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학기행④] 김수영 시인은 왜, 박인환 시인을 그리 혹평했나? 4

윤재훈 기자
  • 입력 2022.07.20 14:17
  • 수정 2022.09.1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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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은 왜, 박인환 시인을 그리 혹평했나?

 

불안한 언덕에서
나는 음영처럼 쓰러져 간다
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
나는 죽어간다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年代)을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

- ‘1950년의 만가’, 박인환

(명동의 모던 보이, 박인환 시인)
(명동의 모던보이, 박인환 시인. 사진=임응식사진아카이브 제공)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박인환의 생전에 김수영만큼 애증의 관계가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김수영은 박인환의 시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지금 이 시국에, 그런 시나 쓰냐고, 핍박했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었을 때도 나는 장례식에 일부러 가지 않았다. 그의 비석을 제막할 때는 망우리 산소에 나간 기억이 있다.

인환! 너는 왜 이런, 신문 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지? 이 유치한, 말발도 서지 않는 후기. 어떤 사람들은 너의 ‘목마와 숙녀’를 너의 가장 근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눈에는 ‘목마’도 ‘숙녀’도 낡은 말이다.

네가 이것을 쓰기 20년 전에 벌써 무수히 써먹은 낡은 말들이다. ‘원정(園丁)’이 다 뭐냐? ‘배코니아’가 다 뭣이며 ‘아포롱’이 다 뭐냐?

- ‘박인환(1966. 8.)’, 김수영 산문

그러면서도 김수영은 박인환이

야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

라고 말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명동 주점. 명동 백작 중에)
(시인 김수영, 박인환 중심 드라마 '명동백작' 중에)

김수영은 왜 이렇게 그의 산문 ‘박인환’과 ‘마리서사’ 등에서 이렇게 힐날하게 그를 평가절하 할까?

양복이 잘 어울리는 멋쟁이, 자기보다 5살이나 어리지만 등단 시기도 비슷하고, 시집도 먼저 내고, 영화평론가협회를 발족해 영화 평론까지 쓰는 다양한 그의 재주와, ‘신시론’ 동인을 만들 때 자신을 빼고, 그 후에 합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합류하지만, 그 앙금이 깊게 남았을까?

여기에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뒤 어느 날 박인환이 보여주는 시를 읽게 되었는데, 작품에 쓰인 어색한 낱말을 지적하자 박인환이

이건 네가 포로수용소 안에 있을 동안에, 새로 생긴 말이야.
'박인환’, 김수영

라고 무안을 준 적이 있는데, 김수영은 박인환의 그런 언행을 싫어하면서도 시어에 대한 열정만은 인정했다.

박인환 시인의 시는 과연 김수영 시인의 우려처럼 그러기만 할까? 새로 발굴되어 경향신문 1950년 5월 16일 자에 실린 그의 작품을 한 편 감상해보자. 한국전쟁 발발 한 달여 전에 전쟁과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듯한 정조다.

불안한 언덕 위에로
나는 바람에 날려간다
헤아릴 수 없는 참혹한 기억 속으로
나는 죽어간다
이 행복에서 차단된
지폐처럼 더럽힌 여름의 호반
석양처럼 타올랐던 나의 욕망과
예절 있는 숙녀들은 어데로 갔나
불안한 언덕에서
나는 음영처럼 쓰러져 간다
무거운 고뇌에서 단순으로
나는 죽어간다
지금은 망각의 시간
서로 위기의 인식과 우애를 나누었던
아름다운 연대(年代)을 회상하면서
나는 하나의 모멸의 개념처럼 죽어간다.
- ‘1950년의 만가’, 박인환

('박인환 Ⅱ-그 세월이 가면’ 준공 박인환 거리의 조형물 ‘시인의 품으로’. 사진=인제군청 제공)

이홍섭 평론가는 말한다. 박인환 시인의 감상주의와 허무적 제스처를 단지 시적 한계로만 바라보아야만 될까. 우리 시사에서 전란 중의 피폐함과 전후의 상실감을 박인환처럼 잘 형상화한 시들이 있었을까?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시대를 살다 간, 전쟁이 끝난 지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불행한 시인에게,

넌 왜, 그렇게 허무해, 
너의 시는 너무, 감상적이야

라고 몰아붙이며 자꾸 시어를 문제 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시인 박인환 작고 60주기를 앞두고 새롭게 발굴한 시 2편을 포함, 모든 작품을 수록한 '박인환 全시집,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

특히 그의 시에 나오는 ‘검은 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검은 강’, ‘불행한 신’, ‘검은 신이여’ 등이다. 그에게 있어 신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었을까?

김수영 시인도 그가 일본말에 서툴고 우리말조차 잘 구사하지 못하였지만, 다방면에 관련된 용어들을 멋지게 구사하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해방 후 그가 학교를 그만두고 종로구 낙원동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고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만들었을 때, 김수영도 수입한 책들을 구경하거나 헌책을 팔려고 그곳을 드나들었다. 훗날 김수영의 부인이 된 김현경의 추억에 따르면 그곳에서 박인환이 사주는 짜장면을 어울려 먹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김수영은 박인환이 일본의 전위 시인들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습작 시를 읽기도 했다. 그가 일본말에 서툴고 우리말조차 잘 구사하지 못한다고 여기면서도, 식물·동물·기계·정치·경제·수학·철학·천문학·종교와 관계된 용어를 멋지게 쓰는 작품들을 보면서 흥미를 가졌다. 여기에 영화 평론를 하며, 영화 평론협회까지 만들어 한국 영화에도 큰 애정을 보이는 영화인 재능까지 보게 된다.

맹문제 안양대 교수는 김수영이 박인환 관련하여 다섯 편의 산문과 한 편의 시에서 호명한 것은 그를 좋아했었던 듯한데, 이런 폄하 발언들은 아마도 ‘라이벌 의식’이 아니었나 진단하기도 한다.

또한 김수영은 좋아하는 책을 보고 나면 집에 두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흉내 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었으며, 마리서사에 그 책들을 팔러와 박인환의 시를 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박인환은 외국에 대한 지식도 많았으며 파격적인 시어를 즐겨 썼으니, 그런 것들이 김수영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김수영은 그가 마리서사를 만들 때는,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이 마리서사를 꾸며주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극장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화가였는데, 그로부터 진정한 전위 예술과 모더니즘, 세상을 진단하는 예술가의 양심 등은 배우지 않고, 겉멋만 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박인환이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단의 분위기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평론 ‘참여시의 정리’를 보면 잘 나타나는데,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 운동을 '평가절하'하기에 이른다. 4·19혁명 이후 소위 참여시가 정치 이념 내지 행동주의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면서, 박인환이 주도한 모더니즘 시 운동을 실패의 사례로 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수영은,

좌우 이념의 구별이 없고 글 쓰는 사람과 그 밖의 사람들의 
문명(文名)이 아니라 인간성을 중심으로 어울릴 수 있는 
마리서사를 마련해준 면에서는 박인환의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인정했다.
또한 새로운 시어의 사용에 대한 박인환의 열정도 인정했다.

명동백작 이봉구 소설가

故 朴寅煥의 詩碑를 세우며, 친구를 그리는 李鳳九 소설가의 애끓은 속삭임을 원문 그대로 감상해 본다.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린 詩人 朴寅煥이 저 세상에 살고 있는 곳 이름이 바로 忘憂里라. 서른한 살을 一期로 지난 三月二十四日 밤에 희리바람처럼 가버린 지 벌써 半年이 넘어섰다. 그 무덤 앞에 우리 가까운 친구들이 墓標나마 세워야 友情의 萬分之一이라도 이룩할 수 있다는 설운 追念 아래 各其 어려운 주머니를 털어 所聞도 없이 지난 二十三日날 忘憂里 그 묘지 앞에 詩碑를 세우고 돌아온지 사흘 째 되는 오늘(二十五日)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碑까지 『세워놓고 돌아갔으니 나를 보러오는 길이 어려울 게고 그대들의 발자죽 소리를 듣기는 점점 멀어져갈 것이니 이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으랴. 차라리 碑를 세우지 말고 자주 찾아와 보는 것을 나는 바랄 뿐인데』 이런 그대의 心情을 알고 있다는 듯 天心의 눈물인 양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寒食 날에 가서 때를 입혀놓고 왔기에 때가 살아 무덤을 盛裝 할 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때는 없고 알몸에 이름 모를 雜草가 대숲처럼 자라나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아무리 시름을 잊는 그 이름 그대로 忘憂里 墓地라 하더라도 어쩌면 들菊花 한 송이 볼 수 없는 不毛의 地帶라는데 우리의 눈시울은 한층 더 뜨거워 올랐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자주 와볼 것을 그러나 이것도 마음뿐이지 人生의 苦海 속에 절버덕거리며 사느라 너무나 경황이 없어 해가 뜨나 달이 지나 明洞 거리에서 우리는 술을 마시고 다시 醉해 그대를 생각하며 비틀거렸다.

무덤에 길길이 자라난 풀을 伐草하고 나서 碑를 세우고 우리는 그대가 生前에 좋아하던 「쪼니 워카」를 그대 무덤 위에 뿌리고 다시 碑에다 뿌려서 적셔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술은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이 돌아가며 마신 후 碑 앞에 서서 우리 碑文에 새긴 그대의 시 『세월이 가면』을 울면서 노래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수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람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그대 말대로 세월이 간다고 해서 그 사람 이름을 진정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누리는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 눈동자 입속은 우리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明洞을 떠나 죽어가 그대와 만나는 그 瞬間까지 우리 가슴속에 있을 것이다.
不幸하면서도 멋진 詩人의 一生을 마친 朴寅煥의 幽宅門前에 碑갈을 세우고 돌아온 우리 친구들 가슴속엔 寅煥 그대의 哭 인양, 가을비가 퍼붓고 뭇 벌레가 우짖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또 술을 마시고 醉해 허전한 걸음으로 그래도 살다 가야겠다는 데서 집으로 밤거리를 더듬어 가고 있다.

大槪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제 새삼스레 無常이니 虛無니 소리쳐 볼 興奮도 나지 않으나 너무나 아득하고 야속한 길인 것만 같아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一九五六年九月二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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