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등이 굽도록 일만 하다 가려는가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08.02 15:34
  • 수정 2023.03.1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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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난주(暖姝)형 인간,
유수(濡需)형 인간,
권루(卷婁)형 인간이 있다.

고전 <장자> ‘서무귀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장자는 난주(暖姝)형 인간을 이렇게 설명한다. ‘소위 난주라는 것은 단 하나의 이론을 배워 그것을 자기 학설로 삼아 만족하는 사람이다.’ 마음에 드는 하나의 이론을 만나면 그것을 절대적 진리로 삼아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옳은 것이 없는 것처럼 신봉하며 매사를 그것 하나를 기준으로 재단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간혹 자신이 믿는 신념, 신조에 매달려 그 외의 것은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종교든 사상이든, 또는 어떤 지식에 관한 것이든, 한번 각인된 믿음에서 도무지 벗어날 줄을 모르는 사람이 이 유형에 속한다고 하겠다.

유수(濡需)형 인간에 대해서는 비유로 설명한다. 돼지의 몸에 붙어사는 이는 길게 자란 털 밑이나 사타구니 사이, 젖통 사이, 넓적다리 사이를 큰 마당으로 삼고 안전한 거처로 삼아 지내면서, 사람들이 돼지를 잡아 불에 구우면 그 털과 함께 타버려 죽게 될 줄을 모른다.

이처럼 자기가 정착한 구역 안에서 살고 또한 그 안에서 죽는(此以域進 此以域退; 차이역진 차이역퇴) 것으로 만족하는 유형이다. 일시적인 안락만 보장된다면 사는 동안의 품격이라든가 이후에 닥칠 일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걱정도 하지 않는다.

자기 신념에 도취되어 다른 일이나 진실에는 눈과 귀를 틀어막고 사는 난주형이나, 남들이 뭐라든 내 한 몸 안락하게 살 수만 있다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이대로 즐기며 살겠다는 유수형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다. 2천년 전 장자의 시대만 아니라 21세기까지 별 차이가 없는 것이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에 속하는 특성이 아닐까 싶다.

권루(卷婁)형 인간은 어떤 유형인가. 장자의 설명을 보자.
‘(옛날) 요임금은 순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등용하여 불모지를 맡겨 개척하도록 했다. 순은 거기서 귀와 눈이 어두워지도록 늙을 때까지 맡은 일을 다 하느라 돌아가 쉬지를 못했다. 이것이 '등이 굽도록 일만 하는' 권루형 인간이다.’

권루(卷婁)라는 말은 장자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한자의 뜻을 새겨보면 떠올릴 수 있듯이, 책이 말리듯 등이 굽은 모습을 나타내는 조어다. 오죽하면 어떤 번역에서는 ‘곱사등이’로 번역하기도 했다.
흔한 말로 ‘뼈 빠지게 일만 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젊어서부터 밭일, 부엌일로 등이 굽도록 일만 하던 평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우리네 대다수 부모, 조상들의 모습이다.

어쩌면 노동의 종류가 달라져 겉모습만 굽지 않는다뿐이지 지금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뼈 빠지게 일하는 사람은 일만 하고, 돼지털의 안락함에 안주하며 제 뱃속만 채우고 사는 기생충 같은 부류도 여전히 존재하며, 진보니 보수니 하는 사상적 편파나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자신과 다른 부류와는 말도 섞기를 거부하는 난주형 인간도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난주나 유수나 권루 같은 삶을 살지 않을 방도는 있단 말인가. 하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형 중의 하나로 살고 있다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질문을 화두를 꺼낸 장자에게 던져보기로 하자.

장자는 이 말 끝에 ‘그러므로(是以)’ 하면서 신인(神人)과 진인(眞人)이 사는 법을 이야기 한다. 신인이니 지인이니 진인이니 하는 명칭은 완성된 인간, 본연의 인간, 진실한 인간 등 보통사람들이 본받을 만한 인간상을 담은 개념이다. 뭐라고 했을까.

신인은 ‘아주 친한 사람도 없고 아주 소원한 사람도 없이’ ‘덕을 지니고 조화된 마음으로 천하의 이치에 순응한다(拘德煬和以順天下; 구덕양화이순천하)’고 하였다.
진인은 자기가 죽게 될 줄도 모르고 고기냄새를 좇아가는 개미나, 개미가 꼬일 줄을 모르고 냄새를 풍기는 양고기 같은 마음을 다 버린 사람이다. ‘사물과 현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고, 귀에 들리는 그대로 듣고, 자기 심장의 소리를 우러나는 그대로 존중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이목시목 이이청이 이심복심(以目視目 以耳聽耳 以心復心)'이라는 고사의 취지이다.

장자가 보통사람들의 난주나 유수나 권루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비웃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어떤 삶의 유형이 고착되어 ‘습(習)’에 빠져버릴 때, 나아가 행복을 잃고 인간성을 잃고 심하면 사회를 우울하게 만드는 폐습에 빠질 것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 소신을 따르되 남의 소신도 존중하며, 자기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안 될 때는 남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난주를 벗어나는 길이다. 지금의 삶을 즐기되 이웃이나 후손들의 삶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유수를 벗어나는 길이다. 열심히 일하되 그 때문에 자기 행복을 아주 포기하거나 지나치게 희생하지 않는 것은 평생을 권루에 그치지 않을 방도다. 요컨대 고정관념, 오래된 편견, 두려움, 탐욕과 폐습에서 헤어나는 것이 진정한 인간 본연, ‘행복할 권리’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권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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