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반격] 장관 비서관 출신에서 자산관리사로...유영백(최형우 전 내무장관 비서관)
[노년반격] 장관 비서관 출신에서 자산관리사로...유영백(최형우 전 내무장관 비서관)
  • 윤철순 기자
  • 승인 2021.09.13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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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관의 변신은 무죄···‘정치 낭인’에서 자산관리사로
‘시니어 전문가 그룹’에서 3년 동안 매 월 TOP 유지
최형우 전 장관, “플라자호텔 조찬모임에서 쓰러져”
(최형우 전 내무장관 비서관 출신 자산관리사 유영백 씨. ⓒ이모작뉴스)
(최형우 전 내무장관 비서관 출신 자산관리사 유영백 씨. 촬영=윤철순 기자)

[이모작뉴스 윤철순 기자] 장관 비서관 출신 자산관리사(Financial Planner). 어딘가 생경하다. 수식어는 보통 뒤따르는 단어의 의미를 돋보이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다. ‘비서관 출신’이란 관형어는 국회의원, 단체장 등 선출직에 출마하는 후보가 ‘(대통령이나 유력정치인의) 비서관을 지냈으니 검증된 능력을 믿고 뽑아 달라’는 선거유세의 일환으로 흔히 써 먹는 표현이다.

1990년대 초, ‘입영열차 안에서’를 히트시키며 가요계 정상에 올랐던 김민우씨가 수입자동차 영업사원으로 변신했을 때, 세간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상호 ‘직군’의 교차 비교는 연예인과 정치인 모두에게 불편한 표현일 수 있지만, 적절한 비유를 딱히 못 찾겠다. 장관(국회의원) 비서관의 ‘보험영업사원’으로의 변신. 참으로 낯설다.

필경 사연이 있을 터. 그래도 YS(김영삼 대통령)의 ‘오른팔’로 불렸던 최형우 전 내무장관 비서관 출신 아닌가. 역사에 가정(假定)은 무의미하지만 최 전 장관(6선 국회의원)이 건재했다면 아마도 지금쯤 다선(多選) 의원으로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구력 높은 현실정치인으로 매일 텔레비전 뉴스면을 장식하는 인물이 돼 있지 않았을까.

‘문민정부 2인자’, ‘차기유력주자’로 평가되던 최 전 장관의 비서관 유영백(59)씨가 자산관리사로 변신한 건 지난 2018년 초여름. 방송출연과 '아버지학교 강사'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사실상의 ‘정치 낭인’으로 일상을 무심히 보내던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보험과의 연(緣)은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놨다.

(방송진행, 대학교수, 아버지학교 강사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유영백 씨. 사진=유튜브 캡쳐)

그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들였던 ‘시니어클래스’는 교보생명이 은퇴세대를 염두에 두고 TF(Task Force) 식으로 특화해 출범시킨 자산관리 전문가 그룹이다.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한 세대’라는 동년배 은퇴자들의 자산관리를 위해 필요한 재무역량과 세일즈 테크니컬을 강화시켜 그들이 쌓아온 인맥을 대상으로 재무설계와 자산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는 이곳에서 이른바, 1W(매 주 1건의 계약 체결)를 한 주도 거르지 않았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펄펄 날았다. 그간 맺어온 인맥이 그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줬다. 첫 달부터 1000만 원 가까운 수입을 올렸고, 이후에도 여전히 조직 내 톱(TOP) 자리를 지켰다. 업계 평균이 월 2건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다.

지금의 이런 결과 뒤엔 절박함이 있었다. 평생 1도 관심 없었던 ‘보험의 재발견’은 인생2막의 지렛대가 됐다. ‘낭인처럼 살며 인생을 허비할 순 없다’는 절박감은 그동안의 삶을 처절히 반성하게 했고, ‘보험이 이런 거였어?’라는 깨달음은 고정관념을 깨며 전율이 돼 그의 열정을 흔들었다.

‘여의도 시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 늘 상 접해왔었지만 그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 여겼던 보험의 실체. 그동안 자신조차 왜곡되게 받아들였던 보험은 ‘들어주는’게 아닌, 합리적 회원제시스템에 ‘가입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관점의 눈을 뜨게 해줬다. 그렇게 보험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한순간 그의 삶에 훅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몇 차례 고비는 있었다. 지금은 대수롭게 넘길 수 있는 일들이지만,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절망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다. ‘보밍아웃(재무설계사 활동을 주변에 공개하는 것)’ 이후 아주 가까운 지인이 전화를 피했을 때, 또 후배가 미팅 약속을 깨면서 전화로 대뜸 “보험은 들어줄 수 없지만, 돈을 조금 보태주겠다”며 ‘자선사업가’를 자처했을 때 분출한 설움은 한참을 갔다.

그는 이 일을 시작하며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할꺼면 제대로 하자’, ‘모든 걸 내려놓자’ 등. 고비 때마다 자신에게 한 이 약속을 떠올리며 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안타까운 생각이 먼저 든다.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틀 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돈을 모으고, 불특정 구성원이 위기에 처했을 때 최소한의 대비를 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안전장치를 마련해주겠다는데, 여전히 ‘들어주는 것’이란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때면.

“출퇴근길,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주어진 역할에 열심인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나’를 스스로에게 되묻곤 합니다.”

가슴 저린 후회와 반성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늘 생활의 활력과 새로운 희망을 갖는다는 그. 경기도 일산에서 서초동 교대역까지 하루 왕복 3~4시간 거리를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으며 열정을 쏟았던 그는 최근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외자계 보험사 메트라이프생명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늦여름 더위가 좀처럼 꺾이지 않는 9일, 일산에서 그를 만났다.

(본보와 인터뷰 중인 유영백 씨. ⓒ이모작뉴스)
(본보와 인터뷰 중인 유영백 씨. 촬영=윤철순 기자)

◇ 생각이 바뀌다

-쉽지 않은 선택을 했어요.

“네.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지요. 전공도 사회과학 쪽이고, 금융 문맹으로 살아 왔거든요. 가정의 재정도 아내가 도맡아 했고, 제가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산 게 아니라서..”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중장년 취업박람회를 갔었어요. 딱히 할 일도 없는데다 경제적으로 압박도 컸고, 나이는 점점 더 먹고 하다 보니 위기감, 절박감이 계속되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래도 ‘보험 일을 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정말로 제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 바퀴 둘러보고 그냥 나왔습니다. 호수공원 산책이나 할까 해서요. 그런데, 최근까지 함께 일했던 팀 매니저가 저를 뒤따라오더니 잠깐 보자는 거예요. 그러면서 시간이 되면 며칠 교육이나 한번 들어보라 그러더군요.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일을 하고 말고 여부를 떠나 여러 가지로 쫓기는 심리적 압박이나마 잠시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교육을 듣게 됐습니다.”

-들어보니 어떻든가요?

“한 2주 정도 지났을 땐가? 머리를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사실 제 아내도 보험영업을 하고 있지만, 아주 무관심했기 때문에 그냥 아내가 가정경제를 위해 하는 일 정도로만 생각했었죠.”

영어교육학을 전공한 그의 아내는 10.26 때 김재규를 변호한 것으로 유명한 강신옥 전 국회의원(13~14대)을 8년이나 보좌한 비서관 출신이다.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지냈지만, 지난 2000년 남편의 총선출마와 함께 닥친 가정경제 위기를 돌파해보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생명보험회사에서 10년 넘게 활동하며 아들 셋의 양육을 도맡아 사실상의 가장 역을 해왔다. 그의 아내는 지금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지다.

-어떤 기분요?

“보험은 그냥 아는 사람이 부탁하면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죽거나 병에 걸렸을 때 돈을 받는다는 단순한 이치 그 너머를 보게 된 거죠. 금융, 재무, 인간애, 가족사랑 등이 매칭 돼 있음을 깨닫게 됐어요. 교육을 끝까지 들어봐야겠다 생각했죠. 처음엔 가족들한테 알리지 않았는데, 아내가 ‘요즘 어딜 그렇게 다니냐’길래 할 수 없이 얘길 했더니 웃더라고요. 전혀 (보험 일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교육을 다 들었나요?

“네 한 달 일정의 교육을 다 들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첫 출근을 해서 명함을 받으니 막상 자신이 없는 거예요. 교육 때 ‘유망고객 리스트’를 짜는데, 그 리스트 상단에 있던 지인에게 전화를 해 무조건 만났어요. 국회 있을 때 동료 보좌진 중 한 명이었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대뜸 ‘어디에 싸인 하면 되냐’며 선뜻 계약을 체결해주는 거였어요.”

-기분이 어땠나요?

“날아갈 것 같았죠. 운이 정말 좋았어요. 나중에 그 동료가 지인을 연결해줘 여러 건을 추가로 계약하기도 했어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인데, 그렇게 시작해서 첫 달 실적으로 지점 1위를 했어요. 그 때 실적이 지금까지 제가 하고자하는 매월 목표가 됐고요.”

-‘시니어클래스’가 뭔가요?

“전문직 20년 이상, 50대 이후 은퇴한 남성 자산관리 전문가들이 일하는 조직입니다. 100세 시대에 베이비붐 세대들의 경력과 활동력을 썩히지 말고 전문성을 최대한 살려 인생 2막을 펼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준거죠. 그러다보니 다양한 직업군 출신들이 많아요. 금융권 지점장, 고위공직자, 군 장성 출신까지요. 비슷한 연령에 세대 공감도 크고 상호간 동기부여를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특성도 있고요.”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왜 없었겠어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고, 지금은 쉽게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솔직히 자존심 상할 때도 많았죠. ‘이런 대접, 이런 말까지 들으면서 해야 하나?’ 뭐 이런 생각도 많이 했었고.. 보험 대신 돈을 보태주겠다는 얘기까지도 들었으니 말 다 했죠 하하. 하지만 그랬던 사람들도 지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마음을 비우자는 스스로의 다짐도 있고. 이런 생각도 해요, 이 일로 인해 관계가 단절된다 해도 미련 없이 보내겠단 생각이요. 어차피 제가 아는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긴 어려운거니까요. 일부러 끊지는 않지만, 떠난다 해도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자 뭐 이런 거죠.”

◇ 감사하는 일상의 삶

-성공 하셨네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직도 신인이란 생각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업무에 임합니다. 운 좋게 지금까지 왔지만 성공했다 할 정도는 아니죠. 다만,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카드 값 대출 원리금 변제 등 매월 느끼던 압박감에선 해방됐어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은 성공은 이룬 셈이네요 하하. 그때를 생각하면서 초심을 잃지 말자고 매일매일 다짐합니다. 어쨌든 예전에 비해 조바심은 훨씬 덜해요. 감사하게 생각하죠.”

-지금은 보험이 뭐라 생각되나요?

“처음 교육 당시 알게 된 느낌 그대롭니다. 굉장히 합리적인, 인간이 발명한 대단한 시스템이라 생각해요. 지급률, 보험료, 납입기간 등이 정말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 새삼 감탄할 때가 많아요. 고객을 대할 때도 이런 인식을 정확히 인지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하죠. 계약 여부를 떠나 제 이야기를 들어줄 분에게 정확하게 설명하고 돌아올 땐 뿌듯한 마음까지 듭니다. 가치추구, 가족사랑, 죽음 이후 나와 관계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수단, 이런 걸 생각하면 보험은 선택이 아닌 필수인거죠. 한마디로 ‘보험은 과학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유대인 자녀는 13세가 될 때 ‘바르미츠바(Bar Mitzvah)’란 성인식을 치른다. 이때 부모는 4000~5000만원의 ‘축하금’을 모아 부모 사망 시 보험금을 자녀가 탈 수 있도록 자녀를 계약자 및 수익자로 하는 생명보험을 운용할 수 있게 한다. 자녀가 성년이 되면 부모가 관리하던 생명보험 증권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남은 기간 보험료도 자녀가 납입하도록 한다. 결국 부모를 피보험자로 한 생명보험은 자녀에게 소중한 유산이 되고 자녀는 부모의 생명보험보다 더 큰 규모의 보험에 가입해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보험금 세대물림’을 통해 상속세 없는 부의 축적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보험을 이용한 자산 상속 기법)
(유대인들의 보험을 이용한 자산 상속 기법)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제가 리더 기질이 좀 있어요. 부산 동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을 맡았었는데,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주도해 학내 처음 압도적으로 선출직 회장에 당선 됐어요. 원래는 학교장이 지명하던 것을 1980년 서울의 봄 때니까 민주화 바람 영향을 받고 수업을 보이콧하겠다면서 교장선생님과 면담해 직선제를 관철시킨 겁니다. 졸업 후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자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1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갔어요.”

그는 원래 군인이 되고자 했다. 암울한 시대상의 단면이지만 당시 그의 눈엔 ‘정치군인’이 멋있게 보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해 1차 합격은 했지만, 2차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비인후과 검사가 발목을 잡았다. 기억조차 까마득한 시절에 앓았던 왼쪽귀가 문제였다. 만성 중이염. 상실감이 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내키지 않았던 입학이네요.

“그랬죠. 재수를 해서라도 육사를 가야겠다 마음먹을 정도로 아쉬움이 컸거든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뒤엔 부산대 입학원서 넣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해운대 바다로 나갔다 저녁에 오곤 했어요.

-대학생활이 별로였겠네요.

“맞아요. 입학해서도 휴학하고 재수할 생각만 했거든요. 그러다 (정치)경제학 공부에 심취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보자 마음먹고 해서 졸업까지 하게 됐죠. 무슨 일을 하든 몰입하는 성격인데, 성적도 잘 나왔고 정치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으로 선택해 6~7년 걸리는 학점을 9학기 만에 취득했어요. 학교 규정 때문에 10학기를 채웠지만 엄청나게 집중한 거죠. 빨리 졸업해서 서울로 가고 싶었거든요.”

-왜요?

“정치학 공부를 깊이 있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1986년에 결국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본격적인 정치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거죠.”

◇ ‘선택’의 연속

-‘정치와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영춘씨가 고등학교 한해 선배인데, 그분이 YS(김영삼 대통령) 아들인 김현철씨가 운영하고 있던 ‘현대사회연구소’에서 비서실장으로 있었어요. 3당 합당 후 처음 치르는 총선(14대)을 앞두고 김현철씨가 아버지의 대권가도를 위해 민주계 후보들을 많이 당선시키고자 했는데, 그때 청년조직 TF를 맡은 김영춘 선배가 강남 6개지구당 청년조직을 맡아 유세지원을 도와 달라 하더군요. 그게 인연이 된 거죠.”

-총선 후 곧바로 최형우 의원 비서로 갔나봅니다.

“아니요. 선거는 그냥 그렇게 지원하고 정리됐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인을 통해서 YS 때 외무통일위원장을 지낸 정재문 의원 비서관으로 가게 됐어요. 외통위원장실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국회 외통위 관료였던 강경화 전 외무장관을 비롯한 관계자들을 많이 알게도 됐죠. 정재문 의원과 1년 정도 일 했는데, 이분 밑에선 ‘정치’를 배울 수가 없겠더라고요. 이분은 밀실, 막후 같은 ‘비밀정치’ 스타일을 펴는 분이거든요. 그래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두 군데 자리가 났어요. 광명 보궐선거로 당선된 손학규 의원실과 최형우 의원 쪽에요. 저는 손학규 쪽이 맘에 들었는데, 당시 연애 중이었던 제 아내가 최형우 쪽을 권하더라고요.”

-왜요?

“그때 저는 최형우 의원이 그렇게 ‘거물’인지 몰랐었거든요. 그런데 제 아내는 이미 국회에서 여러 해 일하면서 정치권 돌아가는 상황을 볼 줄 알았던 거죠. 정치적으로 성장하려면 최형우 같은 거물 밑에서 배워야한다는 거죠. 그래서 최 의원 비서관으로 있던 대학원 선배를 통해 최 의원의 대선 싱크탱크에 몸담게 됐고, 거기서 국제정치분야를 담당하며 최 의원을 보좌하게 됐어요.”

1993년 4월, 민자당 사무총장이었던 최형우 의원은 아들 입시비리 문제로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다. 일설에 의하면 3당 합당 후 비대해진 조직 정비를 통해 800여명에 달하는 당직자를 정리할 당시 민자당 의원들의 재산공개 주도와 맞물려 ‘피’를 본 쪽에서 최 의원 아들 입시비리 건을 제보했을 것이라 했다. 이후 최 의원은 속초 낙산사 등에서의 ‘은둔생활’을 거쳐 그해 12월 내무부장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내무장관 비서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겠네요.

“장관실로 보좌진을 데리고 가야하는데, 저보다 2년 먼저 비서활동을 한 친구가 가기로 돼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집시법 위반 때문에 공직임명이 안 되는 거예요. 사무관급에 국가기밀을 다뤄야하니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캠프에 합류한지 두 달밖에 안된 저를 보고 최 의원이 ‘유비서 니가 가자’ 그래서 엉겁결에 장관실로 가게 됐고 최 장관 임기(1년) 동안 근무하게 됐죠. 나중에 최 장관이 그만두면서 저보고 내무부 관료로 남으라 했는데, ‘관료 할꺼였으면 행시공부를 했다’면서 정치하러 가겠다 했더니 씨~익 웃더라고요. 그렇게 최 의원보다 며칠 더 장관실에 있다 국회로 복귀했어요.”

◇ 좌절과 도전

(지난 2015년 11월 23일 최형우 전 내무장관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오열하자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가 위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지난 2015년 11월 23일 최형우 전 내무장관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오열하자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가 위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제공)

-1997년 3월 11일은 잊을 수가 없겠어요.

“(최형우)의원이 쓰러지기 전 해인 1996년 12월에 노동법 파동이 있었어요. 청와대 ‘하명’으로 국회에서 (12월 26일)새벽, 노동법 개정안을 6분 만에 날치기 통과시켰거든요. 그래서 쓰러지기 전날인 (1997년)3월 10일 YS에게 반발하며 고향 서생에 내려가 있던 최 의원도 날치기 안을 재심처리하기 위해 급히 올라왔죠. 투표가 계속 지연돼 의원실에서 대기하다 저녁 9시쯤 영감이 퇴근해서 저도 집으로 왔어요. 그런데 다음날인 당일 아침, 서교동 사무실에서 당시 황소웅 실장이 회의 마친 뒤에 ‘영감이 쓰러졌다’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은 함구하기로 했죠. 제 아내한테조차 얘길 안했으니까요. 그런데 대학원 동기로, 지금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고 있는 당시 조선일보 주용중 기자가 연락을 해 와서 ‘내일 아침에 영감 뉴스가 1면 톱으로 나갈 꺼다’ 그래요. 기사를 막아보려 했지만 안 되겠더라고요. 그리고 집으로 와 뜬눈으로 밤을 샜는데, 새벽에 아내가 신문을 들고 왔죠. ‘최형우 뇌졸중, 세미코마 상태’ 제목으로 대문짝만하게 나왔더군요. 나중에 현장에 함께 있었던 당사자들인 김덕룡 의원과 서석재 장관에게 전말을 직접 들었어요. 세분이 플라자호텔 일식집에서 조찬모임이 있었는데, 영감이 도착해 식사도 하기 전에 앉자마자 ‘물컵을 못 잡고 엎더라’ 그러더군요.”

-좌절감이 왔겠어요.

“영감이 쓰러진 후 캠프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죠. 다들 각자도생의 길로 간 거죠. 12월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가 창당한 국민신당과, 호남출신들은 김대중(DJ) 쪽, 대부분은 이회창 쪽, 그렇게 살 길들을 찾아 갔지만 저는 아무데도 안 갔어요. 영감이 치료차 독일로 떠났다 다시 중국으로 왔을 땐 일주일정도 가서 옆에 있었고요. 주변에서 다들 ‘말을 갈아타라’ 했지만 영감 병수발하면서 혼자 남았어요. 당시 현대 다니다 국회 와서 보좌하던 영감 사촌동생이 있었어요. 그분과 둘이서 영감 치료하고 돌아와 세브란스병원서 재활치료 할 때도 둘이서 같이 도왔죠.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16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었죠?

“당시 차떼기니 뭐니 해서 정치혐오도 심했지만, 지역주의 병폐를 깨기 위해서라도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서 아예 공천신청조차 안했습니다. 물론, 신청한다 해도 못 받을 가능성이 컸겠지만, 무소속을 찍겠다는 여론도 많았고 해서 당당하게 무소속으로 나간 겁니다. 또 어느 정도 득표할 수 있을까 하는, 내 자신을 실험해보고도 싶었고요.”

-결과는 어땠나요?

“2.3% 득표하고 낙선했죠. 하하. 특히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발표되면서 표가 확 쏠린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어요. 무소속에 대한 호감도 상대적으로 약해졌고요.”

-17대 때는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100년 정당을 만들겠다면서 열린우리당을 창당했었는데,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한 ‘독수리5형제’ 멤버였던 김영춘(전 해양수산부 장관) 선배가 연락을 해 왔어요. 기득권을 내려놓는 정당을 만들겠다하고, 평소 친분 있던 김부겸(현 국무총리) 선배도 함께 한다 해서 창당에 참여했어요.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부산시당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사무실도 열고 경선준비를 했었죠. 그런데, 열린우리당 당헌당규에 70%는 경선을 하기로 돼 있었음에도 부산에선 세군데만 형식적으로 경선하고 나머진 모두 낙하산으로 내리 꽂는 거예요. 제가 출마를 준비한 연제구도 노사모회장을 지낸 노혜경씨를 내려 보냈어요. 기가 찼죠. 그래서 제가 이건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닫힌느그당’이라 그랬어요. 그랬음에도 공동선대위원장 맡아 달라 해서 수락하고 끝까지 도왔습니다. 17대 총선은 그렇게 끝났죠. 열린우리당에 관여한 기억은 별로 안 좋아요.”

-정치권을 떠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2004년 총선 후 10여 년 동안 저에겐 제일 힘든 질문이었어요. 스스로 물어봅니다. 나는 과연 정치를 떠난 건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아니다’입니다.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을 뿐 떠난 적은 없다고 말할 수 있죠. ‘아버지학교’ 활동이나, 연세대에서의 박사과정 이후 신학원 공부 활동 등도 제겐 하나의 정치행위였던 거죠. 그런데 사실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말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긴 해요. 주변에선 ‘아직도 미련이 남았냐’는 식으로 얘기하고, 가족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대답을 잘 못하고 그러거든요. 그렇지만 ‘아직도 할 수 있는 나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국회의원 권한이 엄청난데, 한번을 해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겪은 다양한 경험과 젊을 때의 열정 못지않은 ‘가슴으로 하는 정치’를 잘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인터뷰 도중 가족 얘기에 눈물을 훔치는 유영백 씨. ⓒ이모작뉴스)
(인터뷰 도중 가족 얘기에 눈물을 훔치는 유영백 씨. 촬영=윤철순 기자)

-가족들은 보험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내가 10여 년 전에 보험 일을 시작해 살림을 꾸려 왔는데,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장점도 많고 도움도 큰 거 같아요. 시너지효과도 있고요. 제 아내는 아직도 정치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하죠. 지방선거도 나가보라 하고 아주 적극적이에요. 우리 아이들은 제 건강을 걱정하면서도 용기를 주죠. 둘째아이는 아빠가 이 일을 한다는 얘길 듣고 실망이 컸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한 1년쯤 지나서 ‘아빠가 밝아진 것 같아 좋다. 같은 일도 아빠가 하면 다른 것 같다’며 문자편지를 보냈어요. 그 글을 읽으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지금도 힘들 때면 다시 읽곤 해요. 무슨 일이든 부모는 자식 앞에서 성실하게 하는 게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마지막 꿈을 꾸며

-새로운 꿈이 있다면?

“최근 외국계 보험사인 ‘메트라이프’로 이적했어요. 제 아내가 오랫동안 일하고 있는 회사인데, 지난 3년간 활동하며 느낀 게 있어요. 부부가 함께 같은 일을 하는데 굳이 다른 회사에 적을 두고 따로 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출퇴근 시간도 단축되고, 마침 아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옮기게 된거죠. 정년퇴직 없는 업종에서 아내와 함께 동업자처럼 ‘사업체를 운영해보자’는 심정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종합금융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한 증권펀드투자상담사 자격시험도 준비하고 있어요.”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뭐라 생각하나요?

“앞과 뒤가 같아야한다 생각해요. 유불리에 따라 변하면 안 된다는 얘기죠. 또 많이 배워야 해요. 아는 것만큼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삶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닌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너무 높은 곳에만 마음 두지 말고, 가까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거, 이런 게 소중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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