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⑮] ’간송미술관’에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까지 5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5.04 19:09
  • 수정 2022.05.1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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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에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까지

 

나는 잘못이 없어요
세상이 나를 이렇게 몰았어요
마치 우리 속의 갇힌 짐승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제가 본 세상이어요
어린 날 제 가슴 속에 만들어진,
세상이라고요
세상은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보여요

- ’나는 잘못이 없어요‘ 중, 윤재훈

 

(예전의 모습, 이 숲들이 거의 잘려나가고 나무가 거의 없다. 촬영=윤재훈)
(간송미술관 예전의 모습, 이 숲들이 대부분 잘려나가고 나무가 거의 없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성북 초등학교가 보이고, 왼쪽 편에 ’간송미술관‘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곳 중 하나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워마, 누가 나무를 심하게도 잘라버렸네”

누군가 가장 먼저 쏟아낸 말이다. 예전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다. 한창 봄이 무르익고 있는데도 꽃이나 푸른색은 볼 수가 없고, 삭막하다 못해, 황량하다. 햇빛 한 점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밀어버리고 대부분 콘크리트를 발랐다. 햇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시고 잠시도 머무르기 싫은 장소로 변해 버렸다. 관리인인 듯한 사람이 다가와 다시 숲은 복원한다고 하는데, 빈말인 것 같다.

입구에는 어깨가 심하게 잘린 나무만 서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 오른쪽으로는 숲이 있었는데 안쪽으로 심하게 밀려 나가고, 예전에 보이던 석상(하르방?)도 보이지 않는데, 숲 안에 있던 돌부처들의 안부도 걱정된다.

이곳은 국내 3대 사립미술관 중 하나다. 문화재 보존에 뜻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이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 박물관’으로, 그 전신은 1938년 설립된 ’보화각‘이다. 1966년에는 간송 미술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체제를 변경되었다.

간송 선생의 문화재에 관한 애착을 예전부터 알고 존경해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황폐해진 간송 미술관. 오른쪽에 있던 숲도 거의 없어져 버려, 다시 오고 싶지 않다. 촬영=윤재훈)
(황폐해진 간송미술관. 오른쪽에 있던 숲도 거의 없어져 버려, 다시 오고 싶지 않다. 촬영=윤재훈 기자)

손자 전인건 관장이 운영하는 이곳은 얼마 전 재정난을 이유로 보물 2점에 이어 국보 2점인 제73호 ’금동삼존불감(1962년 지정)‘과 국보 제72호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1962년 지정)‘을 경매시장에 출품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추정가는 각각 28~40억, 32~45억이었다. 그러나 국보는 흔히 가격을 매길 수가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에 속한다.

미술관은 2020년 5월에도 삼국, 통일 신라 시대 불상 2점(보물 284호, 285호)을 경매에 출품했으나 모두 유찰된 끝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매각한 바 있다. 이때도,

일제강점기 목숨을 걸고 우리 문화재를 지킨
간송 전형필 선생을 뜻을 기리기 위해, 국가가 매입해야 한다

는 여론이 떠밀려 국가가 샀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번에도 국가가 사주기를 원하는 것일까. 개탄스러운 지경이다.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가 상업 경매에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예전의 아름다운 숲길. 촬영=윤재훈)
(간송미술관 예전의 아름다운 숲길, 입구부터 나무가 무성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론에 등을 떠밀렸는지 손자는, “다시는 문화재를 파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는 모양이다. 우리 국민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여기에 다행히 7년 만에 전시회가 열렸다. 4월 16일부터 6월 5일까지 보화각 전시실에서 열리는 기획전인데,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의 보물, 다시 만나다‘ 전이다. 2019년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보화각은 이번 전시를 마치면 보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또한 간송 미술관은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만 특별전이 열려, ’은둔 미술관‘이라는 닉네임도 붙어왔다. 우리 일행은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가 없어 입구에서 뒤돌아, 서둘러 빠져나왔다.

(예전의 아름다운 숲길. 촬영=윤재훈)
(오래된 거리, 성북동 풍경. 촬영=윤재훈)

성북동 거리를 걷는다. 언제까지 보존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거리를 거닐다 보면, 따뜻한 옛이야기를 품고 있는 건물들이 곳곳에 있다.

오래된 세탁소, 전자수리점, 삼화페인트 함석 시공,
돼지갈비집, 엄마 손칼국수 집, 건재 철물점.

"도시 개발이라는 광풍 아래 이 풍경도
언제까지 남아있을지 모른다.
경제라는 미명(美名) 아래,
재개발은 곧 돈이라는 천박한 경제주의 아래,

사라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심성은 파괴되고, 히꼬 꼬모리(일본에서 시작된 은둔형 인간),
인성 파괴범 등 가족이 해체되고,
그 아래 각가지 병리 현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짐승적인 극악한 범죄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인성을 잃어버린 병자들은 반성은커녕, 비웃음을 날리면서,
이 사회를 조롱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고도
나는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청년의 눈빛
세상의 끝이 그를 거기까지,
몰았을 것이다

어린 날 엄마가 돌아 가셨어요
그 옆에서 하루를 울었어요
아버지는 어디로 간지도 몰라요
도무지 기댈 데라곤 없었어요
세상은 유리창에 낀,
찬 서리 같았어요

어느 겨울 얼음장처럼
마을 강을 흘러가다
그만 덜컥, 덫에 걸렸나 봐요
수많은 날을 울었지만
곁에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잘못이 없어요
세상이 나를 이렇게 몰았어요
마치 우리 속의 갇힌 짐승처럼 말이에요

이것이 제가 본 세상이어요
어린 날 제 가슴 속에 만들어진,
세상이라고요
세상은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보여요
- ’나는 잘못이 없어요‘, 윤재훈

 

(세상사의 한숨 소리도 함께 떨어졌으면 좋겠다. 촬영=윤재훈)
(세상사의 한숨 소리도 저 노란 은행잎처럼, 함께 떨어졌으면 좋겠다. 촬영=윤재훈 기자)

조금 더 오르자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진다. 거리 곳곳에 옛 풍경들이 발길을 잡아 쉬, 오르지 못한다.

무의탁 노인을 상담한다는 실상 선원, 세상의 실상(實狀)을 바로 본다는 것일까? 저곳의 스님들은 붓다의 눈처럼, 세상을 제대로 보고자하는 수행자들이 모여있는 선원(禪院)이라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저곳의 주지 스님은 정말 부처님의 마음으로, 오갈 데 없는 힘없는 노인들을 봉양해 주고 있을까, 아니면 돈을 준 사람만 가두어 놓고 있을까. 계절은 끊임없이 우리를 상념으로 이끈다.

계속해서 절간의 문 앞에는 노란 은행잎들이, 산장의 여인처럼 떨어져 쌓여가고, 시름 잊은 듯한 아저씨만 은행잎을 쓸고 있다.

(’한국 순교복자 성직수도회‘. 촬영=윤재훈)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촬영=윤재훈 기자)

조금 더 오르자 복자교라는 작은 다리가 나오고 건너편에 천주교 양식의 자그마한 성당이 하나 보인다.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655호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이다.

이곳은 ’한국인 최초로 내국인 수도자를 위한 남자 수도원‘으로 지어졌으며, 한국 최초로 한국 조각가들에 의해 성당 외벽에 ’한국 순교 성인 12인‘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운 건물이 설치되면서 유대철 성인, 샤스탕 신부 상은 없어지고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외부에 있는 모습은 모조품으로 원형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문을 잠그는 걸쇠 하나도 옛 시절 사용하던 동으로 ㄱ자 비슷하게 걸게 돼 있어, ’지나온, 그리고 지켜온‘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사람을 잘 따르는 개. 촬영=윤재훈)
(사람을 잘 따르는 개. 촬영=윤재훈 기자)

마당에는 온통 하얀색으로 십자가를 들고 서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며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 동상이 서 있다. 서양종인 듯한 밤색 털의 개도 한 마리 있는데, 개집도 성당 양식을 닮은 듯하다. 이 층으로 된 개집은 망루까지 있어 3층으로 보이는데, 위에는 하얀 십자가까지 빛난다. 이름표에는 둥이라고 쓰여 있는데, 사람을 잘 따른다. 성당 안은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보이지 않고 적막하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인가, 오색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촬영=윤재훈)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스테인드글라스 창인가, 오색물감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1946년 개성에서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창설한 '방유룡 신부'는, 곧이어 남자 수도회를 창설하려다가 6.25 전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휴전 후 자신이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제기동 본당에서 5명의 회원과 함께 이 수도회를 열고, 1956년 12월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창설 다음 해인 1954년 5월 명동 성당의 부속 건물을 빌려 임시 수도원으로 사용하다가, 55년 7월 이 건물을 건립하였다.

이후 제주에 밀감농장, 피정의 집, 농장, 공원묘지, 수많은 분원을 설립한다. 1987년 9월에는 순교자 기념 성당까지 완공한다. 그 후 90년 이천 분원에 성안드레아 신경정신과 병원을 개원하고, 93년에는 정신지체자들을 위한 양주 인지의 집을 인수하였다. 신학원도 개원하는 한편, 본당 사목, 교육사업, 출판사업 등도 전개하고 있다.

현재는 총장 신부 방학길(마르첼리노)과 39명의 신부, 수사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하늘과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온,
예수님의 정신이 계승된 '성당'.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평화의 세계를 갈구하는 '성자'.
그런 '성지'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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