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㉙] 바라춤에 기대어

김경 기자
  • 입력 2022.09.08 11:58
  • 수정 2022.09.1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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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발사위가 신중하다.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하면 슬며시 뒤로 빠진다. 그리고 소리 없이 빙그르르 돈다. 더없이 경건하다. 스님들은 회색장삼에 갈색가사를 걸치고 그 위에 백색 적색 황색 녹색의 띠를 둘렀다. 그 화려한 차림새에 고아한 발사위가 참 잘 어울린다. 어느 틈에 머리 위로 올린 양손이 활짝 펼쳐지면서 바라도 양쪽으로 나뉜다. 바라에 달라붙은 한 줌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오른손 바라가 회전하며 먼저 내려오고, 뒤따라 왼손의 바라도 내려온다.

극락전 앞마당에서 네 명의 스님들이 승무 공양을 올린다. 부처에 대한 찬탄과 더불어 대중들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포교적 의미도 지닌 바라춤이다. 반주음악을 맡은 악기는 호적과 북이다. 삘리리 삘리리리, 둥둥 두둥둥. 호적 소리는 가냘프면서도 청아하고 북소리는 은은하면서도 뭉근하다. 한결같이 느릿느릿한 춤사위는 고풍스럽고 정적이다 못해 엄숙하기까지 하다. 나는 바라춤의 분위기에 점점 더 동화되어간다. 거울 보듯 양손으로 받쳐 든 바라가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스님들은 서로 교차하는 형태로 나아가며 양팔을 180도로 벌린 뒤에 바라를 맞부딪친다. 일순간 귓가에 스치는 낭랑한 소리……. 묵은 때가 씻기는 듯한 맑은 바라 소리는 호적과 북소리 속에 스며들며 화음을 이룬다. 스님들은 가슴 앞에 모인 두 개의 바라를 젖히고 나서 고개를 숙인다. 나도 저절로 합장을 하며 고개가 숙여진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유난히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피어오른다.

오늘은 7월 1일, 음력으론 6월 3일이다. 하안거가 끝나는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을 맞아 지내는 천도재, 그 49재에서 초재를 봉행하는 날이다. 날씨부터 오늘의 초재를 도왔다. 비를 예고한 일기예보가 빗나가면서 며칠째 계속되던 장마가 걷혔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곳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불교 명절이 민족 명절로 자리 잡은 백중은 백종(百種), 중원(中元), 혹은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불가에서는 원래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고 했다. 부처의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목련존자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우란분절에는 조상 천도를 위한 불공과 재를 올린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목련존자 이야기를 선친에게서 들었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을 옹기종기 둘러앉혀 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풀곤 했다. 우리 형제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목련존자 이야기는 참 여러 차례나 들었다. 아마도 일찍 어머니를 여읜 아버지는 목련존자의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절절했던 것 같다. 목련존자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겨워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드디어 어머니를 찾긴 했으나 그곳은 지옥계였다. 어머니는 고통의 아수라장인 지옥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생전에 쌓은 악업의 결과였다. 출가사문을 비방하고, 축생들을 죽이고, 바른 법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목련존자는 어머니를 교화해 구제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부처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문들이 정진을 마치고 자유로운 수행으로 들어가는 7월 보름에 정성껏 성찬을 마련해 많은 사문들에게 공양하라. 목련존자는 지극한 마음으로 음식을 마련해 재를 지냈다. 어머니는 아들의 효심으로 마침내 무간지옥을 벗어났다.

백중기도는 돌아가신 부모, 조상님께 은혜를 갚는 길이다. 그동안 모시지 못한 혼령의 넋을 달래주는 효 정신을 이어가는 천도 불공이다. 어쩌면 백중기도는 뒤늦게나마 모든 자식들을 일깨우는 기도일는지도 몰랐다. 물론 나에게도 이날의 기도보다 더 소중한 기도는 없다. 이번에는 하얀 연등기도에 바라춤까지 곁들이게 되어 한결 더 마음이 가볍다. 워낙 부모님은 음악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일찍이 자식들에게 음악적 소양을 키워주려고 전축과 클래식 음반을 사들였다. 어머니는 여고시절 합창부원답게 우리 가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즐겨 불렀다. 그런데도 언제 한 번 부모님을 음악회에 모시고 간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내 결혼 전에 떠나시고, 어머니는 내 결혼 후 줄곧 미국에서 지냈다는 게 핑계가 될 수 있으려나.

삘리리 삘리리, 둥둥 두둥둥…….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음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내 손목에는 어느 틈에 바라 줄이 감겨 있다. 나는 바라를 엎어 가슴 앞에 모은다. 한없이 서투른 춤사위일지라도 부모님을 위해 음악에 맞춰 바라춤을 춰본다. 나는 오른손을 아래에 두고 왼손을 머리 위로 올린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성큼 바라를 쫓아온다. 부모님의 다정한 미소가 햇살을 시원스레 가라앉힌다. 바라와 햇살과 부모님의 미소가 둥두렷이 한데 어울린다. 회한에 찬 가슴속으로 부모님의 미소가 스며든다. 아, 나는 뒤늦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부모님을 향한 기도에 앞서 나는 벌써 부모님의 기도를 받았다. 영혼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여전한 것을.

나는 바라춤이 끝난 앞마당을 벗어나 경내를 걸으며 부모님이 계시는 세상을 그려본다. 그동안 홀로 지내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재회한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오늘도 이승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을까. 난생처음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 말씀드린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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