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건희의 산책길㉛] 연극 더 드레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

천건희 기자
  • 입력 2021.12.07 14:20
  • 수정 2021.12.07 14: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이모작뉴스 천건희 기자] 국립정동극장 주변은 걷기 좋은 길이다. 시청역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까지 오르는 길은 언제 걸어도 기분이 좋다. 지난 11월 30일 국립정동극장에서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를 관람했다.

국립정동극장은 기획 공연으로 배우가 작품 선정부터 참여하는 ‘연극 시리즈’를 시작했다. 연극 <더 드레서>는 작년 가을 상연했지만, 코로나19로 공연이 중단된 것을 올해 다시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첫 번째로 선정된 송승환 배우가 선택한 공연이 로널드 하우드 원작 <더 드레서>로 장유정 연출로 무대에 올려졌다.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무대는 공연장 뒤의 분장실로 꾸며져 있고 공연 시작 전인데, 배우 2명이 무대 위에서 분장하고 있어 무대와 관객의 구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영국의 한 극장,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연기할 노(老)배우는 선생님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리어왕’ 무대를 올리기 직전에 선생님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무대감독은 서둘러 공연을 취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생님 옆에서 16년간 드레서(의상 담당자)로 함께 일한 노먼과 선생님은 “폭격이 내리치는 중에도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며 예정대로 극을 올리려 한다. 객석 안내를 할 사람이 없어 드레서가 대신하고, 출연 배우가 무대 뒤에서 폭풍 소리도 만들어야 되는 열악한 상황이나 오직 공연을 올리겠다는 의지로 공연을 올린다. 첫 대사도 생각해 내지 못해 노먼의 도움을 받아 무대에 오른 선생님이었으나, 막상 무대에 오르니 227번째 리어왕을 열정적으로 잘 마친다. 공연을 마친 선생님은 분장실에서 노먼에게 자신의 회고록을 보여주고는 숨을 거둔다. 그런데 선생님의 회고록에는 노먼에 대한 감사나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노먼은 자신을 기억해주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선생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울부짖는다.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더 드레서>는 극 안에서 연극 ‘리어왕’이 공연된다. 공습경보까지 울리는 극장에 관객들이 꽉 차 관람하는 장면은, 코로나가 유행하는 지금에도 가득 찬 객석이 대신한다. 리어왕 공연 커튼콜에서 선생님은 연극을 공연해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일상이 깨지고 문명이 위협 당해도....저희 배우들은 목숨을 걸고 또 다른 싸움을 합니다. 저희에게 진정 주어진 일은 위대한 연극 작품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속에서 공연을 올리는 작품 속 1940년대 연극인들의 열정은 펜데믹 상황 속에서 무대에 서는 오늘날 배우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선생님을 연기하는 배우 송승환의 연기력은 놀랍다. 늙고 병들고 공습 이후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는 노배우 역할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을 만큼 시력이 약해져, 글자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대본을 듣고 외우며 오른 무대라고 하니 존경스럽고 응원하는 마음이다.

선생님을 향한 믿음과 지지를 아끼지 않던 드레서 노먼(오만석)은 선생님이 있기에 자신이 존재했고, 무대와 공연 역시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노먼이 인정받지 못한 울분의 감정으로 분노하며 울먹이는 연기는 압권이었고, 관객들의 마음을 울렸다.

<더 드레서>는 무대 뒤편이 주 배경이다. 한 편의 연극을 상연하기 위해 배우들과 함께 무대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땀과 눈물이 표현되었다. 분장실 공간과 음향을 담당하는 백스테이지, 리어왕의 공연 무대의 세 공간이 한 무대에서 잘 표현되어 실제로 내가 리어왕 공연에 참여하는 느낌을 주었다.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선생님은 좋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면서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거야.”

노먼이 울먹이면서 하던 말이 가슴에 남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작은 슬픔이 있어요.

사람이 작아질수록 그 슬픔이 더 커지는 법이죠.”

나의 삶의 이유와 주위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깊이 있는 정극 연극을 관람해서 뿌듯했다. 더블케스팅인 김다현의 노먼 연기도 궁금해지는 연극 <더 드레서>는 국립정동극장에서 내년 1월 1일까지 이어진다. 정동길 옆의 ‘고종의 길’과 대한제국 시대 외교 타운을 이루었던 러시아공사관과 정동공원을 거쳐, 덕수궁 및 정동 전망대 등 역사문화명소 20여개를 아우르는 역사보행탐방로인 ‘대한 제국의 길’ 산책은 정동 나들이의 덤이다.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