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㊷] 코카서스 3국을 가다 8_러시아 작가들의 로망, 트빌리시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03.04 13:29
  • 수정 2022.01.07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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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들의 로망, 트빌리시

그루지야 언덕에 밤 안개 걸려있고
발 아래 아라그바강 굽이쳐 흐르네
내 마음 서글피 가라앉아 있고
나의 슬픔 빛나,
온통 너로 가득차 있네


너와 더불어,

너만이라도 내 참담한 가슴이여
이제 그 무엇도 고통스럽고 심란케 하지 않으니,
내 심정 또 다시 불타고, 벅차오르네.
그 어찌 사랑하지 않고 살겠소.
- 그루지아 언덕에서’, 푸쉬킨

 

 

(나리칼라 요새 야경. 촬영=윤재훈)
(나리칼라 요새 야경. 촬영=윤재훈)

유럽의 가장 높은 산, ’엘브루스산‘은 캅카스(코카서스) 산맥에 있는 5,642m의 휴화산이다. 캅카스 지방의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산맥으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이룬다.

코카서스 3국은 (캅카스 지역)에 속한다. 그중 조지아는 코카서스 산맥으로 둘러쌓인 산악국가로 평균 4000미터를 웃도는 봉우리들이 북쪽을 감싸, 시베리아 찬바람을 막아준다. 남쪽으로는 <아르메니아 고원>이 펼쳐진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맥과 고원이지만, 그 사이를 흐르는 강과 계곡 초원의 멋진 풍광으로 인하여, ‘코카서스의 스위스’라고도 불린다.

브레히트의 희곡 <코카서스의 백묵원>도, 코카서스의 아름다운 풍경과 솔로몬의 현명한 지혜가 담겨있는 이야기이다.

이 지역은 생태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6,400여종의 고지대 식물의 거처이고, 그중 1,600여 종은 이 지역의 고유 품종이다. 각종 야생 짐승들이 서식하며, 무척추동물로는 1,000여종의 ’거미‘들이 산다.

(트빌리시 젖줄, 쿠라강의 해질녘. 촬영=윤재훈)
(트빌리시 젖줄, 쿠라강의 해질녘. 촬영=윤재훈)

아래로는 페르시아, 왼쪽으로 오스만 투루크, 오른쪽으로 몽골과 티무르 제국, 위로 제정 러시아를 두었던 지정학적인 요건 때문에, 오랫동안 주변국가들의 팽창주의 무대가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 합병되어 있었으며, 19세기부터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다. 오랫동안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점차 기독교 신앙으로 바뀌게 된다.

이웃 열강들의 숱한 침략에 허물어 졌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작은 기독교 국가를 유지한 것이 가히 놀랍다.

그리스 신화에서 캅카스는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 중에 한 개로 묘사된다. 러시아와 북쪽 국경을 마주한 ’카즈베기‘에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고향이다. 현생 인류에게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 의해 사슬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며 평생 오르막 위로 바윗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로마의 시인 ’오비드는 굶주린 이들이 사는 춥고 거친 산으로 묘사했다.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은 황금양모를 찾아 캅카스의 서쪽 연안으로 출범했고, 그곳에서 유명한 메데이아를 만나게 된다.

(단아한 성당. 촬영=윤재훈)
(단아한 성당. 촬영=윤재훈)

면적은 우리나라 약 70%에 해당하지만, 인구는 대략 370만 정도뿐이 안된다. 그중에서 100만 명 가량이 수도 트빌리시에 산다. 이런 풍요로운 땅에 인구밀도까지 낮으니,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를 가진 대한민국으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덩그라니 집 한 채, 풀밭에는 수많은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양치기 개인 ’옵 차르카‘가 뛰어 다닌다.

조지아라는 국명의 기원은 ‘늑대’를 뜻하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농부’, '농사짓기 알맞은 땅'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풍요로운 땅이기에 현지인들은 후자를 더 선호한다.

"수도인 트빌리시는 조지아어로 따뜻하다는 의미처럼,

한겨울인 1월에도 1도 정도를 유지하며,

여름에는 25도 정도의 쾌적한 날씨룰 보인다.

트빌리시 도시의 크기는 726이며 인구는 135만여 명이다."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후 러시아식 표기를 버리고 영어식으로 바꾼 것은, 친(親) 서구 지향적인 의미를 대내외적으로 알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또한 우리 정부에게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요청했을 정도라고 한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국력의 상징인지 무비자로 360일이나 넉넉하게 주면서, 푹 쉬었다 가라고 선한 웃음을 지어준다. 이웃 나라 투루크메니스탄은 비자가 너무 복잡하고 짧아 가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인심(?)이 후하다.

(소련의 잔영. 촬영=윤재훈)
(소련의 잔영. 촬영=윤재훈)

바로 인접한 나라 이란도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어 가는 것이 어렵다. 이란을 다녀오면 당분간 미국과 중동의 깡패인 친미 이스라엘도 갈 수 없다. 그러나 뒷길로 가는 방법은 있다. 특히나 조지아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프랑스처럼 풍부한 와인이 있고,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으며,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이런 조지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는 <조지아 정교회, 조지아어, 와인>을 꼽을 수 있다.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기독교 국가라는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에 강한 세력이 나오면, 언제든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조지아정교는 그런 외세에 많은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에 흐르는 정신은 똘래랑스, <관용>이다. 그래서 어렵게 자신들은 종교를 지켜왔으면서도 다른 종교에 관대하다. 조지아인의 83%가 조지아정교를 믿고, 10%는 이슬람, 2%는 아르메니아 정교, 그 이외에 기타 종교를 믿는다.

(화가의 일상. 촬영=윤재훈)
(화가의 일상. 촬영=윤재훈)

똘레랑스라고 하면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홍세화씨가 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를 보면, 프랑스적인 창의력과 독창성의 바탕에는 ’개성존중‘이라는 가치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은 생각이 당연히 다를 수 있다는, 미덕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알제리 독립운동이 한창일 때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 나섰다. 당시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인들이 각출한 독립지원금을 전달한 것이다. 그의 행위는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그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말들이 드골 측근의 입에서까지 나왔다. 그러나 드골은

“그냥 놔두게, 그것도 프랑스야.”

라고 말해다고 한다. 드골의 이런 생각은 그뿐만이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일반적인 사고에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똘래랑스의 일상적인 한 모습일 뿐이다. 이런 정신이 프랑스를 개성과 독창성을 갖춘 문화강대국으로 일구어 놓았다.

‘관대함’이나 ‘허용’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여유를 암시하고,
‘자비’가 ‘가엽게’,‘’품어주고 도와주어야 할 것’이라면,
‘관용’은 다양성, 이질성, 복잡성을 존중하는 정신적 태도와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똘레랑스는 약자에 대한 자비와 같은 인간적인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엄연한 사회적인 가치인 것이다. 방어적인 개념이기보다는, 적극적이 개념인 것이다. 한마디로 ’사상의 자유‘을 허용하는 것이다.

똘레랑스가 없는 민주주의는 가진 자와 강한 자의 민주주의일 뿐이다. 그 속에서 전체의 의사에 배치되는 소수의견은, 체제 전복 의도를 가진 불순한 세력으로 간주되어, 탄압받기 십상이다. 소수의견이 존중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기보다 전체주의에 가깝다.

이 먼 땅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본다. 이데올로기의 규제와 검증, 정치범, 반국가단체 등이 틈만 나면 횡횡하는 불안한 사회, 군사문화로 탄압하다 시민들의 촛불에 의해 무너졌던 독재정권들이 두고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가난한 화가들. 촬영=윤재훈)
(가난한 화가들. 촬영=윤재훈)

또한 조지아는 위대한 러시아 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 푸시킨, 톨스토이, 고리키 등이 작품 활동을 하며 사랑했던 나라이다.

구도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유 광장이 있다. 푸시킨Pushkin 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에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Alexander Pushkin)에 대한 러시아인의 사랑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러시아 사람들의 모두가 푸쉬킨이다.”

오랜 기간 조지아를 여행했던 ‘푸시킨'은, 1829년 조지아의 유황온천을 경험하고는 최고의 온천이라고 무척 좋아했단다.

‘조지아의 음식 하나하나가 시와 같다’

고 격찬한 말이 두고두고 이곳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누구보다도 이 땅의 음식과 와인을 좋아했다. 하지만 장기 배낭여행자들에게는, 어느 나라나 분위기 좋은 집에서 먹은 음식이 맛있었다. 돌아서면 배가 고프니 어디 가릴 처지도 못되었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었다. 불가에서도 지나치게 입에 맛있는 음식은 경계해야 된다고 했다.

푸쉬킨은 조지아인들에게도 대단히 인기있는 시인이다. 조지아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으며, 그 감흥을 살려 <코카서스 죄수>라는, 거의 단편소설에 가까운 장편시도 남겼다.

그루지야 언덕에 밤 안개 걸려있고
발 아래 아라그바강 굽이쳐 흐르네
내 마음 서글피 가라앉아 있고
나의 슬픔 빛나,
온통 너로 가득차 있네
너와 더불어, 너만이라도 내 참담한 가슴이여
이제 그 무엇도 고통스럽고 심란케 하지 않으니,
내 심정 또 다시 불타고, 벅차오르네.
그 어찌 사랑하지 않고 살겠소.

-  ‘그루지아 언덕에서’, 푸쉬킨

 

(여인의 미소. 촬영=윤재훈)
(여인의 미소. 촬영=윤재훈)

그의 외조부가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 출신 귀족이었다.

1831년 13살 연하의 예쁜 미망인인 ‘나탈리야 곤차로바’에게 격렬한 구애 끝에 결혼하였지만, 아내가 러시아 제국을 출범시킨 '표트르 1세, 벨리키' 황제와 불륜관계의 소문이 돈다. 그러다 1837년 부인에 관한 나쁜 소문을 퍼뜨린 프랑스 귀족 조르주 단테스와 결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소련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는 조지아의 철도 기지창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면서,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인데, ‘비통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그곳 사람들의 낭만적 기질 덕분에 ,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막대한 빛을 지고 도망온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 신분으로 4년을 복무했으며, 나중에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그의 단편소설인 ‘카프카스의 포로’는, 제1차 체첸 전쟁 당시 체첸 산악인들에 의해 사로잡힌 러시아군 포로를 통해, ‘인간의 따스함과 전쟁의 무의미함’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복전쟁을 찬양하는 등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의 미화물이지만, 당대 극히 드물었던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묘사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한국의 모파상이라고 불리면 수많은 명작을 남겼던 상허 이태준도, 조지아를 방문하고 <소련기행>를 남겼다.

(집 앞 포도나무. 누구나 따먹을 수 있다. 촬영=윤재훈)
(집 앞 포도나무. 누구나 따먹을 수 있다. 촬영=윤재훈)

조지아는 세계적인 장수국가이다. 모두가 와인을 즐겨 마시다 못해, 와인을 신성시 한다. 한 마디로 “조지아인의 삶은 와인 그 자체이다. ”

자유 광장 한가운데 자유탑 꼭대기에는 신화 속에 말을 타고 용을 무찔렀다는 황금빛의 성(聖) 조지아 상이 포효 하고 있다. 이곳은 소련 연방시절에는 ’레닌 광장‘으로 불려, 그 시절 그의 위상을 묵언으로 말해준다. 소련연방, 러시아 제국 시절, 레닌 사후에 이 조그마한 나라, 그루지아(조지아) 출신으로 광활한 대륙을 호령했던 이가 두 사람 있었다.

한 사람은 (이오세부 주가슈빌리)로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러시아식으로 이름을 바꾼 ‘철의 남자’ 라는 뜻의,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얼마나 대제국 소련인이 되고 싶었으면 이름까지 바꾸어 버렸을까. 그는 연방이 탄생하던 1917년부터 30여 년간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 소련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최고 지도자까지 올랐다. 무자비한 숙청과 개인숭배로 국민들을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냉전(冷戰)’이라는 미·소의 극한의 시대를 만들어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의 고향은 ‘고리’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의 흔적을 볼 수 없지만, 그의 고향인 고리에는 박물관이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은 조지아인이 아니고 러시아인이라고 해, 조지아인들의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수많은 조국의 사람들은 사지로 몰아넣은 행위는 밉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대제국의 지도자 였던 그가, 자기 고향 출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까? 그는 자기 조국의 국민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더욱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한마디로 ‘스탈린’과 ‘소비에트’는 조지아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또한 그를 더욱 싫어하는 이유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조지아인 70만명 정도를 징집해, 그 중 35만 명 정도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탈린이 집권하는 동안 5만명 정도의 조지아인들이 희생당하고, 시베리아 등에 유형을 당한 사람도 15만명에 이른다. 그 때문인지 젊은 세대들은 러시아어 보다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에 관심을 보인다.

 

(거리의 풍경. 촬영=윤재훈)
(거리의 풍경. 촬영=윤재훈)

또 한 사람은 서방으로부터 개혁전도사로 불리며, 1980년대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개방)을 부르짖었던 외무장관,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있다. 그는 신(新) 사고(思考) 외교 정책을 펼치며, 전 세계에 해빙의 무드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해체되어 가던 제국의 대외관계를 책임지며, 고르바초프가 노벨평화상을 받는데도 일조했다.

부패와의 전쟁으로 이름을 떨친 그는 연방 해체 후, 고국으로 돌아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집권 후 측근들이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거기에 부정 선거 시비까지 겹쳐, 2003년 ‘장미 혁명’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맛본다. 거대제국 소련의 대외적인 수장까지 지냈지만, 결국 그도 측근들 때문에 망한 케이스가 되고 만다

이 혁명을 이끈 사람은 미국 유학파 출신의 <사카슈빌리>이며, 그는 37살의 나이에 대통령에 오르는 기염을 통한다. 이후 서구주의적 개혁을 시도하고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까지 완전히 철수를 시켰다. 그의 정책은 국내외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가 안정을 찾고, 범죄율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조지아인들은 그가 개혁정책의 토대를 닦아놓았기에, 여러 방면에서 효과를 보고 있다고 지금도 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 임기 말년에 권력남용과 사기, 러시아와의 갈등으로, 그만 국민들의 신임을 잃고 만다. 2012년 실각한 후 조국을 떠나 2015년 이웃 나라인 우크라이나 오데사주지사로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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