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⑦] 벗이여, 여수에 오려거든! 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09.29 10:29
  • 수정 2024.03.09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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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여수에 오려거든1

북쪽에는 종고산이 솟아 있고요
남쪽에는 장군도가 놓여있구나
거울 같은 바다 위엔 고기 잡는 배
돛을 달고 왔다 같다 오동도 바다
아 아름답구나, 여수항 경치
아 아름답구나, 여수항 경치

(돌산 제 1대교와 2대교가 보인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이탈리아의 나폴리보다 더 빼어난 풍광을 지닌 여수 밤바다. 종포(鐘浦)에서 바라본 바다는 오색 불빛들이 빠져 넘실대고 있었다.

KBS 방송국의 다큐 3일에 나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종포의 ‘낭만포차’에는, 추석 전날 온 차량들과 엉켜 2중 주차까지 하며 인파로 넘쳐나고 있다. 온 나라가 코로나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징후를 느낄 수가 없다.

2012년 <여수 세계해양박람회> 축제를 마치고 난 여수는, 바야흐로 한 해 1,300명이라는 관광객이 밀려들어 오는 도시로, 제주도와 비슷한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장군도와 돌산 제 1대교. 촬영=윤재훈)
(장군도와 돌산 제1대교. 촬영=윤재훈 기자)

눈앞에 떠 있는 장군의 모자를 닮은 섬 장군도, 둘레가 600m인 이 섬은 우리나라 유일의 수중 석성으로 왜구의 침략을 대비해 쌓은 유일한 해저석성으로 평가된다. 1497년 연산군 3년에 수군절도사 이량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거세게 파도가 몰아치는 육지와 섬 사이에 돌을 쌓아 성곽을 만들었는데, 목책(木柵)의 흔적도 보인다

실제로 돌산과 장군도 사이에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영등사리나 백중사리 때는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 지금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사람들이 가공한 흔적이 있는 커다란 돌들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그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후에 이곳 사람들이 충무동에 이량 장군의 비각을 세웠으며, 장군도에도 이량장군의 방왜축제비를 세웠다. 이충무공의 전공기념비도 함께 세워져있다.

국권침탈 후 일제가 의도적으로 섬 안에 1천 그루의 벚꽃을 심었다고 하며, 섬이 하얗게 물들이면 바다 건너 청춘들은 그저 가슴이 뛰어 조그만 도선을 타고 이 섬을 건너 왔다. 그 청춘들이 봄꽃과 함께 깊어가던 곳. 그 꽃밭을 함께 거닐었던 소녀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지금도 코 끝에는 그날의 향기가 몰아치는 듯하다. 나의 삶도 그때의 향기로 훨씬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돌산 1대교와 경도. 촬영=윤재훈)
(돌산 2대교와 케이블카. 촬영=윤재훈 기자)

그 옆으로는 우리나라에서 10번째로 큰 섬, 해풍을 맞고 자라나 유난히 코를 톡, 쏘는 갓김치로 유명한 돌산도가 놓여있다. 여수에서 이 섬을 잇는 다리는 2개가 있는데, 오동도 쪽으로는 세계 해양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2012년 4월 12일 개통된, 제2돌산대교(거북선 대교)가 있다.

그 야경 위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안에는 청춘들의 웃음소리가 밤이 새는 줄 모른다. 이 다리는 주경간교로 5경간 콘크리트 사장교이며 고성능 PSC 빔교로 이루어져 있다.

(제주 앞바다에서 하멜의 배가 난파되고 있다. 촬영=윤재훈 기자)

그 아래 방파제 끝에는 빨간 등대가 하나 놓여있는데, 2005년에 세워진 ‘하멜등대’이다. 왜 이 등대가 여수에 놓여 있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여수와 깊은 인연이 있다.

네덜란드에서 살던 헨드릭 하멜이 1653년 스페르베르호(네덜란드어로 새매)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제주도 인근에서 폭풍을 만나 해안에 좌초되었다. 그는 이때 버려진 배를 이용해 탈출하려 했으나 돛대가 부러져 실패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효종은 그를 즉시 한양으로 압송하게 했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원이자 서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양에는 그와 비슷한 경로로 조선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이 한 사람 더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연이며 역시 동인도 회사 선원이었다. 하멜은 귀화한 박연(얀 얀스 벨테브레)의 통역으로 국왕을 호위하는 부대원으로 체류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조선은 이방인을 외부로 보내지 않는다”라는 지침이 있어, 한양에 체류하면서 조정의 감시를 받는다.

(하멜과 한국의 인연. 촬영=윤재훈)
(하멜과 한국의 인연, 하멜 박물관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그 후 두 번의 탈출계획을 세우는데, 첫 번째는 조선에 온 청 사신에게 네덜란드어로 호소하였으나, 대화가 통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두 번째는 사신이 국왕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후에 일본에 간 뒤에 일본 관리가 운영하는 신문에서 말했다.

그는 1653~1666년까지 13년 동안 조선에 머무는데, 그 사이 효종이 돌아가신다. 그 후 1659년 현종 1년에 3년 동안 닥친 식량난 때문에 그들은 각각 분산되어, 남원, 순천, 좌수영 세 곳으로 보내져 7년 동안 억류되게 된다. 그러나 심각한 식량난과 일부 관리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22명 중, 하멜을 포함한 8명은 어선을 타고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에 도착하는데, 그때가 1666년 9월 4일(에도막부시대)이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68>에 기록한다. 그들은 일본관리의 심문을 받은 후, 약 1년간 체류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후 고향을 떠난 지 13년 만인 1668년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거쳐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뱃사람이어서 바다에 이력은 났겠지만, 작은 목선 하나에 의지해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를 거쳐 희망봉까지 돌아 대서양으로 들어섰을, 그들의 불굴의 의지에 감탄을 느낀다.

(하멜의 배. 촬영=윤재훈)
(하멜의 배. 촬영=윤재훈 기자)

그들은 소속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조선과 일본에서 지낸 12년간의 임금을 요구하여 보상을 받는다. 이때 그는 정식 보고서인 ‘1653년 바타비아발 나가사키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를 회사에 제출하는데, 이 문서가 바로 그 유명한 『하멜표류기』가 된다. 그는 이외에도 『조선 왕국기』를 남겼다.

사실 그는 어떤 책을 남기겠다는 의지보다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했을 것 같은데, 그 자료는 17세기 조선의 정치, 외교, 교육, 종교, 문화, 언어를 대상으로 한, 당시 서구인의 시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 후 동인도 회사는 이 책을 근거로 조선에서 무역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반대 때문에 포기하였다. 한국어판으로는 서해문집에서 펴낸 『하멜표류기』가 있다.

이후 묻혀진 이야기는 2002년 FIFA 월드컵 때 유명해진 축구 감독 거스 히딩크에 의해 네덜란드로 소개되면서 알려지게 된다. 여수에서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탑과 기념관을 세웠으며, 하멜의 고향인 호린헴에는 동상이 있다. 그가 억류당해 7년 동안 체류했다고 알려진 전남 강진군에도 기념관이 2007년 8월에 완공되었다.

(아이들의 꿈. 촬영=윤재훈)
(아이들의 꿈. 촬영=윤재훈 기자)

2003년 국립 제주박물관에서는 『하멜표류기』의 육필 원고 원본을 공개하였다. 서귀포시는 20억 원을 들여 길이 36,6m, 높이 11m로 당시 네덜란드 항해용 상선의 85% 규모로 축소해, 하멜의 제주도 표류 350주년을 기념하였다.

이처럼 그를 억압했던 대한민국에서 그를 대대적으로 추모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고 세태에 따라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후 하멜은 인도를 항해하기도 하였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정보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멜의 13년간에 걸친 억류 기록인 『난선(蘭船) 제주도 난파기』는 부록 『조선국기』와 통칭해서 『하멜 표류기』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어 원제는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문맹이었던 대다수의 선원들과 달리 하멜은 유일하게 교육받은 서기로, 조선에서 억류당한 체험들을 사건, 날짜, 마을 이름, 거리, 언어 등 상세하게 남겨둔 것이다. 인심은 세월에 따라 변해가지만, 그에게는 우리나라를 유럽에 최초로 알렸다는 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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