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의 인생 바라보기㉔] 명자꽃 사랑

윤창식 칼럼니스트
  • 입력 2021.04.02 10:16
  • 수정 2021.11.1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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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식-수필가-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윤창식
-수필가
-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소년은 자기보다 두 살 어린 명자(明子)를 좋아했다. 봄날 언덕에서 하얗토록 삐비를 뽑으면서도 집 모퉁이에서 사금파리 놀이를 하고 있을 명자를 생각했다. 명자네는 너무도 가난해서 누구하나 그 집 사람들과 섞이려 하지 않았으나, 소년은 토굴처럼 생긴 명자집 모퉁이를 지날 때면 마음이 설레었다.

그 봄날도 그랬다. 소년은 삐비를 따서 한 움큼 쥐고 동네로 내려오자 실바람 속에 무슨 예감처럼 붉은 내음이 가물거렸다.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디? 워디서 저런 빨간 꽃이 보이까잉?"

소년은 허물어져가는 명자네 흙담벽 사이로 새색시의 붉은 치맛자락을 오려놓은 듯한 꽃떨기를 기어코 보고 말았다. 숨이 턱 막혔다. 명자는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튿어진 돌담사이로 몸을 비집어서 손을 힘들게 내밀어보았다. 그 꽃을 꺾을 요량이었다. 꽃나무 가지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안고 다시 손을 내밀어 힘껏 악력을 가하는 순간 손끝에 무엇인가가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소년은 심한 통증과 두려움으로 흙틈에서 얼른 손을 빼내자 금세 손등으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꽃나무에 박힌 날캄한 가시에 찔린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소년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으나 그해 봄날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렇게 가고 있었다.

소년은 그 꽃이름도 알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왔으나 봄이 오면 그 봄날의 유혈의 순간만은 어김없이 되살아나곤 한다. 꽃이름이 명자꽃이라니! 꽃말이 믿음과 수줍음이라니!

아직 손힘만은 꽤 남아있는 고희의 늙은이는 이제라도 붉디붉은 명자꽃 한 송이 온전히 꺾는 환상에 젖는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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