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의 유해 7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봉오동 전투 영웅

전부길 기자
  • 입력 2021.08.13 16:16
  • 수정 2021.08.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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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제야 고국의 품에 안긴다.
카자흐스탄의 극장창고지기로 생을 마감
광복절날 특별수송기로 유해 봉환
생전모습 확인 영상자료 공개

(1912년 하바롭스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모작뉴스=전부길 기자] 카심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과 연계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청와대가 12일 밝혔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왜 카자흐스탄에

홍범도 장군은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이다.

1907년 의병을 모집하여 투쟁하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1920년 간도 청산리에서 일본군 1만 5천여 명을 맞아 싸워 3천여 명을 살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을 피해 소련의 연해주로 이주했다. 일본의 극동 침략이 본격화되자 소련은 한인들의 스파이 활동에 경계심을 품고 강제추방을 결정하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켰다.

홍범도 장군도 1937년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카잘린스크에 이주되어 극장지기를 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생을 마감했다.

(홍범도의 묘 등상 표지판.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오려는 시도는 1993년 북한이 먼저 했으나 고려인 사회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거리 표지판.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도 정부조사단을 현지에 급파하고 유해 봉환 협의에 나섰으나, 북한은 "홍 장군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에 유해는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며 강력 반발했다.

1995년부터 시도된 봉환 협상은 계속 좌절됐지만, 국가 예산으로 현지 묘역 관리는 계속했다. 작년 2020년 3.1절에 유해 봉환을 공식 발표했다.

유해 봉환 절차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기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단이 14일 서울공항에서 공군 특별수송기로 카자흐스탄으로 향한다.

대통령 특사단 특사는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이 맡고, 우원식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조진웅 영화배우가 대표단 자격으로 동행한다.

특사단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도착해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열리는 추모식에 참석한다.

유해는 현지에서 운구, 임시안치, 인수를 거쳐 특사단과 함께 특별수송기로 귀국한다.

15일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독립기념관, 홍범도 장군 봉환 기념 자료기증 및 특별 강연회’ 개최

독립기념관은 17일에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이 담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석한 영상 자료와 독립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홍범도 장군 관련 자료들을 소개한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영상은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재까지 유일한 자료이다. 이번 행사에서 ‘홍범도 일지’와 ‘봉오동전투상보’, 1912년과 1922년에 촬영된 홍범도 사진 2점 등 소장 중인 홍범도 장군 관련 자료 15점을 함께 소개하며, 영상 자료를 기증한 반병률(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의 특별 강연도 진행한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영상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국제공산당(코민테른) 국제대회인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을 촬영한 영상 자료이다. 해당 대회는 국제공산당이 지휘한 원동의 식민지·반식민지 혁명자들의 대회이며, 한국과 중국, 일본, 몽골 등지에서 총 148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홍범도(洪範圖) 장군과 최진동(崔振東) 장군을 비롯하여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 김원경(金元慶), 권애라(權愛羅) 등의 독립운동가들은 아시아 식민지 대표들과 독립투쟁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해당 대회에 참석했다. 이 자료는 홍범도 장군의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재까지 유일한 자료이다.

(1922년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회의에 차석한 홍범도와 최진동 장군.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홍범도 사진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을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 홍범도 장군의 나이는 55세이다. 홍범도는 “1921년 12월 11일에 이르쿠츠크에서 떠나 모스크바에 당진하여 객정(여관, 모스크바 럭스 호텔)에서 개회식을 열고 전기를 이용해서 사진 찍고”라고 기록하며, 사진을 촬영했던 당시 상황을 「홍범도 일지」에 회상했다.

사진 속 홍범도는 소비에트 러시아 적위군 군복을 입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레닌으로부터 받은 권총을 권총집에 넣고 잘 보이도록 우측 허리춤에 돌려놓은 모습이 확인된다. 사진 하단에는 홍범도의 이름을 러시아어(ХОН ПЕМ-ДО)로 기재해 둔 것이 확인된다.

(1922년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회의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 사진=독립기념과 제공)

봉오동전투상보

1920년 봉오동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 장교 야스카와(安川) 소좌가 작성한 봉오동전투와 삼둔자전투에 대한 보고서이다. 「봉오동전투상보」는 일본군의 입장에서 전투 당시 독립군과 일본군의 상태, 전투지역의 기후와 지형 정보, 전투의 진행 과정, 병참과 통신 수단, 전투에 대한 소견 등을 구체적으로 작성한 보고서이다.

(봉오동 전투 상보 표지.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홍범도 일지

홍범도 장군의 출생부터 무장항일투쟁, 중앙아시아에서 보낸 말년까지의 삶과 활동을 시간 순으로 기록한 자료이다. 홍범도가 활동했던 의병부대와 독립군 부대의 포고문이나 경고문, 사령장 등을 제외하면 홍범도가 직접 쓴 글이 많지 않기에 「홍범도 일지」는 독립운동과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홍범도 일지 중 청산리 전투 내용.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 외에도 1958년 고려극장 책임자였던 김진이 이인섭 선생에게 「홍범도 일지」 필사본과 사진을 보내기 위해 함께 보낸 편지, 이인섭이 작성한 「조선인민의 전설적 영웅 홍범도장군을 추억하면서」 등도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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