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노동자, 돌봄이 필요하다③] 백조가 되기 싫은 오리... 17년 차 돌봄 노동자 ’은총‘ 이야기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5.12 15:48
  • 수정 2022.05.1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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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저보고 효녀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나한테 와주셔서 오히려 제가 은총을 받고 살았어요. 어머니가 살던 세대에는 남녀 차별 많았잖아요? 아들은 상급학교 보내고 우리 여자들은 공장 가고... 내가 그중에 속한 사람인데 우리 엄마가 나한테 못해준 것 해주려고 이렇게 오셨나 싶을 정도로 나한테는 은총이었어요. 그때 싱글맘이 되고 사업도 실패해 사는 게 너무 버거웠거든요. 어머니로 인해 제가 다시 살아나갈 힘을 얻었어요. 그게 은총이 아니고 뭐겠어요 - 은총(돌봄노동자)

(돌봄노동자, 은총. 촬영=고석배 기자)

기저귀 100개로 시작한 요양보호사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은총(61) 씨가 요양보호사가 된 계기는 돌아가신 어머님 때문이다. 가족 요양을 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게 되었다. 가족 요양은 부모, 자녀, 형제자매에 한해 가족이 직접 돌볼 경우 돌봄 급여가 인정되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는 1일 1시간, 1달 20일을 인정해 주지만 중증이나 치매일 경우 1일 1시간 30분, 1달 30일을 인정해 준다. 그녀처럼 많은 요양보호사들이 이렇게 시작한다. 

“기자님! 섬망이라고 아세요? 어머니가 수술 후 깨어나 난폭해지셨어요. 오빠네가 모시다 요양원에 가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는데 자신은 없지만 내가 한 달만 모셔보고 결정한다고 했어요. 오빠가 엄마 살림을 다 갖고 오셨을 때 겁이 났어요.

엄마 음식 처음 차리면서 부엌에서 눈물을 비 오듯 흘렸어요. 기저귀를 100개 사놓았어요. 이것만 다 쓰시고 돌아가셔도 좋겠다 했어요. 그런데 그 100개의 수십 번이 되도록 6년을 더 산 거예요. 얼마나 감사해요.”

평화시장 시다의 꿈

‘은총’은 대전의 변두리에서 8남매 중에 7번째로 태어났다. 오빠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해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위로 언니 둘은 공장에 가 오빠들 학비를 벌어야 했다. ‘은총’도 초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 다녔다. 부모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집안을 도와야 한다 생각했다. 그 시절에는 그게 당연했기에 부모님에게 섭섭함은 없다고 한다. 단 시대의 잘못된 역사에게는 섭섭해한다. 그녀는 전태일이 산화한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이미 자리 잡고 일하던 언니의 시다가 된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산 꼭대기에 집들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감탄사를 연발했다가 아버지에게 촌티 내지 말라 혼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한남동과 창신동 달동네였다. 어린 나이에 아침 8시부터 하루 12시간 일을 했다. 거기다 야근이 있으면 서너 시간 더 일했다. 쉬는 시간이라고는 집에서 싸온 찬 도시락을 먹는 시간뿐이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요즘은 방광염이라고 하는 ‘오줌소태’에 걸리고서야 다시 대전 집으로 돌아왔다.

대전에서 다시 공장을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중학교 과정을 합격하고 대입 검정고시에 도전했지만 정규 과정을 겪지 못한 그녀에게 영어와 수학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때 공순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하적인 말이에요? 스스로도 자부심이 없던 시절이었잖아요. 대입 검정고시를 포기하고 다시 공장으로 가는데 진짜 많이 절망하고 방황했어요. 결혼하고 나서 꿈을 꾸는데 초등학교 교실에 나 혼자 남아 수학 문제를 풀고 있고 친구들은 다들 중학교에 간 거예요. 꿈에서 깨니 막 화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소리쳤어요. 인생이 인수분해만 있냐! 인생이 인수분해다!”

(생전의 어머니와 함께. 사진=은총제공)

백조가 되기 싫은 오리

남자들이 군대 두 번 가는 꿈을 꾸듯 그녀는 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꿈에 시달렸다. 무리에 합류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자신의 잔상이 너무 아팠다. 악몽에서 벗어나가 위해 그녀는 결심했다. 자신이 오리임을 인정하고 오리가 되어 살기로 작정했다. 백조를 포기하고 오리답게 종종걸음으로 열심히 살면서 어느 순간 그 악몽을 꾸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는 특별한 사람이야, ‘나는 백조야’라는 의식을 갖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어요, 그런데 나는 이웃들, 같은 오리들 하고 사는 걸 좋아해요. 백조가 되고 싶지 않아요.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상을 좋아해요. 백조가 되는 걸 성공하는 거라 착각해요. 그런데 저의 관점은 더불어 사는 게 좋은 거지 나 혼자 잘나가는 성공한 일인자가 바람직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야 말하지만 제 아들이 0.5% 전교 1,2등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특별히 심화반을 만들어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우대하는 시스템을 만든 거예요. 그걸 익명으로 고발해 가지고 MBC까지 나왔었어요. 내 아들이 대접받지만 이건 아니다 생각한 거예요. 그냥 똑같이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그게 맞는 사회잖아요.”

자존감 강한 요양보호사

‘은총’은 어머니 때문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지만 직업으로 요양보호사가 되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용사가 되려고 미용을 배웠다. 체질에 맞지 않았다. 베이비시터를 했는데 아이를 책임진다는 게 보통 중압감이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으리으리한 집에 입주해 종일 어르신을 돌보게 되었다.

“요양보호사라면 보통 사회적 계층이 낮다는 인식이 있어서일까 움츠러들게 돼요. 더군다나 잘 사는 집에 종일제 입주로 들어가면 더 하지요. 그런데 저는 어깨 딱 펴고서 ‘호칭은 뭐로 할까요? 하면서 저는 ‘은총님’이라고 불러주세요‘하니 저처럼 당당한 요양보호사 처음 보았대요. 외국에 있는 딸을 위해 어르신 페이스북 계정도 만들어 드렸어요.

한번은 어르신 변이 하도 이뻐서 사진을 찍어 뉴스피드에 올려주었더니 그것조차 너무 고마워 하더라구요. 나중에는 제 전용으로 그댁 사위가 노트북도 갖다주었어요.”

(자신의 캐릭터가 '오리'로 남고 싶다는 은총. 촬영=고석배 기자) 

노인 돌봄은 자기 아기를 돌보듯

첫 인연이 좋아 직업적인 요양보호사가 되었지만, 서울사회서비스원(이하 서사원)에 처음 공채 면접에서는 떨어졌다고 한다. 어르신 돌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다‘는 답변을 면접관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다음 공채 면접에서도 똑같은 답변을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는 자기 아기가 말을 안 해도, 무엇이 불편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저절로 알아요 그런데 어르신들이 요양보호사를 부를 때는 불편하기 때문에 간병하게 하고 돌봄을 받는 거거든요. 말을 안 해도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가 불편한지 헤아릴 줄 아는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이 내 아기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어요 그리고 합격했지요”

공채 합격, 1년 반만의 정년퇴직

재수하며 58세에 서울시 공채로 들어갔지만, 그녀 인생에 4대 보험 적용되는 정규직은 1년 6개월에 불과했다. 서사원은 만 60세가 정년이었다. 요양보호사는 국가에서 노노케어 직종으로 분류하며 중년 이후의 은퇴자에게 적극 권장하면서 실제로 제도는 교육공무원의 65세보다도 짧다.

"요양보호사 중에 사십 대 후반이면 젊은 편이어요. 그 정도 나이는 되어야 어르신들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고요. 물론 젊은이들이 공감대가 없다는 말은 아니어요. 그런데 아이를 키운 경험이라든가 삶의 연륜이 어르신을 케어할 때 많이 도움이 되거든요. 간혹 치매에 걸리신 경우 옛날 추억 얘기를 하고 들으면, 그때 맞장구쳐주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대체로 50대중반 요양보호사들이 제일 많은데 60 되자마자 정년퇴직이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일본은 70세까지라는 말도 들었는데 실제 70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들도 많거든요. 우리도 70세까지 정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꿈같은 얘기지만"

그녀는 정년 이후 촉탁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해마다 재고용 심사를 받아야 하기에 불안하다. 그나마 63세가 되면 촉탁직 자격도 사라진다. 서사원 노동조합은 현재 65세까지의 정년 연장과 정년 후 3년의 촉탁직 기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도 서사원은 노동조합이라도 있기에 목소리라도 낼 수 있다고 한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공공성 확대‘라고 그녀는 말문을 연다.

(평화의 십자가를 다른 은총. 사진=은총 제공)
(평화의 십자가를 다는 은총. 사진=은총 제공)

요양 서비스의 질적 개선은 ’공공서비스 확대‘

“서울시 외에는 아직 공공서비스가 열악해요. 민간에서는 힘든 대상자는 받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특히 돈의 가치로 일을 따지는 경우가 많아요. 이익을 창출해 센터와 요양보호사가 지분을 나눠 갖는 형태이니 당연한 일이죠. 저희 같은 경우는 요양등급이 나오지 않아도 긴급하게 다쳤다든가 수술했다든가 갑자기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동사무소에서 센터로 연락이 올 경우 무조건 파견을 나가거든요. 민간의 경우는 아무래도 힘들지요.”

돌봄서비스의 공공성 확대는 문재인 정부의 중점사업이었다. 최근 법령이 발효되어 지자체마다 공공 돌봄 서비스가 의무화되어 그나마 발판은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공서비스가 확대되어 반 공무원화 되면 과연 서비스의 질이 좋아질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수선한 어르신 방을 정리한 모습. 사진=은총 제공) 

요양 서비스의 기본은 ’존엄‘

“기본적으로 사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공공서비스의 경우도 복지부동인 경우가 많아요. 매뉴얼에 철저하니까 오히려 융통성이 없을 때도 있고요. 한번은 80대 노부부의 집에 서브로 간 적이 있어요. 메인을 도우려 서브로 갔는데 아무것도 하지말라는 거예요. 80대 할머니가 돈 벌러 일하러 나가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대요. 센터에서는 저희보다 대상자들의 의견을 우선하거든요. 방에 들어가 보니 어두침침한 데서 침대도 없이 할아버지가 고목처럼 누워있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 했지만, 세수라도 해드리고 싶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어르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우리가 찾을 필요가 있거든요.

그게 존엄케어라고 생각하고요. 겨울인데도 따듯한 물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우고 수건으로 세수를 시켜드렸어요. 그리고 손을 닦아드리니 회색 물이 나올 정도였어요. 발을 닦으려 하니 메인 요양보호사님이 왜 긁어부스럼 만드냐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누룽지처럼 때가 낀 발을 따듯한 물에 불리면서 닦아드렸어요.

그런데 메인요양보호사님이 화를 내는 거예요. 보호자가 우릴 부른 이유는 혼자 돌아가실까 봐 그것만 지켜봐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설령 돌아가신다 해도 ’염습‘이란 예가 있는데 아직 살아계신 분이 잖아요. 어떠한 생명도 존엄하지 않은 생명은 없어요. 그런데 센터에서는 제게 칭찬은 하지 않고 같이 파트너로 가시는 분들 힘들겠다고 하더라고요.”

(발의 굳은 때를 더운물에 담가 씻어드림. 사진=은총 제공)  

은총은 단 하루를 살아도 ’존엄‘하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요양보호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도 ’존엄‘이라고 말한다. 어르신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요양보호사들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또한 필요하다. 간혹 요양보호사를 하녀 취급할 때는 속도 많이 상한다. 아무리 소변과 대변을 받아 내지만 평상시에는 바자마라도 입고 예를 갖추어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은총님은 요양보호사로서 가장 아쉬운 점을 토로한다.

거리의 카피라이터

“저는 서사원 들어올 때까지 퇴직금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퇴직금을 받으려면 1년을 넘겨야 하는데 한 센터에서 1년을 있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어르신이나 보호자가 바꿔달라 하면 그다음 날로 일을 잃게 돼요.

어르신과 사이가 좋아도 돌아가시면 또 다른 센터를 찾아봐야 하고요. 그래서 광화문 가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청원한 적도 있어요. 건강보험처럼 직장을 그만두면 직장에서 지역으로 자동으로 넘어가듯 요양보호사도 퇴직금 적립을 국가가 관리해달라고”

(인도 여행중에도 사회적 관심을 놓지 않는 은총. 사진=은총 제공)
(인도 여행중에도 사회적 관심을 놓지 않은 은총. 사진=은총 제공)

그녀는 1인 시위에도 주저함이 없다. 각종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자신이 손수 디자인한 피켓을 들고 광화문에 홀로 나선다. 1인 시위 하는 날은 옷도 단정하고 정갈하게 입는다. 자신의 뜻이 한 사람의 시민에게라도 더 어필되고 세상이 바뀔 수만 있다면 피하지 않고 일부러 사진 찍히려 한다. 그녀가 피켓에서 쓴 구호는 여느 단체의 구호보다 자유롭고 참신하다. ’사드 뽑고 평화 심자‘, ’우리가 칼잡이다‘등은 은총이 히트한 구호이다. 어쩌면, 그때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으면 유명 카피라이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은퇴를 준비하고 인생이모작을 맞는 사람들에게 은총은 이런 말을 남긴다.

(환경보호를 위해 은총이 작사, 작곡한 노래 악보와 돌봄개선제안 우수상장) 

가장 큰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안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것

“제가 뭐 살았다고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이렇게 환갑이 넘게 살아오고 보니까 인생의 의미는 ’사랑‘이라고 봐요. 당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서 다시 한번 사랑하기를 바라요.

하다못해 꽃이라든가 자연보호도 사랑이에요 누군가 한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잘 되고 나한테 보람을 주고 그래서 좋지만 난 가장 큰 사랑은요 가난한 한 사람을 돕는 것보다 그 가난한 사람을 안 만드는 구조를 만드는 게 더 큰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배고팠던 경험 때문에 그녀는 어려운 살림에도 20년간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월드비전 등에 후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상에 가장 가난한 나라 북한을 위해 틈나는 대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수입 십분의 일은 하느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사회단체나 이웃을 위해 쓰고 있다. 그녀의 임대아파트 창 밑에는 장미허브가 분갈이 되어 만발하고 있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여 복이 있나니...‘ 그녀는 은총 받은 게 틀림없다.

(식물을 사랑하는 것도 인류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은총의 기도 모습. 사진=은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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