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77] 조지아 화가 '피로스마니'...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 주인공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12.17 10:36
  • 수정 2021.12.2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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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화가 '피로스마니'
심수봉의 '백만송이 장미' 주인공

만약 당신이 내 편지를 받았다면
난 그 편지에 내가 조금 있으면,
자유라는 것을 당신에게 말해 줬어요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죠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원한다며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원한다면
노란 리본을 늙은 오크나무에 걸어주세요
3년이 지났어요
아직도 날 원하나요?

- Tie a yellow li bon round the old oak tree(1973)

(‘당나귀 탄 의사’)
(필로스마니 ‘당나귀 탄 의사’)

[이모작뉴스 윤재훈] 우리나라에서 가수 심수봉이 불러서 유명해진 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인 화가 <피로스마니>의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여행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1862년 시그나기 근처의 작은 마을 미르자니(Mirzaani)에서 소 몇 마리와 작은 포도원이 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덟 살 무렵인 1870년 슐라베리로 이사를 온다. 그런데 이사를 오자마자 아버지와 형까지 돌아가시게 된다. 그리고 두 누이인 페페와 마리암은 입이라도 줄인다고 일찍 시집을 가 홀로 되었다. 10살 무렵에 트빌리시의 부유한 상인인 아베르디 칼란타로프에게 입양되어 그 집에 종이 된다. 그리고 1872~90년인 28세까지 살면서 홀로 그림 공부를 한다.

오직 독학으로만 공부하면서도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든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면서도 따뜻하고 강렬한 색채가 돋보이는 많은 작품들을 그렸는데,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리미티즘(Primitism)의 대가가 된다.

(위에 피로스마니의 그림을 모티브 삼아 만든, ‘당나귀 탄 의사’, 시그나기. 촬영=윤재훈)
(위에 피로스마니의 그림을 모티브 삼아 만든, ‘당나귀 탄 의사’, 시그나기. 촬영=윤재훈)

선술집에서 간판을 그리며 근근이 살아가던 그는, 조지아를 방문한 프랑스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가진 것을 모든 것을 팔아 장미를 사 그녀가 묵던 숙소 앞을 꽃밭을 단장했다. 그 맹목적인 사랑 이야기가 풍문으로 전해져 온다.

화가는 당대 편협된 조지아 미술계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학교나 먼저 다니고 오라”, “수준 낮은 간판장이 그림” 이라는 조롱과 멸시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림은 어린아이나 미술학원생 정도나 그린 그림으로 모멸감을 받기도 했다.

(타마라 여왕 초상화)
(피로스마니의 '타마라 여왕' 초상화)

피로스마니는 상점의 간판이나 초상화, 동물 그림들을 많이 그렸는데, 대부분 간판 주문이나 초상화 의뢰를 받고 그렸다. 특별히 타마라 여왕을 좋아해 여러 장을 그렸으며, 12세기 위대한 조지아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초상화도 있다.

1910년대는 모스크바에서 전시회도 하고 작품도 팔려나갔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그의 처지와 비슷하게 사회에 약자들이나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대상이었다. 그림을 팔아 근근히 살아가던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혁명의 여파로, 국제정세 뿐만 아니라 조지아 국내상황도 혼란스러워 지면서 그림이 팔리지 않았다. 술과 빵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대신 그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홀로 지하실 방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싸우며 보드카에 취해 잠이 들었다가 영영 일어나지 못했으며, 사인은 영양실조와 간기능부전 이었다고 한다. 연고자가 없는 그는 트빌리시 성 니노 공동묘지의 신원불명자 구역에 장례 의식도 없이 매장되었으며, 추측하건데 나이는 55~56세였다고 한다. 당대 기득권 세력들로 뭉쳐진 조지아 미술계에서 조롱과 멸시에 시달리던 한 천재 화가의 말년는 이렇게 비참하게 끝났으며, 지금의 한국 예술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시장 입구에 붙은 피로스마니 초상화와 마지막 지내던 지하방, 피카소가 그렸다.)
(전시장 입구에 붙은 피로스마니 초상화와 마지막 지내던 지하방, 피카소가 그렸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의 파리화단은 그의 그림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1926년 그의 작품만이 실린 최초의 도록이 출판되자 유럽 화단에서는 깜작 놀라며 그를 주목했다. 프랑스의 루소와 루오를 합쳐놓은 듯한 화풍에다 그루지야 인만이 느낄 수 있는 민족적 영혼이 녹아있다고 격찬했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화가는 바로 피카소였다.

그루지야 태생의 유명한 소련 영화감독 게오르기 쉔겔레야 감독은 1969년 ‘피로스마니(Pirosmani)’의 자전적인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72년 시카고필름 페스티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조지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1라리에도 피로스마니 얼굴이 그려졌다.

(백만송이 장미의 주인공 여배우 '마가레트')

문득 노란 손수건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특히 미국에서는 노란 리본의 의미가 각별한데, 가족이 전쟁이나 형무소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무사히 귀환하면 환영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감동적인 사랑의 사연은 1973년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나 집으로 가고 있어요.
나 형량을 다 마쳤어요.
난 지금 알아야만 해요
그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나의 것이 아닌지

만약 당신이 내 편지를 받았다면
난 그 편지에 내가 조금 있으면,
자유라는 것을 당신에게 말해 줬어요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겠죠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원한다며
만약 당신이 아직도 날 원한다면
노란 리본을 늙은 오크나무에 걸어주세요
3년이 지났어요
아직도 날 원하나요?

만약 내가 오크나무에 노란 리본을 보지 못한다면
난 그냥 버스에서 우리 사이를 잊어 버릴께요
날 저주할 거에요
만약 내가 노란 리본을 늙은 오크나무에서 보지 못하다면
버스 기사님 저 좀 봐 주세요
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있어요

전 볼 수 있을 거에요
난 아직 감옥에 있고
그리고 내 사랑 그녀가 열쇠를 가지고 있어요
간단한 노란 리본
내가 자유로워지는데 필요한.
난 그녀에게 편지로 부탁했어요
노란 리본을 늙은 오크나무에 매달아 놓으세요

3년이 지났어요
아직도 날 원하나요?
만약 내가 노란 리본을 보지 못한다면
그냥 버스에서 우리 사이를 잊어 버릴께요
날 저주할꺼에요
만약 노란 리본를 보지 못한다면

지금 모든 버스가 환호해요
전 제가 본 것을 믿을 수 없어요
100개의 노란 리본이 늙은 오크나무에 걸려 있다는 것을

- Tie a yellow li bon round the old oak tree(1973)

(피로스마니의<strong> '</strong>맥주잔을 든 여인', 창녀로 추정)
(피로스마니의 '맥주잔을 든 여인', 창녀로 추정)

사랑은 아무리 눈이 멀고 맹목적이라고 하지만, 이렇게도 ‘맹목남’일 수가 있을까? 이토록 무조건적인 짝사랑이 있을까? 누군가는 짝사랑은 폭력이라고 하는데, 세상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알지도 못했고, 만난 적도 없었는데, 그러기에 자신의 단 한 번 뿐인 인생의 시간도 참으로 소중한 것일 텐데. 맹목적인 사랑 이야기에 이 깊은 산속, 바람 따라 흘러가고 흘러온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더욱 애절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가 90살이 넘고 파리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렸을 때 가장 늦게까지 울었던 여인은, 바로 마가레트였다고 한다.

사랑을 위하여, 가오말조스Gaumarjos(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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