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⑪] 혜화문에서 고려의 푸른 시인들을 기리다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4.21 17:50
  • 수정 2023.01.1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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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에서 고려의 푸른 시인들을 기리다1.

-서울성곽을 따라, 혜화문에서 북정마을까지(노원 50+여행작가교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그들의 푸른 정신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정권이 바뀌면 눈치를 보고 줄대기에 여념이 없는 철새들,
알아서 스스로 기는 기레기들,
작금(昨今)의 배금주의(拜金主義) 앞에
더욱 그리운 어른들이다.”

(혜화문에서, ’여행작가반‘ 여행 중. 촬영=윤재훈)
(혜화문에서, ’여행작가반‘ 여행 중, '노원 50+여행작가교실 회원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오늘은 혜화문에서 북정마을까지 걸어갈 참이다. 이 길은 조선 500년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걸어가는 길이다. 혜화문에 올라서니 건너편으로 성곽이 보이고, 아스라하게 조선의 오백 년 역사가 흘러간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 ‘오백 년 도읍지를’ 야은 길제

고려말의 세 충신,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망해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비탄의 시를 써 내려 간 삼은(三隱)의 한 사람, 원천석과 더불어 그의 시가 특히나 많이 회자되는 까닭은 고려 말의 흥망성쇠를 특히나 가슴 저리게 잘 나타낸 까닭일 것이다. 1400년 정종 2년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로 임명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했던 절의(節義)가 다시 한번 숙연하게 다가온다.

세종대왕이 즉위하여 그 절의(節義)를 기리는 뜻에서 그 자손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던 것처럼 자손들도 조선에 충성하라며, 선선히 관직 진출을 허용했던 포용력.’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어머니를 모시다, 고려의 멸망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망해버린 도읍, 송도(개성)를 찾아와 망연자실해 하며, 이 시조를 읊었을 것이다.

세상을 걱정하고 천하를 논했던 친구들도, 그 화려했던 영화도 다 온 데 간 데 없고, 폐허 속 잡초만 날리는 474년의 여말(麗末)의 황망한 뜨락에서, 벗들의 부재(不在) 속에서, 정몽주와 같은 그의 단심(丹心)이 빛난다. 한 사람의 시조가 더 생각난다. 

(뒤에서 바라본 혜화문. 촬영=윤재훈)
(혜화문에 어린 산수유. 촬영=윤재훈)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에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 ‘백설이 잦아진 곳에, 목은 이색

이 시 역시, 구름처럼 간신배들이 득세하고, 매화 같던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은 간 곳이 없고, 망해버린 나라 앞에서 갈 곳 몰라 하는 고려 선비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석양빛에 보인다.

왕조가 자기의 생명이자 신성한 지상 명제로 여겼던 봉건 귀족의 처지에서, 나라의 멸망은 곧 자신의 멸망이라는 당시의 의식구조가 발동했을 것이다.

그들의 충심과 망해버린 조국을 바라보는 그의 절개와 문향이, 한지 문에 스며든 매화 그림자마냥 절절하기만 하다.

'동소문(혜화문)에서'
('동소문(혜화문)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혜화문은 상당히 위풍당당해 보이지만 사실 조선의 한성 4소문 중 동소문(東小門)에 해당된다. 1396년 태조 5년에 창건했고 조선 시대 내내 한성에서 강원도, 함경도 지역을 오가는 출입문이었다.

태종 때 풍수적 문제로 북대문인 숙정문이 폐쇄된 뒤로는 사실상 북대문 역할을 했다. 원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는데, 창경궁의 정문과 한문까지 똑같아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쳤다. 홍화문의 창건 시기가 1484년 성종 15년이므로, 아마도 그 이후로 바뀌었을 것이다.

조선의 대부분의 문이 그러했겠지만, 이 문도 참 많은 평지풍파(平地風波)을 겪었다. 우리나라 최대의 대란(大亂) 중 하나이며, 1592년 무능한 왕이었던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루가 불탔다. 그 후 1684년 숙종 10년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1739년 영조 15년에는 문짝이 불에 타 닫지 못하고 어영청 병사들이 밤낮으로 지켰다. 5년 뒤에야 겨우 문루를 개수하고 새로 현판을 걸었다고 하니, 그 당시 빈궁했던 조선의 현실이 보이는 듯하다.

(뒤에서 바라본 혜화문. 촬영=윤재훈)
(뒤에서 바라본 혜화문. 촬영=윤재훈)

그러나 더 큰 환란이 닥쳐왔다. 일제가 다시 우리나라를 침입, 강점하여, 1928년 관리 보수가 어렵다는 이유로 문루를 헐어버리는 만행을 자행한다. 한마디로 무능한 나라에서 그 정신을 파괴하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석축과 홍예만은 간신히 남아있었는데, 1935년에 그것이 넘어져 인근 초가집을 덮쳐 일가족 5명이 매몰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3년 뒤인 1938년에는 동소문로를 뚫고 전찻길을 만들면서 남은 석축과 홍예마저 완전히 철거하여, 그 흔적마저 친일파들의 정신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던 것을 1992년에 와서야 원래 있던 자리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착공하여, 1994년에 복원된 것이다. 그 까닭은, 해당 지역이 완전히 변해버렸기 때문인데, 1939년 일제가 혜화동 종점을 돈암동 종점으로 연장하면서 혜화문을 철거함과 동시에, 전차 통행을 위해 7미터 정도 낮췄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는 동소문로 좌우에 있는 성곽의 높이가 더 높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복원된 현판의 글씨체는 원본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꼼꼼하게 고증되지 못해, 두고두고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다 2019년 11월 22일에야 원래의 현판 모양으로 복원되어, 그나마 우리가 조선 시대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소나무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분다. 일행들과 과일 몇 조각을 나누고 웃으면서 출발한다. 오늘은 가녀리게라도 남아있는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걸어볼 참이다.

섬나라 일본은 항상 대륙진출의 야망을 꿈꾸며, 그 발판에 있는 이 나라를 호시탐탐 이리의 눈으로 노리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섬나라 민족의 숙명일 것도 같아, 동고(同苦)의 마음까지 들 때도 있다.

(동소문로 건너 바라본 서울성곽. 촬영=윤재훈)
(동소문로 건너 바라본 서울성곽. 촬영=윤재훈 기자)

한양은 한성 백제의 수도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2천여 년이 넘어간다. 그 땅은 백제가 한강 이남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도읍을 정하고 나서부터 숱한 부침을 겪어왔다.

세계에도 이런 역사적인 수도를 가진 나라가 흔치 않다. 로마도 2,206년의 역사를 이어갔지만, 서로마 제국 천 년, 지금의 이스탄불에 세워졌던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질 때까지의 천여 년의 세월을 헤아리는 정도다.

그 후 태조 왕건은 천 년 왕국의 수도, 신라의 경주까지 쳐들어가 도성을 점령하고, 도읍을 개성으로 정한다. 그리고 불안정한 나라의 기초를 강하게 만들고자 신라의 귀족들과 숱한 정략혼인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망국을 맞는 귀족들에게는 다시 한번 그들의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474년의 역사를 이어가던 고려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역성혁명을 도모하고 군대를 돌림으로써,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이 개창된다.

(경복궁의 모습. 촬영=윤재훈)
(경복궁의 모습. 촬영=윤재훈 기자)

흥망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 ‘흥망이 유수 하니, 원천석

망국을 슬퍼하는 시인은 또 있었다. 그는 고려말의 혼탁한 상황을 보면서 치악산에서 은거하며 부모를 봉양했다.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이색 등과 더불어 시국을 개탄했다.

과거 태종 이방원을 가르친 적이 있어, ‘제1, 2차 왕자의 난을 피로 승리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몇 차례나 옛 스승을 벼슬길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친행(親行)를 하였으나 몸을 숨겼다. 그때 태종이 올라섰던 섬돌을 후세인들은 태종대라 불렀으며,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 곁에 있다.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그들의 푸른 정신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정권이 바뀌면 눈치를 보고 줄대기에 여념이 없는 철새들,
알아서 스스로 기는 기레기들,
작금(昨今)의 배금주의(拜金主義) 앞에
더욱 그리운 어른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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