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시니어] 이주노동자의 벗, '새벼리', 시민교육운동가 되다...흥사단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윤혁'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8.31 12:33
  • 수정 2022.09.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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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에게만 “너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것보다 70대 노인들에게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웰다잉을 묻는 것도 좋지만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가 아직도 유효합니다.

- 윤혁,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를 내려오며. 사진=윤혁 제공)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히말라야에 샛별이 떴다. 히말라야에 어둠이 걷히고 산 아래 열두 개 부락에선 아침부터 전화벨이 요란하다. “한국에서 ‘새벼리’가 왔다고? 정말?” 한국에서 일하다 쫓겨 돌아온 네팔 사람들은 샛별을 볼 때마다 새벼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들에게 ‘새벼리’는 그리운 이름이다. 네팔에 새벼리가 떴다. 

(히말라야 마차푸차레(물고기 꼬리) 배경으로. 사진=윤혁 제공)

히말라야로 간 새벼리 

'새벼리'가 카트만두 트리부번 공항에 도착하자 텐진과 토르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만인가? 토르나는 2001년부터 치열하게 활동했던 이주노동자 위원장으로 그가 평등노조 정책위원장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2003년 명동성당에서 이주노동자 산업연수생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하였다. 1년동안 명동에서 서로 부대끼며 마침내 고용허가제를 법제화하였다. 하지만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여전히 제한하고 있는 등 근본적인 이주 노동정책의 변화라고 보기 어려웠으며 노동허가제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 후 토르나는 한국 정부로부터 집중감시를 받다, 민주노총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ETU-MB) 집행부들과 함께 강제 추방당했다. 새벼리와 토르나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부둥켜안았다, 한동안 말없이 감격을 나누다 토르나는 새벼리의 목에 흰색 스카프와 황금색 띠를 걸어주었다. ‘까따’라고 불리는 신에게 바치는 수건으로 ‘환영’을 상징한다.

(토르나와 네팔의 락카페에서. 사진=윤혁 제공)

'새벼리'에게 네팔은 살면서 한 번은 꼭 들러야 할 곳이었다. 그곳에는 옛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영화 ‘안녕 미누’의 문화이주노동자 미누도 있었고 샤마르, 깨비, 헉, 라쥬, 검, 까지만, 라디카와 지금도 네팔노총의 사무총장을 하고 있는 버즈라 등 한국에서 함께 이주노동자 운동을 했던 동지들이 있었다. 새벼리는 꿈에 그리던 안나푸르나 트래킹도 하고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최초로 폭로한 산재 노동자 먼쥬의 결혼식도 참석했다. 그녀는 자신의 한쪽 손목을 앗아간 나라, 한국에서 온 손님 새벼리를 사랑하는 남편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라쥬 아버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해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라쥬(좌에서 네번째) 부친상에서 네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미누(왼쪽 끝), 윤혁(오른쪽 끝). 사진=윤혁 제공)

네팔 건설노조 창립기념 집회에도 초청받았다, 그리고 네팔의 옛 동지들은 그에게 과거 네팔 국왕이 귀빈에게 귀한 네팔 음식을 대접했다는 방식 그대로 극진한 성찬을 선물했다. 그는 살아 있는 것, 꿈틀거리는 생명을 보고 싶었다. 비우고 비우고 비운 것마저 비우고 싶었다. 그가 희말라야에 들어서는 순간 자연이 얼마나 거대하며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았다. 

(네팔 건설노조 창립 행사 연단에 오른 윤혁. 사진=윤혁 제공)

벼리의 그물 

'새벼리'는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윤혁 사무처장의 오랜 아이디이다. ‘벼리’는 그물의 코를 꿰어 놓은 줄이다. 벼리를 잡아당기면 그물을 오므렸다 폈다 할 수 있다. 윤혁 사무처장은 인생의 3, 40대를 노동운동을 하며 ‘벼리’로 살았다. 그가 잡아당긴 그믈은 ‘대기업 노동조합운동’이 아니었다.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운동이었다.

윤혁 사무처장은 종갓집 3대 독자 종손으로 새해 첫날 샛별처럼 세상에 나왔다. 고향은 담양이지만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어려서부터 외가가 있는 광주로 유학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공부도 꽤 잘해 반장과 학생회장을 도맡은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가을 소풍이었다. 선생님들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도 선생님들을 따라 펑펑 울었다. 제도교육 속, 너무나 모범적 학생이었다고 그는 씁쓸히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윤혁. 촬영=고석배기자)

광주의 기억 

이듬해 중학교 3학년 때 5.18 항쟁이 일어났다. 같은 학교 학생 한 명이 실종되었다. 그리고 영어 선생님의 퇴근을 마중 나가 기다리던 선생님의 부인이 총에 맞았다. 그녀의 배 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5.18 희생자 중 임신 중에 사망한 여인이 바로 그분이었다. 그때 광주에서의 기억은 모범생 윤혁 학생이 운동권 학생이 되어 20대를 불꽃처럼 살게 한 지울 수 없는 숙명이었다,

8년간의 긴 대학 생활이었다. 87년에는 지금 근무하는 흥사단이 위치한 대학로에서 20만 명 군중을 상대로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많은 사람 앞에도 이상하게 떨리지 않았다. 그가 가슴에 삭이며 절실히 내뱉고 싶었던 말이 두려움을 잊게 했다. 수배 생활을 하다 결국 서른이 다 되어 군대에 갔다. 장교가 아니라 병이었다.

(대학시절 MBC 인터뷰. 사진=윤혁 제공)

가장 낮은 곳에서 

그에게 철이 든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한다는 말과 같았다. 군대를 다녀와도 그는 철이 들지 않았다. 그가 찾은 곳은 노동 현장이었다.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운동’은 다르다는 생각에 그는 ‘노동운동’을 택했다.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보다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야말로 그가 함께해야 할 이 땅의 핍박받고 가난한 서민이라고 생각했다.

민주노총 소속이었던 평등노동조합 정책위원장으로 '을'중에 '을'인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약자 중의 약자인 지하철 청소 노동자, 미용실 노동자, 텔레마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 그리고 ‘카트’라는 영화로 실상이 알려지게 된 마트 노동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하고 소외된 외국인 이주노동자 운동에 혼신을 다했다. 당시 산업연수생 제도하에 그들의 신분은 노동자도 아닌 연수생이었다. 그들과 함께 고용허가제를 이끌어 미약하나마 노동자 대우를 받게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노동운동의 여정은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때 그의 활동비는 한 달에 교통비 30만 원, 연봉 360만 원이었다.

(노동운동 시절 윤혁. 사진=윤혁 제공)

노동 운동가에서 교육 운동가로

윤혁 사무처장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교육운동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는 깨달았다. 불안정한 고용은 불안정한 삶을 만들고 이는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 세대에게까지 이전된다는 것을 목도했다. 노동시장이 바뀌려면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교육의 혁명적 전환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강남 서초 지역으로 주소지를 이전했다. 사교육 1번지에서부터 풀뿌리 교육운동을 뻗어나가게 하고 싶었다. 강남, 서초는 부와 권력이 집중된 곳이기도 하지만 부와 가난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포이동과 구룡마을 등 가장 많은 판자촌이 있는 곳이 강남이었다.

(빈집 프로젝트. 사진=윤혁 제공)

세상을 바꾸는 교육 

2010년쯤 포이동 판자촌에서 큰불이 일어났다, 복구 활동을 하는 과정에 그는 ‘포이동 공부방’을 열었다. 그곳에서 3년간 지역 청소년과 주민의 교육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서초 우면지구에 SH공사가 법적으로 지어야 하는 학교를 만들지 않으려는 꼼수를 저지한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서울시 공기업임에도 SH공사는 학교 용지에 아파트 2동을 더 지으려 했다. 아파트 한 동을 더 지으면 1,000억여 원의 수익이 더 남기 때문이다. 그는 우면지구 입주예정자들과 연대해서 교육의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를 우선하는 서울시와 토건 세력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윤혁 사무처장은 히말라야 여행을 떠난 이유를 벗들에게 글로 남겼다. “헛발질로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한 정리. 절실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쌓아온 궤적이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나 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항상 같은 길 위에 있었다. 노동운동가에서 교육운동가로 변신한 그에게 노동과 교육의 차이를 물었을 때 그는 노동과 교육은 다르지 않고 서로 보완적 관계라고 정리했다.

노동운동은 결국 인간해방의 운동이자 인간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 본래의 목적도 인간의 존엄함을 유지하고 고양하는 과정이 교육이고,
이것 역시 인간해방이기에 노동운동이나 교육운동은 본질상 일치합니다.
선후 관계나 우열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 관계이지요.
교육운동의 주축인 교사들 역시도 노동운동을 하는 중입니다.

- 윤혁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청소년, 새로운 백년의 주인이 되자. 사진=흥사단교육운동본부 제공)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2015년 그는 같은 인간해방을 위한 운동 선상에서 또 다른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이었다. 2010년부터 그는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초대 정책 실장이자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2013년 '교육 도시 서울' TF팀에 참여하고 있었다. 프로젝트는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어린이와 청소년이 행복한 이상적인 교육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꿈 같은 프로젝트였다. 그는 그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흥사단 교육운동본부의 문을 열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이었다. 그는 인생의 50대를 흥사단 교육 운동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흥사단은 1913년 조국을 강탈당한 미국의 유학생과 미국에서 노동하던 한국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만든 단체이다. ‘흥사’라는 말 그대로 새로운 시민들, 즉 일제 강점기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 활동가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흥사단을 조선의 혁명 제1 지대로 명명하고 인재를 양성하며 세계적인 모범 민주국가를 꿈꾸었다.

(흥사단. 촬영=고석배기자)

시민과 함께하는 흥사단 

흥사단은 해방 후 반독재운동에도 앞장서며 1960년대에는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이 후배 양성에 실패하면서 1980년대 후반 민주화 과정을 거친다. 흥사단은 시민과 함께하는 대중운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민운동의 모델로 개발한 것이 1997년 민족통일운동본부, 2001년 투명사회운 본부, 그리고 2002년도 흥사단 교육운동본부이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모범적 민주공화국 철학과 흥사단 운동의 활동 원칙을 준수하면서 대중적 시민 교육운동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운동 본부입니다.

흥사단 교육운동의 목적을 간단히 말하자면 도산학교 설립, 민주시민 양성,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의 억압적 경쟁 입시 교육의 철폐와 대안적 교육 패러다임을 연구하고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는 지난 20년간 ‘대한민국 청소년의회’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현재는 청소년들에 의해 의회가 직접 운영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청소년들의 참여하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성장을 돕기 ‘청소년 원탁회의’도 진행하고 있다.

(흥사단 게시판. 촬영=고석배기자)

세계 시민교육과 백년공부 

윤혁 사무처장은 21세기 다인종 다문화 시대를 맞아 세계시민교육에도 집중하고 있다. 아울러 ‘희로애락 장독대 사랑방’이라는 선주민과 이주민 간의 문화적 일상 교감프로그램도 확대하고 있다. 또한 평생 시민교육의 맥락에서 전국에 개설된 시민대학의 프로그램을 자문해주고 직접 콘텐츠도 개발하여 시범수업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교육정책 포럼’을 꾸준히 열고 있다. 또 심도 있는 교육정책 학습을 위해서 교육 개혁에 뜻을 둔 홍세화, 심성보 등의 명사들을 초청해 ‘백년공부’도 진행하고 있다.

저희의 활동 슬로건은 ‘시민과 청소년이 함께 가꾸는 희망의 교육’입니다.

저희는 시민과 청소년이 자신의 꿈과 끼, 바람직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모든 활동을 지원하며 그것을 위한 허브 또는 마당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희로애락 장독대 사랑방' 행사 참가자들이 담근 된장 항아리. 촬영=고석배기자)

영화를 통한 민주시민교육

윤혁 사무처장이 흥사단 교육운동본부에 오면서 무엇보다 역점에 둔 것은 ‘영화를 통한 민주시민교육’이다. 2015년부터 민주주의와 유토피아를 합성한 민주피아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다. 민주피아는 유아, 초중등 학생, 그리고 학교 밖 청소년과 대학생, 지역사회 시민과 인생이모작을 꿈꾸는 시니어 세대를 망라한 전 세대 교육 프로그램이다. 현재 전국의 시민대학과 지자체에서 강의 개설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영화를 통한 시민교육은 텍스트를 통한 재미없고 딱딱한 교육이 아니라 삶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영화를 통해 때로 웃고 때로 울며 공감하는 교육입니다.

다시 말해 시민적 생각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프로젝트로 전문적 학습 역량이 필요해 이를 진행하는 강사들을 별도로 양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에 650명의 민주피아, 민주시민교육지도사를 배출하였고 조만간 합동 워크숍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남양주 민주피아 연구모임. 사진=흥사단교육운동본부 제공)

시니어 교육의 현실 

윤혁 사무처장은 시니어세대에 대한 교육에도 관심이 깊다. 한번은 흥사단 교육운동본부가 ‘찾아가는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읍면동 지역에 출장교육을 간 적이 있다. 지방에는 60대도 거의 없고 7, 80대가 주였다. 그런데 깜짝 놀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국영화를 보여주고 밑에 일일이 한글 자막까지 달아주었는데 어르신들은 영화가 끝난 후 전혀 내용 파악을 못 하고 있었다.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적은 나라라고 하지만 아직도 농촌 사회의 어르신들은 한글을 모르시는 분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현존하고 있는 중장년층 그리고 노년층의 삶의 양식을 제대로 조사해보지 못했던 거죠.
그 후 고령화 사회에서의 대한민국 시니어세대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 노년층의 삶은 여전히 자신의 생계를, 심지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회적으로는 일자리에서 박탈되었고 신문방송에서는 웰빙 담론을 이데올로기처럼 설파해요.
여행과 취미를 즐기는 건강하고 풍요로운 노년생활을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정말 좋지요. 문제는 우리 사회에 넉넉한 연금과 모아 놓은 자산으로 인생의 나머지를 즐길 수 있는 노인들이 얼마나 되느냐입니다.

(민주피아 합동 워크샵. 사진=흥사단교육운동본부 제공)

윤혁 사무처장은 시니어 문제에 대해서 담론의 재구성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시니어들은 급속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황금만능주의 시대에서 뒤처진 자신을 자식들의 교육으로 보상받으려고 헀다. 그래서 재산을 모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시니어들은 인생 후반기에도 여전히 빈익빈 부익부다. 그는 시니어 교육에서도 정작 생계 수단이 필요한 노년층은 학습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격증이나 재취업 교육은 또 다른 경쟁의 패배감만을 안겨줄 뿐 무의미하다고 따끔한 질책을 한다.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청소년들에게만 “너의 꿈이 무엇이냐?” 묻는 것보다,
70대 노인들에게도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 웰다잉을 묻는 것도 좋지만 ,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가 아직도 유효합니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이윤미 부장(좌) 윤혁 사무처장(중) 김비취 간사(우). 촬영=고석배기자)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

80대 전까지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UN의 발표를 떠나서, 현대 사회는 의학의 발달로 생물학적으로 100세 시대를 맞고 있다. 과거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걱정해 출생 신고도 늦게 올려야 했던 시대가 있었다면, 현대사회는 생각보다 너무 오래 사는 게 걱정인 시대가 왔다. 윤혁 사무처장은 65세 정년퇴직 제도와 연금제도에 대해서도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노인 일자리’가 아니라 시니어세대에게도 경력과 능력이 연장되는 ‘사회적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없습니다.
시혜적인 차원으로 정부에서는 65세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어 놓고 노인복지의 큰 전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잡초 제거하고, 공원 청소하고, 하천 쓰레기 줍고...
그 일이 어떻게 해서 65세 이상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들을 위한 일자리는 그것밖에 안 되는 겁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노인들도 분노해야 합니다.
청소년이 억압적 입시교육으로 자신의 개성이 말살됨을 분노해야 하는 것처럼,
노인들의 공공일자리는 왜 그렇게 잡초뽑기 정도로 국한해,
노인들의 능력은 물론 자존감까지 훼손시키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주배경 청소년이 멘토로 윤혁처장을 인터뷰 하는 모습. 사진=흥사단교육운동본부 제공)

새로운 변신

윤혁 사무처장은 식물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 대학로 흥사단 건물 옥상에는 텃밭이 있다. 지금은 다른 동료가 가꾸지만 텃밭에 심은 상추는 일 년에 두 번도 자라고 세 번도 자란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 이모작과 삼모작이 가능하지만 상추 심은 곳에서 깻잎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는 나이 육십이 넘은 자기 모습은 고향에서 식물을 키우고 마을 교육운동을 하고 있을 거라 대답한다. 전원생활의 그리움이 아니다. 스무 살에 올라와 서울에서 40년을 살았으면 많이 살았다 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그의 변신은 동일선상에 있다.

(흥사단 옥상 텃밭. 촬영=고석배기자)

첫사랑 같은 고향 

그의 고향은 송강 정철이 가사문학의 씨앗을 뿌린 담양이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사회과학적 논리를 정연하게 펼치는 그는 의외로 국문학을 전공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호남예술제에서 매년 상을 받던 문학소년이었다. 헤르만 헤세를 특히 좋아했다. 지와 사랑,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의 문장을 암송하다시피 했다. 헤세의 글에는 유독 벌판을 걷는 장면이 많았다.

고향 담양은 그의 첫사랑이다. 광주 유학 시절에도 주말마다 고향을 내려갔다. 고향 벌판 길을 홀로 걷기 위해서였다. 명상에 잠기며 시상을 떠올리곤 했다. 청춘의 그는 낭만주의자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코스모스 흐드러진 그 벌판 길을 흰 교복의 여학생과 함께 걸었다. 서로 참 많이 좋아했었다. 누군들 가슴 속에 소중한 첫사랑 하나쯤 없겠는가?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않는다. 그는 첫사랑 같은 고향에서 지역사회를 위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에서 ‘마을활동가’ 교육을 하는 것도 그의 꿈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70에도 80에도 계속 새로운 꿈을 꿀 듯하다.

(촘롱에서 함께했던 산티 구릉. '산티'는 '평화'라는 뜻. 사진=윤혁 제공)

도산 안창호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도산 안창호

그는 흥사단에서 운명처럼 안창호 선생님을 만났다. 그가 힘들 때면 안창호 선생의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읽는다.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도산 선생님의 말씀은
운동가, 활동가의 자세라기보다 그냥 우리 삶에 어려움에 부닥친 누구에게도 해당하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그런 희망을 품고 정의롭게 사는 걸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사무처장 윤혁

(대학로 흥사단 앞 안창호 동상. 촬영=고석배기자)

愛己愛他(애기애타)

윤혁 사무처장은 도산 안창호 선생님처럼 끊임없이 愛己愛他(애기애타)의 정신으로 도전하는 삶을 살 것이다. 운동은 타인을 위한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자신을 성찰하며 묻는다.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 부끄럽지 않은 아들로 살고 있는가?

그때는 몰랐는데... 자꾸 묻게 된다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운 것인지...
아버님, 당신께 자랑스런 아들이었던가요?
가슴 깊이 고개 묻고, 묻고 싶은 밤
저기 떠오르는 당신 가슴, 그 아픈 피멍 우에...
그리운 당신

아버님 소천 1주기, 글. 윤혁.

(흥사단에 걸린 안창호 친필. 촬영=고석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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