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엔딩] 인터뷰: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박중철 교수

김남기 기자
  • 입력 2022.08.24 14:27
  • 수정 2023.03.3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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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존엄한 삶을 사는 것이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아니다"

중환자실은 철저히 기술이 지배하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다.
환자에게 쉴 새 없이 바늘을 찌르거나 채혈검사를 한 시간 단위로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목적이 존재하는 곳.
때문에 환자의 팔다리가 묶여 있거나 진정제로 정신이 혼미해 져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밤낮 없이 항상 불이 켜져 있고, 옆에는 쉴 틈 없이 기계음이 들리고 환자의 비명이나 고함 소리가 넘쳐난다.
제대로 된 정신적인 안정을 누릴 수가 없어서 환자는 트라우마를 겪게 되고 ‘중환자실 정신병’을 앓게 된다.

(박중철 카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교수. 촬영=김남기 기자)<br>
(박중철 카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교수. 촬영=김남기 기자)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의과대학에 ‘죽음학’ 강좌가 개설됐다. 매우 낯선 강의 제목이다. 그것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의과대학에서 죽음학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이채롭다. 바로 박중철 카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교수의 강의제목이다. 바로 이 ‘죽음학’ 강의가 오늘 인터뷰를 낳은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라는 서적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박중철 교수는 '의사를 꿈꾸는 자라면 죽음 대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일찍이 가졌다. 박 교수는 의사들의 기피하는 호스피스병동에 자진해서 들어갔다. 그래서 죽음을 대하는 의사와 의료시스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다. 중환자실에서 벌어지는 인간존엄성이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박 교수는 한국사회에서의 죽음을 대하는 문화에 대해 많은 문제점을 돌아보게 됐고, 책을 집필하게 됐다.

우리사회는 어르신 ‘돌봄’문제에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 돌봄 사각지대가 많이 있지만, 그래도 많은 돌봄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돌봄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하지만, 돌봄에서 성역인 부분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돌봄활동의 중단을 의미한다. 존엄한 삶을 위해 많은 돌봄 예산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존엄한 죽음 앞에서는 돌봄은 무용지물이 된다. 바로 우리사회에 자리 잡은 죽음의 시스템 때문이다. 이 시스템이 ‘빨리빨리’문화가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일사천리로 자리잡은 만큼, 죽음의 문화는 그렇게 맞춤옷처럼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우리사회의 죽음의 시스템은 환자와 가족들에게 모두 넋 놓고 의사의 입과 병원의 처분만 기다리게 했다. 박 교수는 “의사는 존엄한 죽음의 가이드가 돼야 한다”고 했다.

웰엔딩시리즈, 이번에는 죽음의 접점인 병원과 의료시스템에서 웰엔딩의 문제점과 새로운 대안을 찾아보겠다. 우리들의 올바른 웰엔딩문화를 위해 박중철교수의 철학과 그의 경험담을 들어본다.

박중철 교수의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연명의료의 민낯

지인의 장인어른은 의료결정법이 만들기 전에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와 영양수액 목줄을 달고 고통스러워했다. 장인은 집에 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제발 목줄을 제거 해달라고 간청했고, 아들은 의사에게 말했지만, 절대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말기암 수술을 받지 않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항암치료의 고통없이, 중환자실에서 외롭게 돌아가시지 않게 할 것을 하고, 후회했다.

박중철 교수 :  연명의료는 인위적인 목숨의 연장이며, 존엄한 삶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인간존엄의 문화가 필요하다.

연명의료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무감에서 연명의료를 실시한다. 연명의료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지 않으면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다’, ‘생명을 경시하지 않으려면 고통을 주더라도 연명의료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윤리의식에서다.

생명을 존중의 사회적 윤리와 의무감처럼 시행되는 연명의료를 가급적 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새로운 대안들을 만들어 가야한다. 그래야 새로운 길이 열린다.

연명의료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고 연장시키는 건 좋은 일반적으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연명의료장치도 없었고, 의학적 혜택이나 접근성이 떨어졌을 때는 인간의 생명은 자연스럽게 숨을 거뒀을 때라고 말해왔다.

현재는 인위적으로 생명을 늘릴 수 있다. 생명유지 장치에 기대어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말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인가? 생명을 존엄과 목숨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자. 정확히 말하면 존엄사라는 건 존엄은 삶이고, 목숨은 죽음을 뜻한다. 결국 목숨은 끊어졌지만, 존엄하게 살다가 맞이한 죽음을, 우리는 ‘존엄사’라고 말해야 한다.

박중철 교수 :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지향하는 ‘존엄사’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인간의 존엄은 사실 상대적 개념이다. 그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범위를 공동체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존엄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존엄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연명치료, 장례문화, 중환자실, 호스피스병동, 조력자살 제도 등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사회적으로 ‘존엄문화’가 합의되면, 먼저 존엄한 죽음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병원과 의사들의 윤리의식이 정착돼야 한다. 왜냐하면, 의사들은 어느 순간 멈추고, 어느 순간 달려야 되는지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는 치료행위를 하면서 ‘환자의 존엄을 내가 헤치겠구나, 목숨을 살리더라도 존엄을 죽이겠다’면 주저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배우는 의학은 그 주저함을 다 없애려고 한다. 과학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될까? 주저하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로바로 대응하고 답이 나와야 된다. 이것이 의사들의 지침이고 매뉴얼이다.

구십세 노인이든, 말기암 환자든 상관없이 일단은 지침이 정해지면 거기에 무조건 따라 간다.의학은 무조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박중철 교수 :  제도의 개선보다 존엄한 죽음의 문화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존엄사’와 관련된 가치 판단이 문화적으로 형성이 되면, 환자와 가족이 치료의 범위와 방법들을 선택하고, 연명치료의향서 등을 이용해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의사를 표명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존엄한 죽음의 문화가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누구도 병원과 의사 앞에서 당당히 맞설 수 없다.

독일은 연명치료제도를 만들기 위해서 수년간 사회적으로 공론화의 과정을 거쳤다. 우리도 제도를 만들기 전에 공론화과정과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제도와 더불어 이와 수반되는 시스템의 변화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중환자실은 삶을 연장하는 곳이 아닌 죽음을 연장하는 곳이다. 사진=게티이미지 뱅크)

중환자실의 민낯

연명치료가 중환자실에 환자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하고 있다는 착시현상을 갖게 한다. 보호자들은 어려운 수술과 비싼 약값에도 환자를 살릴 수만 있다면,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갖는다. 그래서 가계가 흔들릴 정도로 병원비를 감당하고,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이했을 때, 고인에 대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박중철 교수 :  중환자실은 삶을 연장하는 곳이 아닌 죽음을 연장하는 곳이다.

중환자실은 살기 위해서 환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반납하거나 제한하는 장소이다. 가족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하루에 한, 두 번 정해진 면회시간에 제한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다.

중환자실은 철저히 기술이 지배하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다. 환자에게 쉴 새 없이 바늘을 찌르거나 채혈검사를 한 시간 단위로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목적이 존재하는 곳. 때문에 환자의 팔다리가 묶여 있거나 진정제로 정신이 혼미해 져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다. 밤낮 없이 항상 불이 켜져 있고, 옆에는 쉴 틈 없이 기계음이 들리고 환자의 비명이나 고함 소리가 넘쳐난다. 제대로 된 정신적인 안정을 누릴 수가 없어서 환자는 트라우마를 겪게 되고 ‘중환자실 정신병’을 앓게 된다.

중환자실 치료가 환자의 존엄에는 아무런 기여하지 못한다. 중환자실은 회복돼서 나가는 것을 전제하고, 환자의 모든 자유를 제한함에도 회복하기 어려운 말기암 환자를 중환자실로 내몰고 있다.

그럼에도 의사가 환자를 대신해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우리 사회는 부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의학적 권위에 의해서 의사의 양심과 도덕성을 우리 사회가 믿어주었다. 지금의 현실은 의사는 철저하게 보호자들에게 책임소재를 돌린다. 보호자들은 의학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처분만 기다리게 된다.

의사는 생명을 연장하는 게 최우선이고, 보호자도 생명을 연장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서로의 의견이 합치되면, 중환자실의 생명연장은 자연스럽게 의사와 보호자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걸 다 했다’라는 것으로 내 안에 죄책감이 덮여 질 수 있는 합리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벌어주는 게 어떻게 보면 중환자실의 연명치료가 되는 것이다.

환자 중에 실제로 절반 이상은 고령자다. 그래서 중환자실에서 많은 분들이 생명을 잃는다. 만일 중환자실을 나와도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요양시설로 간다.

박중철 교수 :  중환자실에 임종실이 필요하다

병원에는 임종실이 없다. 중환자실에서 끝까지 죽음과 싸우든지, 하루 수십만 원을 내고 1인실을 이용하든지, 아니면 미리 요양병원으로 옮겨가든지 결정을 해야 한다. 미처 죽음 을 격리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죽음이 임박하면 궁여지책으로 의료용품들이 쌓여 있는 처치실로 옮겨 다른 환자들과 격리 시키는 것이 병원의 흔한 대처법이다.

환자가 임종이 가까워지면, 의료진중에 일부는 면회시간이외에도 면회를 시켜주거나, 커튼을 쳐서, 가족들이 동시에 들어와서 환자를 면회하는 특별한 배려를 해주는 경우가 있다. 사실 내가 녹색병원에 있을 때는 중환자실 환자 분들을 돌볼 때가 많이 있어서 환자와 가족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드렸다.

의료인증제도라는 틀에서는 이런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염관리 차원이나, 중환자실의 매뉴얼이나 원칙들이 의사들의 가치 판단이나 사고 능력을 제한시켜서 비극적인 죽음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제도나 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의사의 의료행위가 규범지어지면, 의사의 도덕과 양심을 평가할 수 있는 장치는 없어지게 된다.

의사가 최소한의 법안에서 준법적인 치료를 하고 규범에 맞는 행위들이나 의료를 베풀었을 때 도덕적인 의사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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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병원에는 좋은 시설의 장례식장이 있지만, 호스피스병동은 드물다. 촬영=김남기 기자)

호스피스병원, 존엄사의 최소한이다

치료받는 환자는 고통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의사는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일에 매우 소극적이다. 우는 아이 떡 하난 준다는 심정으로 진통제를 처방한다. 

조사에 의하면, 일반인이 가장 선호하는 임종의 장소로 집을 선호 했다. 반면에 의사들은 압도적으로 호스피스병원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스피스병원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법'에 의해 관리‧운영된다. 입원할 수 있는 환자의 상태와 병의 종류가 제한적이어서, 의사들도 선호하는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는 일은 그리 녹녹치 않다.

(일반인과 의사들의 선호 임종장소. 자료='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 윤영호, 그래픽=김남기 기자)

박중철 교수 :  왜 의사들은 완화치료에 인색한가?

말기 폐 질환, 말기 심부전 환자의 호흡 곤란 완화에 모르핀이 큰 효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사들은 암 환자가 아닌 다른 말기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을 몹시 주저한다. 이들은 대부분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면 바로 호흡 억제가 일어나 환자의 죽음이 촉진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르핀이 통증완화에 효과적임에도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경향이 있다.

임종의 장소는 누가 선택하는가? 2017년 상급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와 간호사 225명을 대상으로 ‘임종 과정에서 어떤 치료를 선호’하는지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충분한 통증 조절이 최우선으로 선택되었다.

이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다른 연구에서도 동일했는데, 환자와 의료인 모두 임종 과정에서 겪게 될 고통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 다음으로 의료인들이 원치 않는 치료로는 심폐 소생술, 기계호흡장치, 급식관을 통한 인공영양 등의 연명의료로 확인됐다.

특히 환자의 임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게 되는 간호사의 경우 연명의료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의사들보다 높았다.

박중철 교수 :  편안한 죽음을 위한 호스피스병동

호스피스병동의 목적은 호스피스와 완화의료이다. 호스피스는 외롭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지켜주는 것이고, 임종의 시간까지를 고통 없이 지낼 수 있게끔 해주는 게 완화의료이다. 하지만, 호스피스병동은 일찍 죽게 만드는 곳이라는 편견으로 호스피스병동을 선택하기보다는 죽기 전까지 모든 삶의 질을 포기하고 항암치료에 매달리는 말기 환자가 훨씬 많은 실정이다.

완화의료는 항암치료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항암치료를 하거나 수술을 할 때 무통 주사를 놓아 아프지 않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환자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고통을 겪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누가 당신의 자유와 고통은 완치되기 위해서 스스로 견뎌야 될 부분이라고 매정하게 얘기할 수 있는가?

그래서 처음부터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괴롭히지 않게 해야 된다. 왜냐면,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완화의료의 개념인 것이다. 명품 럭셔리병원에서는 완화치료를 지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요즘은 대부분의 수술이나 치료들이 ‘포괄수가제’이기 때문에 정해진 치료비용 안에 묶여 있다. 그래서 병원이 수익을 내려면 완화치료나 입원기간도 최소화시켜야 한다.

WHO는 말기 및 임종 과정 환자에 대한 적극적인 마약성 진통제 사용을 인도주의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말기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마약 공포증'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말기 환자들은 죽는 것보다 괴로운 통증과 호흡 곤란에 시달리며 지옥과 같은 날들을 보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마약성 진통제 처방 건수가 매년 급속히 증가 하고 있다. 그러나 실체를 들여다보면 말기환자와 임종과정 환자에 대한 처방 증가는 미미하다. 고통 없는 편안한 죽음에 대 한 한국인의 바람과 달리 병원에서의 죽음은 여전히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

박중철 교수 :  호스피스병동 ‘좁은 문’ 편안한 죽음에도 등급이 있나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암 환자일 경우에는 말기 진단을 받아야 한다. ‘나는 암 환자인데 호스피스를 가고 싶다’고 다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말기 암 환자지만 치료 포기를 하거나, 치료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판단이 있어야한다.

환자가 임종을 준비하거나,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심리적인 치료나 상담을 받고 싶으면, 호스피스병동이 도움이 된다. 그런데 말기 암 환자에게만 허용되는 입원 조건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고혈압을 앓고 심부전이 생겨서 호흡 곤란으로 괴로울 때, 요양병원의 치료로는 한계를 느껴 완화의료를 받고 싶어도 허용이 안 된다.

박중철 교수 :  왜 대형병원에는 호스피스병동이 없을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암 환자는 대형병원으로 몰려든다. 심지어는 병원 옆에 숙소를 잡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병원에서는 말기 암 환자에게 석달치 약을 지어주고, 퇴원시킨다. 그리고 호스피스병동을 추천해 준다. 그런데 우리나라 가장 큰 병원 네 곳에는 호스피스병동이 없다.

환자들은 병원에서 쫓겨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호스피스병동으로 가라고 한다. 죽으러 가라는 말로 들린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밥도 먹고 살만하다가 갑자기 고통이 엄습하고, 피를 토하게 되면, 병원 응급실을 간다.

항암치료를 포기 한 환자는 의사로부터 호스피스병동이 아니더라도 완화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술을 마친 말기 암 환자들에게는 돌아 갈 병실이 없다. 집에서 그냥 처방해준 항암제나 진통제를 먹고 견딜 수밖에 없다. 요양병원에서는 통증이나 증상이 심하지 않는 일반 환자들이 주를 이루고, 말기 암 환자들은 안 받는다. 통증이 심한 환자는 감당할 수 없다.

(‘룰루랄라’ 합창단. 암경험자끼리 모여 자신들의 애환과 암투병의 고통을 나눈다. 사진=나우 제공)
(‘룰루랄라’ 합창단. 암경험자끼리 모여 자신들의 애환과 암투병의 고통을 나눈다. 사진=나우 제공)

박중철 교수 :  암 환자와 가족들, 커뮤니티 치유의 힘을 보여 주다

호스피스병동에는 인력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의사들도 근무하기를 꺼려한다. 왜냐면 호스피스병동에 대한 편견이 의사로 하여금 환자와 가족을 마주하기 힘들어하는 감정을 갖게 한다. 그래서 의사들은 호스피스에 가면 내가 할 게 없다고, 의사로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한다.

호스피스병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외로움이다. 중요한 삶의 말기에 보호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환자와 보호자는 함께 눈물을 흘리거나 짜증낸다. 죽음이라는 공포와 무력감에 속절없이 빠져들어 간다.

그래서 호스피스병동은 자연스레 커뮤니티가 형성이 된다. 서로 친구가 되고 말동무가 되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말기 암 환자의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동병상년을 겪는 이웃 침상의 보호자들이다. 이들 보호자들은 서로 자매가 되고 형제가 된다.

내가 있었던 호스피스병동에서는 가족들이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휴게실을 마련해 국이랑 밥을 항상 갖다 놓았다. 왜냐하면 보호자들은 근처 식당을 가지 않고, 그냥 그 안에서 식사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보호자들은 서로 교대로 식사하며, “우리 엄마 좀 봐줘요”, “나 잠깐 외출 좀 할게요”하고 서로 환자를 부탁하기도 한다. 서로 반찬을 가지고 와서 나눠먹고 챙긴다.

그러다가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시면, 보호자들은 호스피스병동에서 생활을 졸업하게 된다. 장례식장에서는 다른 보호자들로부터 위로와 고인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며 조문을 한다. 그리고 곧 보호자들은 호스피스를 방문한다. 의료진한테 감사의 인사보다는 남겨진 보호자들에게 언니, 동생하며 아직 고생길이 남은 분들을 위로한다.

죽음은 환자의 몫이지만, 죽음의 서사는 가족들이 기억한다. 환자는 죽음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의식은 떨어지고, 자신의 감각으로 삶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환자 가족들은 더 생생한 감각으로 환자의 삶의 무게들을 기억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내 몸의 절반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엄마를 잃은 자식들은 내 삶의 이야기 절반이 한순간에서 사라져 버리고 더 이상 그곳에는 새로운 가지가 돋지 않는다.

그래서 암 환자의 가족들에게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함께 아픔을 겪은 호스피스병동의 가족들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다. 그래서 떠난 망자의 자리에 새로운 새싹이 돋울 수 있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몸담은 호스피스병동에서는 1년에 한두 번 같은 시기에 임종을 지켜 본 환자분들을 부른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접한 가족들은 환자의 추억을 되새기며, 정담도 나누고, 다양한 치유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박중철 교수는 인천성모병원을 오기 전에 의사들이 꺼려한다는 여러 호스피스병동에서 의사로 근무했다. 많은 죽음을 접하면서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의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죽음의 장소로 왜 호스피스병동이 꼽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보다 많은 호스피스병동이 설립 되야 한다. 보다 다양한 환자들을 존엄한 삶을 지킬 수 있는 호스피스 이용 규정을 넓혀야 한다. 이 바람은 그 어떤 제도나 규정보다 선행되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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