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2] 스포츠관: 쿠베르탱과 근대올림픽1...씨알이 된 ‘웬록 올림픽’, ‘자파스 올림픽’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07.29 16:05
  • 수정 2022.09.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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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관: 쿠베르탱과 근대올림픽1
               씨알이 된 ‘웬록 올림픽’, ‘자파스 올림픽’

ⓒ게티이미지뱅크

쿠베르탱, 평화의 길을 모색하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1백년의 시간이 걸렸다고들 한다.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이후 왕당파와 공화파, 그리고 시민들 편에 서서 영웅이 되었다가 스스로 황제가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이 복잡한 세력들이 뒤얽혀 1백년 가까운 세월을 혼란 속에서 지내야 했다. 주변국들과의 전쟁도 치러야 했다. 1백만 넘는 프랑스 남자들이 나폴레옹의 야망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어쨌든, 자신감 넘치는 두 번째 나폴레옹 황제(나폴레옹 3세)가 독일(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영국으로 망명한 뒤에야(1871년), 프랑스인은 민주공화국(제3공화정)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피에르 드 쿠베르탱(1863-1937)은 청소년기를 맞고 있었다.

쿠베르탱의 집안은 ‘남작’이라는 낮은 계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전통귀족에 속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었던 그는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화를 재건할 수 있는 길, 혁명이나 전쟁이 아닌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그는 그 길을 교육에서 찾고자 했다. 화가인 아버지와 음악가인 어머니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교육학을 공부하려고 영국과 미국에 유학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지식교육 뿐 아니라 청소년의 스포츠교육이 중시되고 있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다.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 슬로건처럼 스포츠는 인간의 몸뿐 아니라 건전한 정신에도 필수적이라는 데 크게 공감했다. 반복된 내전과 대외전쟁으로 지친 프랑스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에도 스포츠가 필수적이란 확신을 갖게 된 그는 스포츠교육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올림픽 부활 선도한 브룩스 박사의 ‘웬록 올림픽’

(윌리엄 페니 브룩스(William Penny Brookes)는 1809년 머치 웬록에서 태어나 ‘웬록 올림픽’을 만들었다. 사진=웬록올림픽 홈페이지)

영국에 머물고 있던 1889년, 20대의 청년 쿠베르탱은 런던에서도 300km나 떨어진 머치웬록이라는 시골마을을 찾아간다. 그를 초대한 사람은 윌리엄 페니 브룩스(1809-1895)라는, 당시 80세의 원로였는데, 평생을 대단히 열정적으로 산 사람이었다. 의사·약학자로서 열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지역의 치안판사로도 40년간이나 봉사했으며, 나중에는 스포츠인과 사업가로도 활약했다. 젊어서 치안판사로서 주정뱅이나 강도범, 지역 불량배들을 접하면서 그는 체계적인 체육교육과 빈민층에 대한 교육 지원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제도적 지원을 국가나 사회에 요청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서 농촌독서모임을 조직하고 책을 기증하여 여러 강좌와 도서관을 개설했다. 도서관과 강좌들은 개방적으로 운영되어 누구든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이 때문에 당시만 해도 사회계급을 중시하던 지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영향력과 뚝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40대가 되자 그는 독서모임을 한층 발전시켜 ‘올림피안 클래스’라는 강좌를 열었다. “웬록 지역과 인근 거주민, 특히 노동자들의 도덕적 신체적 지적 발달을 위하여 야외활동을 지원하며, 매년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운동경기의 기량과 지적 산업적인 학식의 진보에 대하여 시상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표방했다.

(1850년 웬록올림픽 제1회 대회는 육상 경기와 쿼츠, 축구, 크리켓과 같은 전통적인 컨트리 스포츠가 혼합된 경기였다. 사진=웬록올림픽 홈페이지)

1850년 10월 첫 모임에서 참가자들은 고리던지기 축구 크리켓 등 운동경기의 선수가 되어 경기를 가졌으며, 함께 먹고 토론하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 행사는 몇 년 안에 런던과 리버풀에서도 선수들이 찾아올 정도로 소문이 났다. 브룩스 박사는 외지인에 대해서도 개방과 평등의 원칙을 지켜 문호를 개방하였을 뿐 아니라, 경기가 있는 동안은 가난한 노동자들도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자신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지역 철도회사들을 설득해 무료승차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10년이 안 되어 브룩스 박사는 이 행사를 ‘웬록 올림픽’이라 이름 붙이고 행사 주기를 4년으로 변경했다. 영국 슈롭셔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열리는 ‘웬록 올림픽’은, 놀랍지만 1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때로는 개최지를 옮기기도 하면서) 이어지고 있다. 

전쟁을 멈추게 한 고대올림픽

그림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아테네 제우스 신전의 유적.
(고대 올림픽이 열렸던 아테네 제우스 신전의 유적. ⓒ게티이미지뱅크)

브룩스 박사가 지역의 스포츠 강좌에 ‘올림픽’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당시 그리스에서 발견된 올림피아 유적의 발굴 성과와 무관치 않다.

19세기에 그리스에서는 옛 신들의 언덕이라 불리던 아테네 올림피아에 대한 대대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독일인 고고학자에 의해 올림피아의 신전유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건축물에 새겨진 고대문자들이 해독되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 경기(고대올림픽)’의 전모가 하나둘 드러났다.

도시국가(폴리스) 시절 그리스인들은 4년마다 한 번씩 아테네에 모여 운동기량을 겨루었다.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일이었다. 경기는 달리기 한 종목에서 시작된 소박한 것이었지만, 규칙은 엄격했다. 무엇보다 경기가 열리는 동안 그리스의 모든 국가와 시민들은 분쟁을 멈춰야만 했다. 이 기간에 소송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어떤 도시국가가 다른 도시를 침략하는 경우 그리스 전체가 연합하여 응징했다. 한정된 시간이나마 완벽한 평화가 깃드는 기간이었다.

고대올림픽의 부활 ‘자파스 올림픽’

(자피온은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국립 공원으로 최초의 근대올림픽인 1896년 하계 올림픽에서 펜싱 경기가 열렸던 곳이다. 올림픽에 기여한 자파스형제의 이름을 따왔다)

아테네에도 웬록마을의 페니 브룩스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었다. 사업가인 에방겔리스 자파스(1800-1865)란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리스 독립전쟁에도 참전했던 그는 열렬한 애국자이자 박애주의자로서, 올림피아 유적의 명예로운 전통을 되살려 그리스에서 올림픽 제전을 부활시키고 싶어 했다.

먼저 국왕 오톤에게 올림픽 부활사업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자 국왕은 한동안 반응이 없다가 뒤에 조건부 승인을 회신했다. 자파스 자신이 소요비용을 전액 부담할 것, 올림픽과 함께 산업박람회를 겸하여 열 것이 조건이었다. 어쨌거나 1859년 11월에 아테네 중앙광장에서 처음으로 올림픽이란 이름의 스포츠대회가 열렸다(다른 경기들과 구분하여 ‘자파스 올림픽’으로 불린다). 고대 5종과 유사한 종목의 경기들이 펼쳐졌다. 모여드는 관중의 수도 계속 늘어나 최대 3만명에 이른 적도 있다.

이 경기에 웬록마을의 브룩스 박사도 찾아왔다. 그들은 올림픽 대회가 국제대회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 첫 단계로 자파스 올림픽과 웬록 올림픽의 프로그램들을 서로 공유하고 선수자격도 서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두 ‘미니 올림픽’이 개인이나 지역 차원을 넘어 명실상부한 국제 경기가 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파스는 비교적 이른 65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전 재산을 기부하여 앞으로도 올림픽대회가 계속 열릴 수 있도록 후원하는 기금을 만들었다. 영국의 브룩스 박사와 아테네의 자파스의 생애는 ‘세계평화를 촉진하는 장치로서의 올림픽대회’를 향한 쿠베르탱의 열망에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한 격려가 되었다.

1894년 국제올림픽 위원회 발족

(1896년 아테네올림픽 조직위원회. 사진=Bulgarian Archives State Agency)

에방겔리스 자파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년, 브룩스 박사의 웬록올림픽이 시작된 지 44년이 지난 1894년 마침내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가 프랑스 소르본대학 회의실에서 발족됐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러시아, 스페인, 스웨덴, 미국 등 아홉 나라에서 79명이나 되는 대의원들이 파리에 모였다. 2년 전 젊은 쿠베르탱이 국제 올림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후 사비를 써가며 각국을 직접 방문하거나 편지와 선언문, 신문 인터뷰 등을 통한 설득과 요청으로 성사시킨 땀과 시간의 산물이었다.

쿠베르탱이 ‘고대 그리스올림픽의 정신을 되새기며 스포츠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자’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올림픽 선언문’(1892년)의 친필 원고.
(쿠베르탱이 ‘고대 그리스올림픽의 정신을 되새기며 스포츠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자’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올림픽 선언문’ 1892년의 친필 원고)

IOC 창립총회에서 의결한 내용 중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1896년 첫 올림픽 경기를 올림픽의 고향 아테네에서 개최한다. ②향후 4년 간격으로 다른 나라의 도시들에서 돌아가며 대회를 연다. 이밖에도 1900년 두 번째 대회를 파리에서 개최하고 이후 미국의 도시(뉴욕 등)에서 세 번째 대회를 연다는 잠정계획도 정해졌다. IOC의 첫 위원장은 그리스인 사업가 디미트리오스 비켈라스가 맡기로 했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

(1896 아테네 올림픽에서 100미터 출발 모습. 우승자인 토마스 버크(왼쪽 두 번째)는 오늘날처럼 웅크린 자세로 출발을 준비한 최초의 선수였다)

그동안 ‘자파스 올림픽’이 열리던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대대적인 수리를 통해 확장되었고, 여기에서 미국과 호주를 포함해 14개국으로부터 241명의 선수들이 참가하는 공식적으로는 최초의 국제올림픽 경기가 열렸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미 자파스 올림픽을 통해 숙달된 운영 노하우와 조직위원장을 맡은 황태자 콘스탄틴의 지원 아래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국제올림픽의 성사를 꿈에도 그리던 페니 브룩스 박사는 안타깝게도 이 대회를 보지 못했다. 이미 86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첫 올림픽을 불과 넉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박람회의 여흥행사로 전락한 뒤죽박죽 파리올림픽

1900년 파리올림픽. 10월에 여자골프 대회 9홀 스트로크 경기에서 우승한 마가렛 에보트. 당시 만국박람회를 보기 위해 작가인 어머니 메리 애보트와 함께 파리에 왔다가 출전했다.
(1900년 파리올림픽. 여자골프 대회 9홀 스트로크 경기에서 우승한 마가렛 에보트) 

그에 비하면 1900년 파리올림픽은 모든 것이 거의 뒤죽박죽이었다. 당초 쿠베르탱이 두 번째 대회를 1900년 파리에서 열자고 제안한 것은, 그 해에 만국박람회(EXPO)가 파리에서 열리면서 세계 각국에서 더 많은 선수와 관람객들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국제적 잔치인 박람회에 더하여 20세기를 맞는 인류의 축제가 보다 성대하게 치러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순수한 바람이었을까. 가장 먼저 만국박람회 조직위원장인 알프레드 피카르의 문전박대에 부닥쳤다. 필시 제안을 환영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간 쿠베르탱에게 피카르는 큰 소리로 웃으며 조롱하듯 대답했다.

“전 세계의 최첨단 기술을 모아놓는 박람회에 고대 유적지에서 끄집어낸 스포츠대회를 접목하겠다니, 이 무슨 시대에 뒤떨어지고 우스꽝스러운 발상인가.”

쿠베르탱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의 독자적인 권한으로, 그 무렵 영향력이 있는 스포츠 관리자들을 선별하여 조직위를 구성하고 대회 종목과 일정을 계획했다. 다행히도 영향력 있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 팀들과 영국 아일랜드 스포츠협회들이 호응하여 계획은 착실히 짜여가는 듯했다. 뭔가 되어갈 조짐이 보이자 프랑스육상경기연맹이 돌연히 나서서 만국박람회 기간 중의 운동경기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운영권을 행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에 놀란 조직위원장 샤를 로슈포코 자작은 갈등이 커지는 것을 피하려고 서둘러 사퇴해버렸다. 게다가 일부 의원들은 쿠베르탱에게도 한때 육상경기연맹의 이사였다는 이유로 사퇴를 요구했다. 올림픽을 둘러싼 권한이 이권다툼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비워야 했다. 쿠베르탱은 파리 대회에서 손을 떼고 다만 국제위원회의 입장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이것을 ‘굴복’이라 표현하며 아쉬워 했다. 

이후 파리 올림픽은 만국박람회의 위임을 받은 새로운 위원회가 차지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들은 짜임새 있는 일정을 마련하지도 않았고, 전통적인 올림픽 종목을 존중하지도 않았으며, 특히 모든 대회에서 ‘올림픽’이란 명칭을 존중감있게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만국박람회의 흥미를 부추기기 위한 부대행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5월부터 10월까지 다섯 달 동안 여러 종류의 국제경기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매스컴들은 이를 ‘국제경기’니 ‘국제선수권대회’니 ‘파리박람회의 그랑프리’니 하는 명칭으로 보도할 뿐, 무엇이 올림픽 종목이고 무엇이 비 올림픽 경기인지 구분이 모호할 뿐이었다. 오죽하면 1900년 10월3일 파리에서 열린 골프대회 여자부 경기에 참가해 우승한 미국인 마가렛 에보트는 55년 뒤 78세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우승한 대회가 올림픽의 공식 종목으로 추인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7월에 조촐한 개회식도 열렸지만, 공식적인 개·폐회식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포 멀리 쏘기, 사람을 물에 빠트리고 구해내는 인명구조경기, 불을 붙인 농가에 출동하여 불을 끄는 소방경기, 푸들 강아지 털 빨리 깎기 등 요즘 말로 하면 ‘예능’에 불과한 흥미성 경기들도 이 스포츠 위원회의 인증아래 치러졌다. 후일 IOC가 이 산만한 경기 결과들을 취합하여 경기결과를 정리하였는데, 이런 흥미성 시합들은 모두 ‘비공식 종목’으로 분류했다. 물론 다음 올림픽에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쿠베르탱은 후일 이 대회를 회상하며 “이런 와중에도 올림픽이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이런 와중에도 스타 선수들은 배출되었다. 

큐레이터 & 도슨트=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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