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82] 터키, '국부(國父) 아타튀르크’ 4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2.18 16:34
  • 수정 2022.03.08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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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國父), 아타튀르크’ 나라, 터키 

"터키 땅에 살고, 터키어를 사용하고,
터키를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는,
곧 터키인이다.“

(21년 11월 이스탄불에서 시민들이 터키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서거 83주년을 추념하고 있다. 사진=이스탄불=신화/뉴시스 제공)

حاكيمييت بيلآ كايدو شارت ميللتيندير
Hâkimiyet, bilâ kaydü şart Milletindir.

주권은 제한 없이, 조건 없이, 국민의 것이다.
-  아타 튀르크 어록

(터키의 상징, 아야소피아. 촬영=윤재훈)
(터키의 상징, 아야소피아.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아타튀르크'의 나라, 영묘에서부터 시작해 터키 어디에서나 그의 어록을 볼 수 있으며, 어느 장소를 가나 아타튀르크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는 ‘국부(國父)’로서 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그야말로 '종교'에 가까울만큼 열성적이다. 거의 신성시화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라도 그를 비판하는 말을 은연 중에라도 해서는 안된다. 터키 형법 301조에도 아타튀르크 모독죄에 대한 특별한 조항까지 있다. 타임 지는 1923년 3월 24일에 발간한 잡지에서 화제의 인물로 선정했다.

(타임지. 1923년 3월 24일에 발간한 잡지에서 화제의 인물 '아타튀르크')
(타임지. 1923년 3월 24일에 발간한 잡지에서 화제의 인물 '아타튀르크')

1923년 10월 29일 터키 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이 되어 공화인민당을 창당하고, 강력한 ‘정교분리,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1,300여 년간이나 지속된 ‘칼리파 제도’를 없앴고, 미국인 교육개혁자인 존 듀이를 초빙해 자문을 얻고 여성 교육과 근대교육에 힘썼다.

(히잡 쓴 여인. 촬영=윤재훈)
(히잡 쓴 여인. 촬영=윤재훈 기자)

1925년에는 모자 및 복식법을 통과시켜 구시대의 상징이며 역사적인 ‘페스(오스만 제국 시기 남성용 모자, 북아프리카 일대 아랍인들이 착용하던 전통모자)’와 ‘히잡’의 착용을 금지시켰으며, 가족법을 통과시켜 스위스식 민법을 도용했다. 달력법을 통과시켜 그동안 사용되었던 달력 대신 그레고리력을 도입했고, 1926년에는 ‘샤리아(이슬람의 종교 율법, ‘지켜야 할 것’)‘를 금지했다. 그리고 서구식 정부 제도를 받아들였다.

아타튀르크는 투르크 족이라는 말이며, 그의 출생은 지금의 그리스 땅인 테살로니카이다. 그리스를 여행하는 터키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을 들린다. 푸른 눈과 하얀 피부, 출생지역 등으로 다소 전통적인 동양계 투르크족의 외모와는 거리가 있고 순혈 투르크인이 아니라는 혼혈 논란도 있다. 그도 생전에 그런 말을 인정했으며 워낙 다인종이 섞인 터키의 특성상 그렇게 정의했으며, 평생 국가를 위해 살았다.

"터키 땅에 살고, 터키어를 사용하고,
터키를 자신의 조국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이는,
곧 터키인이다."

1928년 11월 3일에는 복잡한 아랍 문자 대신에 알파벳을 쓰는 라틴 문자를 채택하는 ’언어개혁법‘을 통과시켰다. 문맹률이 높았던 터키는 1927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터키인 중에서 아랍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에 우리의 세종대왕처럼 아타튀르크는 문자개혁에도 온 힘을 쏟았다.

이 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초등학교를 만들었고, 성인에게는 4개월간 강습을 받게 하였으며, 학교가 없는 마을에는 순회학교까지 개설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순회학교에 나가서 일일 교사가 되어 문자 교육까지 하는 노력을 보였다. 이런 결과로 1935년에는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0만명이 넘게 되었다. 대 오스만 제국의 후예들로서는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도 있었겠다.

또한 재미있는 일화로는 자신이 직접 알파벳 행진곡이란 노래까지 작사, 작곡을 하여,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넣으려고 하였지만,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별로다"라는 평가를 내려 불과 하루 만에 그대로 폐기했다.

(이스탄불 전차. 촬영=윤재훈)
(이스탄불 전차. 촬영=윤재훈 기자)

여기에 라틴 문자개혁 직전에 터키어 학자, 다른 국가 어학자들이나 정부까지도, 정착까지 약 2~3년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여 그때까지는 혼란방지와 국민이 익숙해질 때까지 새 문자와 아랍 문자 병행표기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단 "몇 개월 정도 해보자"란 생각으로 혼용 없이 바로 새 문자체제로 들어갔는데, 의외로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고 아주 빠른 속도로 터키 사회에 받아들여졌다. 이는 국부에 대한 국민의 존경심과 우리를 위해 문자를 만들고 개혁한다는데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열의들이 커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터키 교육부, 공무원들의 엄청난 노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타튀르크 동상 ⓒ게티이미지뱅크)

도시에서 가장 큰 대로에는 '아타튀르크 대로'(Atatürk Caddesi)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도시의 중심가에는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다. 심지어 동상을 뜻하는 터키어인 헤이켈(Heykel)은 몇몇 도시에서는 '시내 중심가'라는 의미까지도 가지고 있다. 또한 현재는 화물 취급만 하고 있지만, 터키의 관문이었던 이스탄불 제1 공항의 이름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Istanbul Atatürk International Airport)'이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사랑은 해외에도 유별나서, 터키인이 운영하는 케밥 식당에는 대부분 아타튀르크 사진이나 터키 국기를 볼 수 있다.

터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의 사진은 단순히 그냥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아닌, 장소에 따라 다양한 사진들이 있다. 관공서나 군부대, 경찰서를 가면 군복 입은 사진, 학교에 가면 책상에 앉아있거나 강의하는 사진, 식당에 가면 식사하는 사진, 카페에 가면 커피를 마시는 사진, 놀이공원에 가면 그네를 타는 사진 등이 있다.

그런데 2014년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방이 1000개가 넘는 거대한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그곳 부지 일부를 침범했다가 국민에게 지탄을 받았다. 그에 대한 사랑이 워낙 지극한지라 한때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타튀르크 사진을 대통령궁에서 치우자, 시위가 일어났을 정도였다.

죽은 후에는 재산의 극히 일부를 여동생에게 물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국가에 기부한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정치인이나 대통령을 보면, 정말 부끄러울 따름이다.

(웃고 있는 '아타튀르크' 터키 화폐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터키 화폐의 앞면에는 아타튀르크를 도안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신 터키 리라(Yeni türk lirası)의 사진이 지나치게 뚱뚱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싫어하는 사람까지 많다고 하니, 그에 대한 국민의 사랑이 짐작이 간다. 여기에 돈의 크기가 클수록 점점 그가 웃고 있다 .

(9시5분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돌마바흐체 궁전의 방에서 열리는 추도식)

간단한 식사를 좋아한 그였지만 전통 술인 라크와 담배, 커피를 좋아해 입고 달고 살다시피 했는데,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운명했다. 이 때문에 터키에서는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가 되면 5분간 묵념을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비롯한 문화유적지에서는 항상 시계가 이 시간에 멈춰져 있다. 또한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가정에서는 시계를 이 시간에 맞추어 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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