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별세...기적처럼 살다 날아간 ‘병 속의 새’

고석배 기자
  • 입력 2022.09.28 11:26
  • 수정 2022.09.3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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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다
.
남자가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 넣고 키웠다.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 겠는데

그동안 커서 나오지를 않는다.

병을 깨뜨려서도

새를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 김성동 '만다라(1978)' 중에서

(충주시 산척면 서건리 산 62-1에 마련한 김성동 작가 묘. 촬영=고석배 기자)

[이모작뉴스 고석배 기자] 김성동 작가가 만다라를 마무리하고 우주로 떠났다. 2022년 9월 25일 일요일 오전 7시 45분. 그의 마지막 생의 정거장 충주에서 생을 거뒀다.

네 살 때 처음으로 터진 말 

김성동은 1947년, 충남 보령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까지 말을 할 줄 몰랐다. 6.25가 일어나고 7월에 느닷없이 말을 열었다. 멍석을 기어 다니던 그가 대전 방향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부르짖었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과 6.25의 시대적 혼란 속에서 이승만 정권에게 끌려가 대전의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무덤도 없다.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김성동이 다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쳤다. 초등학교에 들어서기 전에는 이미 맹자를 뗀 상태였다.

1965년, 고3 때 빨갱이의 자식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라벌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도봉산 천축사로 출가했다. 6년 동안 선방과 토굴을 오가며 지냈다. 그의 법명은 정각(正覺) 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다시 지효선사 문하로 들어가 상좌가 되었다. 깨달음의 진전이 없자 소설 ‘만다라’의 ‘법운’처럼 방랑의 길을 걸었다.

(김성동 작가. 촬영=고석배 기자)

만다라를 그리다

그는 정식 승적도 없었다. 정식 승적도 없는 그를 조계사는 1975년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된 ‘목탁조’가 불교를 폄훼했다고 승적을 박탈한다. 그 후 그는 강릉 보현사 일대의 산골짜기를 헤매다 1주일 만에 소설을 하나 써낸다. 그 작품이 ‘만다라’다.

법운의 아버지가 6·25전쟁 때 좌익으로 처형된 뒤, 법운의 어머니는 매일 밤 아버지의 퉁소 소리를 찾아 헤매다 결국 가출하고 만다. 법운은 한 스님을 만나 불교에 입문해 6년 동안 수도승의 길을 걷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다 우연히 파계승인 지산을 만난다. 지산은 어느 날 한 여인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동안 쌓아온 공부를 무너뜨리고 파계승의 길을 걸었다. 법운은 지산처럼 파계승이 될 용기도 없고, 수도에만 매진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던 어느 날 지산은 암자 아래 술집에서 만취되어 올라온 뒤 산중에서 얼어 죽는다. 법운도 자살을 생각하지만, 지산처럼 온몸으로 삶을 사랑하지 못한 자신에게 자살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죽음을 포기하고, 한 여인과 동침한 다음 날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김성동은 ‘만다라’로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고 소설은 영화화된다. ‘만다라’는 임권택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자 출세작이 된다. 그런데 영화 ‘만다라’와 소설 ‘만다라’의 결말이 달랐다. ‘필요 없다’와 ‘필요 있다’의 완전히 뒤바꾼 결말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2001년 그가 새로 쓴 개정판과 결말이 같다. 초판에서 찢어버린 ‘피안행 차표’는 개정판에선 찢어지지 않았다.

(김성동 작가의 서재에서 발견한 '만다라'. 촬영=고석배 기자)

가로막힌 '마술적 리얼리즘'

‘만다라’ 외에도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토대로 종교적인 인간의 본질 문제를 주로 다룬 작품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집’ ,‘길’ 등이 있다.

생전 그의 영혼은 자유를 향했지만, 그의 글쓰기는 자유롭지 못했다. 마르케스류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며 주목받은 장편소설 ‘풍적(風笛)’은 ‘문예중앙’에 연재 2회 만에 중단됐다. 지주가 9할, 소작농이 1할을 먹는 토지 문제를 비판하며 조선공산당 정강·정책에 담긴 소작농 7할, 지주 3할을 담았다는 이유다. 1983년, 전두환의 5공 때였다. 또 1960년대 이후의 학생 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그들의 벌판’을 ‘중앙일보’에 연재했으나 반미적인 요소가 있다고 두 달 만에 연재를 중단당했다.

(젊은 날, 소설문학 표지 속 김성동과 그의 캐리커쳐. 촬영=고석배 기자)

‘이념의 장벽’을 깨다

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1998년 ‘시와 함께’에 ‘중생’ 외 10편의 시를 발표했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도 강해 한겨레신문에 '우리말 바르게'를 연재하기도 했다. 생전 신동엽 창작기금상(1985), 현대불교 문학상(2002·1998), 이태준 문학상(2016) 등을 받았다. 2019년 그는 작가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요산 김정한 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상을 받은 이유는 그의 소설집 ‘민들레 꽃반지 끼고’가 문학에서 ‘이념의 장벽’을 깬 공헌이다. ‘민들레 꽃반지’는 남로당원의 징표였다. 김성동은 요산문학상을 받고 대성통곡했다. 비로소 아버지 '김봉한'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에 묶여 참혹한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의 중편소설 '고추잠자리'는 조선공산당의 당수 박헌영의 비선 김봉한의 죽기 전 행적을 그렸다. 김봉한의 김성동의 아버지다. 인민공화국 시절 어머니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한 중편 '멧새 한 마리'에는 1951년에 국가보안법 등으로 기소됐던 어머니의 재판 기록을 원문 그대로 담았다.

빨갱이 새끼 …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 뱉는 빨갱이가 되어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풀기 빠진 핫바지처럼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일까…

- 김성동, ‘엄마와 개구리’

(요산문학상 시상식에서. 촬영=고석배 기자)

국수(國手)

김성동은 바둑 고수이기도 하다. 젊은 날 잠시 한국기원의 바둑잡지에 기자로서 일한 적도 있고 바둑TV 명사초대전 대국에도 초청되었다. 그가 27년 만에 완성한 국수(國手)는 바둑과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소설 ‘국수’는 임오군변(1882)에서부터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각 분야의 예인들과 걸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 말의 향연으로 펼쳐냈다.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 때 읽었던 책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김성동 작가가 정작 아끼는 책은 ‘만다라’도 ‘국수’도 아니었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이다. ‘현대사 아리랑’의 증보판으로 소설이 아니다.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꿈과 이력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서이다. 작가는 각 인물에 대한 풍부한 고증을 바탕으로 치열했던 독립운동 활동과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손목 힘줄이 늘어날 정도로 2,700장의 원고를 딱 한 달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이 책을 썼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은 이 책이 공식 사서(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내면적 언어로, 역사의 격랑 속에 몸을 던졌던 개인들의 실존적 진실을 핍진하게 드러냈다고 극찬했다.

똑같은 독립운동가며 혁명열사라고 할지라도 돌아가신 때가 아주 대모하다는 것이었다...

8·15 앞에 돌아가신 이는 독립유공자가 되고, 8·15 뒤에 돌아가신 이는 ‘대한민국 반역자’로 불도장 찍혔다는 것 독립운동 유공자는 그 뒷자손들이 연금을 받고, 대한민국 반역자는 이 중생이 그러하듯 그 뒷자손들이 연좌제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것. (중략)

어른도 없고 손윗사람도 없으며 벗 또한 드문 스산한 시대여서 그러한가. 새록새록 그리워지는 어르신들이니, 아아! 혁명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허물어진 혁명가들 삶 떠올려 보는 마음 애잡짤하고녀.

- 김성동, 2013년 12월,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머리말 중에서

(김성동 작가가 가장 아낀 그의 저서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촬영=고석배 기자)

홍범도의 ‘노인부대’

또다시 스산한 시대다. 김성동 작가를 보내며 후배작가와 따르던 지인들은 또 한 명의 시대의 어르신을 잃음에 안타까워한다. 김성동 작가는 2020년 충주로 이사 오기 전 20년 가까이 양평에서 살았다. 양평 몽양기념관 사업 일로 김성동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김희원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북부 지부장은 그가 들려주었던 역사 뒤의 역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홍범도 장군 휘하에 ‘노인부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양평 용문의 포수들인데 병인양요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둔 주역입니다. 독립군 옛 사진 중에 프랑스 육전대 장교의 옷을 걸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용문 사냥꾼인데 일본군이 그들을 두려워해 대규모 군사를 보내 소탕전을 펼칩니다.

그때 만주로 떠나 홍범도 장군 휘하로 합류하는데 그때는 이미 나이가 들어 ‘노인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한 ‘은괴’는 사실 왕실이 숨긴 ‘금괴’였다고 합니다. ‘한 방에 끝낸다’에서 ‘한 방’이라는 말도 용문 포수들을 빗대어 만들어진 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방‘에 끝낼 정도로 명사수였다고 하는데 이런 얘기를 김성동 작가에게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네요.

- 김희원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북부 지부장

(친일문학 강연회 포스터. 촬영=고석배 기자)

미륵뫼를 찾아서

그의 마지막 정거장이었던 충주에서 그를 가까이 지켰던 후배, 최용탁 작가는 슬픔이 더 크다. 김성동 작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충주로 이사 왔다.

6월에 지역 서점에서 강의하고 뒤풀이로 오랜만에 약주 한잔을 걸치셨습니다. 그날따라 무척 기분 좋아 보이셨어요. 그날 이후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살은 점점 빠지는데 그러면서도 통증을 참아내며 꼿꼿이 앉아 마지막 원고 교정을 하셨어요.

- 최용탁 작가

유고집이 된 그의 마지막 책은 세 권이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는 복간이고 ‘(가칭)미륵 세상 꿈나라’는 상권에 이어 하권을 완성했으며 ‘미륵뫼를 찾아서’는 신간이다. 작가회의 회보 편집장을 하며 김성동 작가와 인연을 맺은 이장곤 시인이 출판을 맡았다.

(양평 시절의 김성동 작가. 촬영=고석배 기자)

도망치는 인생

김성동 작가와 누나 김점동 씨는 각별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 세 식구는 빨갱이 가족이라고 스무 번 정도 도망치듯 이사하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에 한 번 기관원은 어머니를 찾아왔다. 만다라를 출간하고 나서는 불교계에서 죽이겠다고 협박해 20년간 피해 다녀야 했다. 실제 살해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동 작가는 생전에 자신은 ‘도망치는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성동 작가 빈소. 촬영=고석배 기자)

만다라는 모래가 되어 강물을 출발한다

티베트에서는 물감이 아니라 색모래로 만다라를 만든다. 만드는 광경도 완성된 작품도 장관이다. 완성된 만다라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쓸어모아 모래로 돌아간다, 바다로 떠나는 강에 흘려보낸다. ‘만다라’도 ‘국수(國手)’도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도 떠내려간다. 작가 김성동은 자기 작품에도 자유를 주고 싶었나 보다.

(김성동 작가 서재 속 사진. 촬영=고석배 기자)

기적처럼 살다 날아간 ‘병 속의 새’

그의 책 ‘민들레꽃반지’에 해설을 쓴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에 그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고. 언제나 반갑고 환하게 맞아주시던 ‘기적 같이 살아온’ 그가 떠났다. ‘병속의 새’도 마침내 하늘로 날아갔다. 그가 떠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병속의 새’는 김성동 자신이었으며,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반도의 민중이라는 것을.

결국 그는 이승에서 병을 깨지 못하고 저승에서야 비로소 분단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저승에서는 훨훨 자유의 몸이 되어 한 살 때 만나고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 지상에서 못 불러본 “아버지”를 실컷 부르고, “아버지! 아들아!” 얼싸안으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길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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