뚱하게 1492년 10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는 이곳을 인도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서인도 제도’라고 부르고,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 후 두 번째 항해를 떠날 때는 사탕수수를 실고 가 섬나라 아이티에 심었는데, 이것이 설탕을 차지하기 위한 유럽 침략의 서막이며 그 선두에 영국이 선다. 그는 아이티에서 고추도 발견한다.

그는 1차 항해 성공 후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으니, 제국주의자들의 눈에 원주민들은 약탈과 노예화, 죽임의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1차 항해 후 그가 가져온 금제품들은 유럽인들을 놀라게 했고, '콤롬부스의 달걀'이라는 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는 그 이후에도 4차 항해까지 마친다.

“콜럼버스와 같은 몰락을 겪기 위해선 대단한 무능과 오만이 필요한데,
콜럼버스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갖춘 희대의 위인이다.”
- 빌 브라이슨

인도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왔던 그는 아이티에 도착해 온갖 살육과 강간을 일삼는다. 그 여파로 30만 명이던 인구가 고작 500명 정도만 남게 되었다. 아예 씨를 말려버리는 서구인들의 만행이었다. 유럽에 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은 그 후로도 그들의 침략 만행으로 수많은 피를 흘린다. 그런 그가 위인전의 책장에 꽂혀있고 어린 날 우리가 국정교과서에서 배웠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침략자들이 쓴 기술인가.’

아이티 섬이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던 콤럼버스는 자신의 논리가 맞지 않자, 다시 지구의 모양은 동그란 구형이 아닌 호리병의 모양과 비슷한 군함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얼빠진 소리를 했다. 발상의 전환(?)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위인으로 우리 아이들까지 위인전에서 아직까지 읽고 있는 현실이다.

“그가 매독으로 죽은 건 그나마,
하느님이 내리신 아주 작은 벌일 뿐이다.‘
- 도미니카 공화국 주민

(호카곶에서 바라본 대서양. 촬영=윤재훈)
(호카곶에서 바라본 대서양. 촬영=윤재훈)

리스본에서 바라 본 소금기 서린 대서양

쉬엄쉬엄 덜컹거리는 트램을 타고 포루투갈 리스본 타구스 강가로 간다. 이따금씩 열차가 서고 사람들이 느리게 타고 내린다. 이곳은 강이 막 대서양에 몸을 푸는 지점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저 멀리 벨렝탑(베렘탑)이 바닷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중세시대 요새식 탑으로 강과 바다 전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며, 루프탑 테라스가 있어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명소이다.

(장화모습 같기도, 흰 드레스를 끌고 가는 꿈속의 여인 같기도 하다. 촬영=윤재훈)
(벨렝탑전경,  장화모습 같기도, 흰 드레스를 끌고 가는 꿈속의 여인 같기도 하다. 촬영=윤재훈)

어찌보면 장화처럼 생긴 것 같은 건물은 대항해 시대 여기에서 통관절차를 밟기도 했다. 포루투갈인들은 이 탑을 마치 긴드레스를 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며, 향수에 젖는다. 마치 우리들이 달을 올려다보면서 먼 옛날 신화 속에 토끼가 아직도 방아를 찍고 있다고 생각하듯이..

1층에는 아치 모양으로 대포가 쭉 놓여 대서양에서 진입해 오는 배들을 겨누고 있다. 지하 1층은 스페인이 포루투갈을 합병한 이후 1900년대까지 감옥으로 쓰였는데, 밀물 때면 물이 들어 차 죄수들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어찌 이런 감옥은 생각했을까? “고문은 인간이 생각해 낸 가장 비인간적인 행동”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고문하기를 좋아하는 동물인 모양이다. 끊임없이 고문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해 내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어마어마한 고문들이 자행되고 있었으니.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에서의 노덕술, 5공 치하의 이근안, 6공 시절의 정형근 전 의원 등, 대표적인 고문기술자들의 이름이 떠오른다. 탑의 하부는 옛날에는 물에 잠겼으나, 지금은 물의 흐름이 변하여 잠기지 않는다.

(트램 선로이면서, 차량과 사람이 함께 뒤섞여 다닌다. 촬영=윤재훈)
(트램 선로이면서, 차량과 사람이 함께 뒤섞여 다닌다. 촬영=윤재훈)

소금기 서린 대서양의 바람을 맞으며 쉬엄쉬엄 방파제를 걷는다. 오늘 못 보면 내일 보고, 그것도 안되면 안보면 그만이다.

‘지금의 장소에서 현재를 최대한 즐겨야 한다.’

멀리 2km가 넘는 현수교인 ‘4월 25일 다리’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마치 금문교라도 닮은 듯 웅장한 모습으로 리스본과 알마다를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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