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㊿] 천년 붓다왕국 미얀마3_세계문화유산, 테라와다 불교의 고향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05.09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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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테라와다 불교의 고향

 

“인간은 본래부터 극단적으로 이기적이며,
다른 종(種)들은 다 죽이고 홀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이다.”

 

   (비구스님 공양을 들고 어디를 가실까. 촬영=윤재훈)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우고(Ugo)라는 미얀마 친구의 가게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바간 왕국으로 들어간다. 허물어진 ‘천 년 붓다의 고향’, 사원과 탑이 숲처럼 솟아있는 불국(佛國), 온화한 미소와 ‘자비’의 터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테라와다(Theravada) 3대 성지

 

(인적이 끓긴 사원과 흰 소. 촬영=윤재훈)
(인적이 끓긴 사원과 흰 소. 촬영=윤재훈)

인도에서 시작된 붓다의 가르침이 중국을 거쳐 동쪽으로 간 마하야니(대승불교)와 동남아로 내려간 테라와다(상좌부 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히나야나)가 있다. 그 테라와다의 3대 성지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와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Borobudur)’, 그리고 바로 미얀마의 ‘바간(Bagan,파간) 왕국’이다. 여기에 미얀마를 비롯한, 캄보디아, 타일랜드, 라오스 등은 불교를 국교로 거의 전 국민이 믿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들에게 붓다를 경배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며 생활의 일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불교 국가로 족자카르타 지역에 찬란한 보로부두르의 유적을 이루었지만, 힌두교로 바뀌어 보로부두르에 버금가게 지었다는 힌두 사원인 ‘프람바난’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약 90%의 인구가 이슬람을 믿는다.

아리마다나푸라 또는 아리마다나(적을 물리친 자의 도시)나 탐바디파(구리의 땅) 또는 타사데사(건조한 땅)로 알려진 미얀마 고대 왕국 수도 <바간>, 강변을 따라 조성된 낭우 마을은 교통의 요충지로 버마족, 몬족, 샨족, 퓨족 등 소수의 여러 종족이 혼합된 다인종들이 모여산다. 이런 다양한 문화는 사원 건축양식에서도 잘 드러나 있는데, 인근 중국이나 인도, 캄보디아 멀리는 스리랑카의 양식까지 혼재되어 있다.

(바간왕국. 촬영=윤재훈)
(바간왕국. 촬영=윤재훈)

바간의 역사

바간의 초기역사는 서기 107년 <타무다리 왕(Thamudarit)>이 주변 19개 부족을 통합하면서 왕조를 개창했다. 이 시기를 욘류 쭌(Yonhlyu kyun)이라 하며 그 후 874년에 핀비야 왕에 의해 수도가 된다. 그러나 왕들이 바뀔 때마다 수도를 바꾸는 버마족의 전통 때문에, 바간은 다시 <아나우라타(Anaurahta)1044~77> 왕이 다스릴 때까지 역사의 무대에서 잠시 사라지게 된다. 1056년 남쪽 몬주에서 온 몬족의 상좌부불교 청년 승려인 <신 아라한(Shin Arahan)(22세)>에 의해 왕이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하니, 그에게서 받았던 감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당시 미얀마는 인도에서 온 힌두교와 전래 무속신앙, 중국에서 온 대승불교 등으로 무척 혼재했다. 이에 왕은 강력한 왕권 강화와 바간 왕국의 국론 통일을 위해 테라와다를 정식 국교로 정하였다. 그 후 왕은 <따동 왕국>에 경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필사해 보내줄 것을 <마누하왕>에게 요청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이에 화가 난 왕은 아예 왕국을 정벌하고 마누하왕을 잡아왔다. 이때 같이 잡혀온 많은 기술자들이 9~11세기(또는 11~13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원을 짓게 되고, 팔리문자까지 들여와 찬란한 바간왕국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불교 연구의 중심지가 된다.

이후 아나우라타왕은 미얀마 전역을 통일하고 이웃 나라인 타일랜드까지 침략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런 국력과 불심을 기본으로 하던 바간도 그들이 잡아왔던 몬족의 마누하왕처럼 몽골의 조공을 거절하다, 1287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무너진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다.

미얀마 속의 또 다른 나라

 

(사원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촬영=윤재훈))
(사원 앞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촬영=윤재훈))

바간의 초기에는 5,000여 개의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5년 일어난 진도 8의 대지진과 41년 후 2016년 8월 24일 진도 6,8의 지진으로 반 정도 허물어졌다. 대부분 9~13세기에 지어진 벽돌 건축물이라 지진에 취약하기도 한데, 그래도 2,500여 기가 굳건하게 남아 사원과 탑의 숲을 이루며 후세 사람들을 불심으로 깨우고 있다.

유네스코 역시 2019년 이 지역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많은 지원을 해오고 있다. 1993년 미얀마의 유적 관리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에는 524개의 파고다, 911개의 사원, 수행과 경전을 공부하는 416개의 수도원. 892개의 벽돌 무더기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 왜 이렇게 많은 전탑(흙벽돌탑)들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왕이나 귀족·재력가들의 집 안에 행사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자신들의 복을 빌거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하나, 둘 쌓았다고 한다.

바간은 중부의 건조 지대에 있지만 <이라와디 강>이 북서쪽으로 감싸 흐르면서 풍부한 수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 강은 동남아시아 3대 강으로, 히말라야에서 발원하며 미얀마 최남단까지 무려 2000km를 흐르고 있다. 보트 투어도 가능하며, 만달레이까지도 갈 수 있다. 여기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는 미얀마의 올림푸스로 불리는 포파산(1518m)이 있다.

이곳의 지형은 미얀마 첫 통일 왕국의 수도였던 올드 바간(Old Bagan)과 올드바간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켜 만들어진 뉴 바간(New Bagan), 그리고 여행자들이 모여 있는 낭우(Nyaung U)로 나눌 수 있다.

(촬영=윤재훈)
(촬영=윤재훈)

탑 위에서 바라본 올드바간의 천 불 천 탑은 가히 불국(佛國)의 형상으로 순례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세상에는 이토록 신들의 조상(彫像)과 사원이 많은데, 세계는 하루도 피를 부르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요지경인가.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삶이란,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로 가는 것 같다. 도킨스의 말처럼

“인간은 본래부터 극단적으로 이기적이며,

다른 종(種)들은 다 죽이고 홀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인 모양이다.”

근본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을 밖에 없는 불완전 존재 속에 나의 초상도 같이 흔들린다. 미얀마 속의 또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고대도시 바간, 나는 이와 유사한 기분을 터키의 카파도키아에서도 느꼈다.

인간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불국(佛國)

 

(한낮 더위를 피한 마차꾼 청년들. 촬영=윤재훈))
(한낮 더위를 피한 마차꾼 청년들. 촬영=윤재훈))

차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 자욱하게 뿌리고 가는 신작로를 달린다. 오래전에 사라진 비포장 도로에 대한 추억이 밀려온다.

 

(어디 사원에 행사라도 있을까? 촬영=윤재훈)
(어디 사원에 행사라도 있을까? 촬영=윤재훈)

관광객을 위한 마차를 모는 청년들은 40도를 육박하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길가에서 쉬고 있다. 아낙은 어디 사원에서 행사라도 있는지, 꽃 광주리를 매고 서둘러 지나간다.

(구비앙지Gubyaukgyi)라는 팻말이 보이고, 잠시후 길가에 붉고 퇴락한 사원군이 나타난다. 캄보디아 앙코르 왓을 걸을 때가 생각이 난다. 사람들이 약간 붐비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몇 개의 노점들에서 호객이 심하다.

(타나카 바르고 장난기 가득한 여인, “한 개만 사줘요” 호객이 치열하다. 촬영=윤재훈)
(타나카 바르고 장난기 가득한 여인, “한 개만 사줘요” 호객이 치열하다. 촬영=윤재훈)

비교적 넓은 군락은 아닌 데, 카메라, 비디오, 휴대폰 모두 사용 금지다. 네 면에는 불상이 있고 벽에는 그림과 글씨는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한 듯하다. 아주 넓은 공간도 아닌데 동서남북 환기 구멍이 있어선지 매우 시원하고, 그 부분을 탑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 돋보인다. 빨간 벽돌를 쌓고 바깥쪽으로 하얀 회칠을 했는데, 문양들이 세월의 무게에 덧없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보존의 손길은 전혀 미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만약 생불이 계셨다면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의 행동들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중도’ 유적이 생각이 난다. 이곳은 예로부터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온다는 곳이었다. 그러다 2014 공사 도중 ‘청동기 시대’ 대규모 촌락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역대 최대 규모의 선사시대 유적이라고 한다. 국사책을 다시 써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규모가 워낙 커서 ‘고조선 시대 경주시’라고 할 정도여서 학계와 강원도민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원삼국시대(철기 시대)로 추정되는 800미터가 넘는 ‘환호(해자)’가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것 중 최대 규모다. 유적이 워낙 방대하며 고구려 귀고리까지 발굴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유일하게 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삼국 시대의 변천사를 한꺼번에 연구할 수 있는 최중요 유적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충청도 청주시 흥덕구 일대에 백제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 청주테크노폴리스라는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작은 가건물 같은 것을 하나 짓고, 유물들을 방치해 놓고 있다.

(부부지간에 다정하게 낮잠을 잔다. 촬영=윤재훈)
(부부지간에 다정하게 낮잠을 잔다. 촬영=윤재훈)

미얀마의 이 거대한 유적은 거의 보존이 안되고 있는, 사실 방치의 수준이다. 풍화에 낡아가면서 삶에 지친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 낮잠을 잔다. 또한 이곳은 군인의 나라다. 국가에 권력과 많은 사업들을 독점하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견제받지 않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그러니 국민들의 삶은 피폐하다.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더 발등의 불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많은 미얀마인들이 근로자로 돈 벌러 와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삼사 년만 근무하고 돌아가면 중산층 이상으로 살 수 있다. 집과 차와 사업도 새로 시작할 수 있으니, 결혼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 6, 70년대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 식모, 공순이, 노가대, 판자집, 등 그 시절의 아픔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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