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건희의 산책길㊵] 연극 ‘바냐 삼촌’…인생은 끝없이 지속되는 일상

천건희 기자
  • 입력 2022.05.09 17:29
  • 수정 2022.05.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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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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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천건희 기자] '연극은 시야의 확장'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정통 연극을 만났다. 지난 4월 28일, 안똔체홉극장에서 연극 <바냐 삼촌>을 관람했다. 안똔체홉극장(극장장 정인범)은 창경궁 동쪽 담벼락과 마주한 곳에 있다. 러시아 리얼리즘의 거장 안똔 체홉의 작품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고전의 작품을 상연하는 소극장이다. <바냐 삼촌>은 1899년에 출판된 안똔 체홉의 4대 장막극 <갈매기>, <바냐삼촌>, <벚꽃동산>, <세자매> 중 하나로, 연출가 전훈이 직접 구어체로 번역해 체홉 특유의 문학적 향기를 담아 무대에 올렸다.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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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은 성균관대학교 입구 골목 안, 노란색의 극장 안내판과 함께 안똔체홉극장의 레퍼토리 공연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극장 입구부터 로비로 이어지는 붉은색 벽은 연극에 대한 기대감으로 마음을 들뜨게 한다. 로비는 카페형 서재로 안똔 체홉의 책들이 비치되어 있고, 전훈 연출가가 직접 바리스타가 되어 커피로 관객들을 맞이한다. 30석의 소극장인데, 객석 의자는 영화관 의자여서 장시간 연극 관람도 편안하다.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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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러시아 시골 저택, 목조건물에 여러 개 창문이 달린 거실의 내부와 외부다. 사모바르(물이 끓여지는 러시아식 주전자)와 차세트가 놓여있다. 기타 연주와 함께 연극은 시작된다.

바냐는 누이동생의 딸 소냐,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영지를 지키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 그는 평생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 집의 빚을 갚았고, 도시에 사는 죽은 누이의 남편인 저명한 세레브라코프 교수의 연구 활동이 마치 자신의 성공인 듯 여기며 생활비까지 지원했다. 그런데 통풍을 앓고 있는 교수가 퇴직하고 젊은 새 아내 옐레나와 함께 시골로 내려오면서 바냐삼촌의 일상은 깨지기 시작한다.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늙은 교수의 통증 호소와 밤새 글을 쓰는 불규칙적인 생활로 부지런하고 규칙적이었던 시골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진다. 바냐와 그의 친구인 시골 의사 아스트로프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새 아내 옐례나를 사모하기에 이른다. 교수의 딸 소냐는 의사를 오랜 시간 짝사랑하고 있다고 옐례나에게 말한다. 옐례나는 시골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고, 소냐를 향한 의사의 진심을 확인하려다 도리어 고백을 받는다. 이 모습을 본 바냐는 상처를 받는다.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그런데 교수는 시골 영지가 수익이 적다며 이곳을 팔자고 제안을 한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왔던 바냐는 자신의 지난날들이 모두 부정당하는 모욕감을 느끼며 분노에 차서 교수를 향해 총을 쏜다. 총알은 빗나갔지만,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시골을 떠나자는 옐례나의 권유로 교수 부부는 마을을 떠난다. 소냐가 바냐삼촌을 위로하고, 망가졌던 일상을 회복하면서 연극은 끝난다.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바냐삼촌>에 나오는 인물들의 일상과 갈등은 100년이 넘는 시공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배우들의 너무나 자연스런 연기와 가슴에 와 닿는 대사들은 인터미션까지 있는 3시간의 무대를 계속 몰입하게 만들었다. 세레브라꼬프역을 맡은 최기창 배우는 유명 교수였다라는 이유로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여전히 성공을 갈망하는 뻔뻔함과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바냐역을 맡은 조환 배우는 엘레나를 향한 사랑의 마음, 교수에 대한 실망, 자신이 과거에 열심히 일을 한 것에 대한 후회 등 다양한 감정을 실감나게 연기하였다. 아스트로프(김진근 배우)는 의사로서 생명을 살리지 못한 과거로 죄책감에 알콜중독이 되었지만 숲을 사랑한다. 옐레나의 사랑을 갈구하다 포기하는 감정 변화를 잘 전달했다. 지성을 향한 동경으로 결혼한 옐레나(이음 배우)는 용기 없는 선택이었다는 후회를 하면서, 바냐와 의사의 사랑 고백에 흔들리나 현명하게 대처하는 매력을 보여주었다.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사진=안똔체홉극장 제공

무대 위 창문을 하나하나 닫으면서 바냐 삼촌을 위로하며 다짐하는 쏘냐(조민경 배우)의 대사는 마음속에 큰 울림을 준다.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은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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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똔체홉극장은 공연과 학술을 동시에 진행하는 문화공간으로 안똔체홉학회(회장 전훈)를 운영한다. 안똔체홉학회는 안똔 체홉의 작품과 관련 문학을 연구해 그 결과물을 발표하는 일을 하기 위한 순수단체로서, 2014년 체홉 서거 110주년에 창립되었다고 한다. <검은 옷의 수도사>, <안똔체홉 4대 장막전> 등을 출간했고, <숲귀신> <잉여인간 이바노프> 등을 국내 초연하고 체홉작품의 오디오북 제작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니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인생은 끝없이 지속되는 일상이 있을 뿐이라는 것과 ‘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하는 연극 <바냐삼촌>은 안똔체홉극장에서 5월 26일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5월 13일부터는 안똔 체홉의 <벚꽃동산>이 6월 11일까지 서로 다른 요일에 무대에 오른다니 다시 한 번 방문해야겠다.

집에 오는 내내 옐레나와 아스트로프의 대사가 마음속에 되새겨진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건 강도짓이나 화재가 아니라
미움이나 증오같은 사소한 것들이잖아요. / 옐레나
인간은 모두 아름다워야 합니다. 마음도,생각도... / 아스트로프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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