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㉑] 마음을 걷다

김경 기자
  • 입력 2020.11.3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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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가을볕이 다사롭다 못해 살갗을 간질인다. 산책 나오길 잘했다. 엊그제만 해도 땡볕을 피하느라 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그늘 아래로 찾아들곤 했는데. 계절의 순환은 아무리 되풀이되어도 신기하고 또 새롭다. 아무렴, 지난해의 가을볕이 오늘의 가을볕으로 찾아올 리가 없다. 새삼 자연의 순리에 따른 터전의 존귀함이 엿보인다.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가 지치지 않고 굴러가는 데는 그 터전의 존재가 최우선일 게다.

나는 가을볕에 온몸을 맡기며 근린공원 가는 길로 접어든다. 화살나무는 가을에 정점을 찍는다더니, 자잘한 선홍색 이파리에 눈이 부시다. 목을 길게 뽑은 수크령은 여름과 이별한 티가 난다. 수분 샘이 메말라 까칠하다. 한 무더기 억새는 실바람에도 춤을 추고, 은은한 보랏빛 구절초는 아름답기가 가을꽃의 으뜸이다.

나는 마스크로 무장한 현실을 훌훌 벗어던진다. 코와 입을 가린 마스크가 얼굴에 붙어 있을지언정 나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가을볕이 건넨 선물이다. 이래서 나는 일찍이 가을볕의 추종자로 버금가라면 서러워했는가. 박노해의 <가을볕>을 뇌어 본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 고추를 따서 말린다 //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흰 빨래가 / 바람에 몸 흔들며 눈부시다 //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

  내 슬픔을 / 상처 난 욕망을 //운동화 안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 살아온 날들을

나도 시인의 말처럼 이 가을볕에 슬며시 나를 말려보고 싶다. 슬픔을, 욕망을, 살아온 날들을……. 그리고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못한 부끄러운 민낯을…….

양 팔을 늘어뜨리고 한 발 한 발 뗀다. 문득 허공에 내걸린 빨래가 부럽다. 최대한 가벼이 몸의 힘을 빼보려고 하지만, 두 발은 운동화 안에서 더욱 더 뻗친다.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한시도 쉴 틈 없이 두 발은 제 임무에 열중하고 있다. 그래, 건강한 두 발이 고마울 따름이다.

산책을 한다는 것은 그저 한가로이 길을 따라가는 단순한 발걸음일까. 걸음마다 내 마음이 숨어 있다. 나는 마음을 가만히 흔들어 깨운다. 나는 마음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마음과 나는 한 몸으로 사이좋게 걸어간다. 어느새 내 마음은 욕망의 덩어리를, 부끄러움 민낯을 가을볕에 말릴 채비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대학에서 만난 친구는 외톨이였다. 언제 어디서나 혼자라는 걸 나는 3학년이 되고서야 알아챘다. 나는 2년 동안 깜깜이었다.

날씨가 영하로 뚝 떨어진 싸한 날,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좁고 가파른 골목의 달동네는 을씨년스러웠고, 텅 빈 집의 고요는 적막했다. 친구는 혼자만의 방문을 열었다. 왜 딸만 달랑 남겨두고 어머니가 서울 오빠네로 갔는지, 친구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혼자라는 게 무섭기보다는 외롭다던 친구는 졸업 후에도 혼자 자취를 했다. 시골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때였다. 자취방에 들어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당혹감을 감추었다. 온기를 잃어버린 한겨울의 방 안. 따끈따끈한 전기장판에 앉아도 귀가 시리고 코가 매웠다. 그때에도 나는 침묵했다. 방을 옮기라느니, 불을 때라느니 하는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얄팍한 이성적 사고는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 배려인 줄 알았다. 아니 나는 철저한 방관자였다. 돌이켜 보면 우리 관계는 순전히 친구에 의해 유지되었다. 친구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태생이 성실하고 검소한데다 솔직하고 순수하기가 티 없는 어린애 심성이었다. 그 맑음이 장점이면서 때론 단점이기도 했다.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친구는 재잘재잘 자기근황을 털어놓는가 하면 뜬금없이 희로애락을 드러내며 흔들렸다. 친구를 통해 고달프고 외로운 상처가 슬프고 쓰라린 상처로 거듭난다는 걸 터득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율배반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공감도 따로 치유 따로, 나는 치유에는 젬병이었다. 홀로 존재하는 듯한 친구의 눈길……. 나는 단 한 번도 친구의 따뜻한 난로가 되지 못했다.

그날도 친구가 연락을 하고 찾아왔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친구는 남편의 일과 애들 교육을 들먹이며 미국 이민 얘기를 꺼냈다. 몇 년 동안은 소식을 주고받다가 언젠가부터 흐지부지 끊어지고 말았다. 뜻밖의 소식을 들은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친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는 끝까지 홀로 세상을 등졌다. 나는 먹먹한 가슴으로 지난날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최선이었을까? 아마 그랬겠지. 바보처럼 허공에 의미 없는 자문자답을 했다. 한꺼번에 밀려든 후회와 분노와 슬픔이 가라앉아 단단한 응어리로 남았다.

하늘 저 멀리 시선을 보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친구의 모습이 흰 구름 사이로 스러진다. 나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금세 옅어진 가을볕을 이고 홍난파 생가에 이른다. 한쪽에 서 있는 진녹색 반송을 눈에 그득 담는다. 오른쪽으로 난 계단에 발을 올리다가 그만 멈칫거린다. 저만치 보이는 벤치가 어제의 벤치가 아니다. 몸체가 뭔가에 가려졌다. 벤치 쪽으로 몸을 튼다. 허름하고 꾸질꾸질한 이불이 벤치에 덮여 있다. 바투 옆에 바퀴달린 장바구니까지 있다. 누굴까? 분명 낯선 사람 냄새가 난다. 야영자인가? 설마 노숙자?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지만 그림자 한 점도 찾지 못한다.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친다.

오늘보다 더 깊은 가을날이었다. 잠실에 살던 때여서 ‘올림픽 공원’이 산책 무대였다. 워낙 너른 공간이라 풍성한 가을 찾기가 꽤 쏠쏠했다. 파도처럼 쓸리는 억새밭, 노란 열매가 탐스러운 명자나무, 오색 단풍 바다 너머 요염하게 타오르는 애기단풍, 붉은 구슬 밭의 산수유……. 얼마나 걸었을까. 해넘이 시간이 다가오면서 느닷없이 태풍의 강도로 찬바람이 몰아쳤다. 머플러를 두르지 않은 목이 시렸다. 사람들이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가느라 북적거렸다. 나도 몸을 움츠리며 재게 걷는데, 낯선 풍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벤치 끝에 걸린 시커먼 맨 발바닥. 덥수룩한 머리에 넝마를 두르고 노숙자가 누워 있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노숙자를 바삐 스쳐갔다. 잠깐 엉거주춤하던 나도 노숙자를 스쳐갔다. 가년스럽기는 해도 무엇을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꾸질한 이불과 장바구니를 뒤로 하고 계단에 오른다. 마지막 계단에 서서 심호흡을 한다. 어느 쪽으로 갈까. 오솔길인가, 운동기구가 놓인 쪽인가. 운동기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수돗가에서 한 여인이 페트병에 물을 받고 있다. 몸이 가늘고 얼굴이 해쓱하다. 혹시 벤치의 이불 주인인가? 헝클어진 머리칼엔 수긍이 가는데, 말끔한 옷차림이 의심스럽다. 나는 멈칫멈칫 다가가다가 그만 포기하고 만다. 만약 예상이 적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나는 도리머리를 하면서 쓴웃음을 문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누군가를 외면하는 데에 그야말로 익숙하다.

팔운동을 시작한다. 가을볕은 아직도 따스한데 마음이 스산하기만 하다. 서쪽 하늘에 난데없이 구름덩이가 몰려온다. 일순간 넘어가는 해가 구름덩이에 가린다. 나는 운동을 멈추고 건너편의 벤치에 걸터앉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덩이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주홍빛 기운이 시나브로 스며든다. 한 차례 울고 난 눈자위처럼 노을이 붉다. 아직 갈색 옷을 갈아입지 못한, 오그라진 갈참나무 잎이 떨어진다. 짠하다. 내 마음 길에 갈참나무 잎을 심고 붓으로 채색을 해본다.

희미하게 남은 가을볕을 더듬거리며 집으로 향한다. 스러질 듯 말 듯한 가을볕도 다사롭기 그지없다. 역시 가을볕은 남다르다. 다가올 겨울을 예비하는 가을볕의 오롯한 자태를 느낀다. 가을볕은 내 모든 허물과 상처를 아물게 하며 흉터조차 남기지 않을 무슨 연고 같다. 나는 나도 모르게 기도의 말을 되뇐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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