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딴따라다" 송해, 고향 땅 못 밟고 잠들다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6.08 16:17
  • 수정 2022.06.0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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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혈단신 실향민으로 순회악단에서 노래와 사회
라디오 방송 '가로수를 누비며'로 빛을 보고 TV방송 '전국노래자랑'으로 인생 황금기 맞아
생애 마지막 전국노래자랑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하고 싶어 해

(2015년 대한민국을 웃게한 100인 선정 당시 송해. 사진= 뉴시스 제공)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전국노래자랑의 송해가 눈을 감았다. 1927년생으로 향년 95세이다.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실향민이다. 어려서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였다. 22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해주예술전문학교에 들어가 클래식인 성악을 공부했다. 혈혈단신 피난 와서 먹고살기 위해 전공을 살려 ‘창공악극단’이란 순회 악단에서 가수를 했다. 입담이 출중해 순회악단의 사회를 본 경험이 훗날 전국노래자랑 MC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본명은 송복희이다. 1.4후퇴 때 누이와 어머니를 두고 재령에서 연평도로 연평도에서 미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실향민으로 바닷길을 건너면서 다시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결심으로 바다 해(海)자를 예명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TV라는 매체가 생기면서 그는 노래보다 코미디언으로 더 두각을 나타냈다. 배삼룡 구봉서가 그와 함께했던 멤버이다. 처음엔 조연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주로 똑똑한 척하는 고학력자를 풍자하는 역할을 했다.

송해가 전국노래자랑 이전에 대중의 아이콘이 되기 시작한 것은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운전자들의 스타가 되었다. 지금도 교통통신원을 조직하여 그 제보를 교통정보 방송시스템에 활용하고 있는데 그 원조가 송해의 ‘가로수를 누비며’였다. 라디오로 인기가 오르던 1986년, 아들이 뺑소니 오토바이사고로 사망한다. 송해는 그 충격으로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했다.

(종로 송해길에 놓여진 시민들의 조화. 촬영=고석배 기자) 

사람을 만나지 않고 아무일도 하지 않으니 더 괴로웠다.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을 잊기 위해 1988년부터 마이크를 잡은 프로그램이 ‘전국노래자랑’이다. 그때 송해의 나이 61살 환갑이었다. ‘전국노래 자랑’은 송해의 인생이모작이었다. 짧을 줄 알았던 이모작 농사는 34년이나 계속되었다. ‘전국노래자랑’은 국내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프로그램을 기록했고, 최근에는 기네스에서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부문에 오르기도 했다.

송해는 처음부터 스타가 아니었다. 구봉서, 서영춘, 곽규석 등 1진에 가려져 양념 역의 2진으로 늘 만족해야 했다. 1년 선배 구봉서가 떠나고 송해가 코메디언의 최고 선배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만 1인자가 아니라 현역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1인자가 됐다. 하지만 그는 스타라는 말보다 스스로 '딴따라'라 했다. 전국노래자랑으로 지방을 가면 그 전날 대중 목용탕부터 갔다. 스타로 추앙 받기 보다 대중의 곁에 있는 딴따라가 되는 걸 더 좋아했다. 후배 연기인 권병길은 그를 “늦게 사랑을 받은 대기 만성의 코메디언 배우이시다. 이제는 건강을 챙기게 하시는게 도리다”라고 돌아가시기 하루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후배의 걱정에도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전국을 돌며 그가 만난 사람은 천만 명 가량 된다고 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코로나로 중단되어 그의 모습을 자주 보지 못했던 지난 2년의 팬데믹을 야속해 한다.

(2003년 평양 전국노래자랑. 사진=KBS 화면캡처)

송해는 생애 마지막 전국노래자랑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하고 싶어 했다. 2003년 광복절에 평양 모란봉공원 야외무대에서 진행한 ‘전국노래자랑’은 송해에게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고향을 지척에 놔두고도 못 가고 다시 생이별해야 하는 심정에 하염없이 울었다. 그토록 애달퍼하던 송해의 여동생이 아직 생존해 있는 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2019년 M방송국 특집 '송해야 고향 가자'에서 그는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 쪽으로 가기 위해 남북체육교류협회의 남북 응원단으로 합류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북미관계가 풀어지지 않고 게다가 코로나의 창궐로 본인마저 병상에 누워야 했다. 그리고 그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송해는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KBS 연예대상 공로상, 백상예술대상 공로상, 한국방송대상 공로상,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종로 낙원 상가 옆에는 송해길이 있고 대구 달성군에도 송해공원이 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그의 일대기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송해 1927'가 개봉하기도 했다. 대기만성 늦깎이 스타의 첫 주연 작품이었다.

동년배 스타들이 모두 하나둘 스크린에서 사라지며 은퇴 할 때 그는 인생의 가장 큰 슬픔을 딛고 61살에 다시 시작했다. 그의 전성기는 환갑 이후부터 였다. 그는 사생활이 바르기로 유명하다, 어쩌면 스타가 아니었기에 구설수가 없고 네티즌에게 가장 안티 없는 연예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꾸준함’이 그를 사랑 받는 ‘송해 오빠! 송해 형님!’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장례는 코미디언협회 희극인장으로 치른다. 그의 명복을 빈다. 그는 이제 꿈에서조차 그리웠던 어머님을 만나러 우리 곁을 떠난다.

(송해 평전. 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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