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 9] 문학관: 레프 톨스토이...“사랑하는 자만이 살아있는 것이다”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0.04 16:37
  • 수정 2022.11.14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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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부터 ‘부활’까지 5백여 편 남긴 러시아 문호
교육자, 개혁사상가, 구제운동가로도 세계에 명성
M.간디부터 마틴 루터 킹까지 ‘비폭력 시민불복종’에 영향
제국 권력 감시 속, 시골 기차역에서 ‘화려한 최후’

레프 톨스토이 초상화. ⓒ게티이미지뱅크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노인이 부축받으며 문 앞에 나타나자 1등 칸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모두 좌석에서 일어섰다. 통로에 서있던 사람들은 모자를 벗었다. 노인은 답례로 인사했고, 제복을 입은 역장과 한 남자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기차에서 내렸다. 역에 있던 사람들이 역장의 사택 현관까지 그를 모셔갔다. 11월을 하루 앞둔 러시아 아스타포보의 공기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노인이 침상이 준비되길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한 신사가 큼직한 가방을 들고 들어섰다. 철도청 외래진료소의 의사인 스토코프스키였다. 그가 진료표를 작성했다.

성명: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프, 
나이: 82세, 
지위: 백작 …

의사가 펜을 멈추며 머뭇거리자 노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쓰든 차이가 있겠소? 12번 열차 승객이라고 적으시오. 우리는 모두 이 세계에서 다 같은 승객일 뿐이오. 다만 어떤 이들은 막 자신의 기차에 오른 반면 나 같은 노인네는 내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병명은 급성폐렴이었다. 고열과 기침, 오한. 1910년 10월 31일 밤이었다.


전 세계가 주목한 어느 시골역

이틀 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이 갑자기 자기 영지를 떠났다는 소식은 이미 세계적인 사건처럼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척했지만, 추적에 나선 정부의 비밀헌병이나 지역 경찰, 또 그의 가족들이 고용한 사설탐정들이 이미 하루 전부터 톨스토이를 미행하여 같은 기차에 타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소식은 즉시 당시 수도인 생페테르부르그에 타전되었다.

병원은커녕 마땅한 숙소도 구할 수 없는 시골이었다. 급한 대로 자신이 사는 관사를 급히 비워준 역장은 톨스토이와 그 일행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자기 가족들을 부엌 한쪽에 조용히 머물게 하고, 외부인들이 함부로 접근하거나 주변에서 떠들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상황을 파악한 지역 군사령관은 다섯 명의 헌병을 파견해 관사를 지키게 하면서 파견장교에게 잠시도 ‘아스타포보역’를 벗어나지 말도록 지시했다. 지역 철도 책임자인 마트레넨스키 장군은 환자를 안전하게 지키는 데 자신의 직위까지 걸 생각이었다. 톨스토이를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트집거리를 찾는 일부 기관원들의 유치하고 억지스런 요구를 묵살하면서, 역을 지나가는 모든 기차들에는 기적을 울리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톨스토이가 최후에 머물렀던 아스타포보역 역장 관사. 1910년 당시 모습과 현재모습. 역 이름은 레프 톨스토이 역으로 바뀌었고, 이 집은 러시아연방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아스타포보박물관

밤이 되자 체온은 38도를 넘나들었다. 이튿날부터 하루에 한두 번 정차하는 기차를 이용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아스타포보역에 몰려들었다. 톨스토이가 병상에서 부른 문인들, 의사들 외에도 톨스토이의 개인적인 독자와 지지자들, 기자들, 정부의 정보원들과 관원들, 그리고 러시아정교회가 긴급히 파견한 고위 성직자까지.

11월 2일에는 톨스토이 가족과 측근들이 철도청으로부터 급히 임대한 특별열차 편으로 도착했다. 그곳에는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었으므로, 가족들은 이 특별열차를 역내 대피선에 세워 임시 숙소로 이용했다.

19~20세기 최대의 문호로 꼽히는 레프 니콜라예프 톨스토이(1828~1910)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톨스토이는 82세를 넘긴 1910년 10월 27일 자기 영지인 아스나야 폴라냐를 새벽녘에 ‘탈출’했다. 되도록 멀리 떠날 예정이었으나 누이동생이 있는 샤모르디노 수도원을 먼저 방문한 뒤 급히 다른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갑자기 열이 올라 예정에도 없던 아스타포보역에 하차했다.
톨스토이를 수행하던 맏딸 알렉산드리나가 뒤에 쓴 글을 통해 당시 역장 관사에서의 상황을 들어보자.

병환 중에도 레프 니콜라예프의 의식은 대체로 명료했다. 한순간도 주위 사람들을 잊지 않았고, 자신이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를 잊지 않았다. 한번은 아버지의 베개를 바로잡아 주었는데, 아버지는 “농군들이, 농군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며 울기 시작했다. 역장의 초라한 관사에 누워 있는 지금도, 죽어가는 농군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 속에 있다는 사실이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 분명했다. (중략)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아버지는 갑자기 베개에 기대어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에게 한 가지만 충고하마. 이 세상에는 레프 톨스토이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너희들은 레프 한 사람만 내내 바라보고 있구나.”

아버지는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웠다. 이것이 아버지가 내게 준 마지막 말이었다.

- 알렉산드리나 톨스타야, ‘아버지는 왜 야스나야 폴라냐를 떠났는가’ 중에서

러시아 작가 레오 톨스토이가 그의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프 톨스토이가 손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거목 톨스토이의 마지막 순간

톨스토이가 위중한 상태여서이기도 했지만, 아스타포보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었다. 수시로 열이 오르내리는 그에게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의사들은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아스타포보까지 달려왔지만 그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특히 각별한 의미가 있다. 부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톨스토이와 러시아정교회의 특명을 받고 달려온 지역 수도원장 바르소노피가 그들이다.

남편이 죽는 순간에 부인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기독교인 톨스토이가 종부성사를 거절했다고?
그렇다. 여기에 톨스토이의 남다른 최후가, 남다른 일생이 함축되어 있다.

로마정교회와 관련한 일을 먼저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1901년(73세)에 정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한 적이 있다. 톨스토이는 개혁을 거부하는 러시아 황제정권과 정교회에 대해 강한 비판을 계속해왔다. 이 무렵 정교회와 정부로부터 탄압(처형을 포함한)받고 있던 두호보르파 신교도들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후반기의 걸작 <부활>은 아예 이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집필했을 만큼 진지했다. 소설의 수익금을 신교도 2천여 명의 캐나다 망명자금으로 제공한 데다 작품 안에서도 러시아정교회의 위선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것이 ‘파문’ 결정의 주요한 구실이었다.

톨스토이는 정교회와의 화해를 거부했으며, 그런데도 그에 대한 대중의 존경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만일 톨스토이가 교회 앞에 반성문을 쓰고 돌아온다면 교회의 위신도 회복되었을 테지만 톨스토이는 반성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인간은 죽음 앞에서 약해지지 않는가.’ 러시아정교회가 아스타포보에 고위급 사제를 급파한 것은, 혹시나 ‘배교자 톨스토이’가 종부성사를 요청하면서 회심의 고백을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면담을 거절당했다.
톨스토이는 오히려 자기 수첩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혹시라도 거짓 소문이 만들어질지도 몰라서 분명히 해두는데,
내가 죽음이 임박해 교회 앞에 참회하고 성찬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임을 밝힌다.’

그렇다면 아내 소피아 안드레예브나는?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다면 톨스토이가 생애 마지막 시기에 쓴(1910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의 ‘비밀 일기’를 찾아 읽거나 그에 관한 전기를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 정거장(The Last Station)’이란 제목으로 2009년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 또는 그 원작소설도 좋다. 여기서 우선 핵심을 말하자면, 말년의 톨스토이가 자기 영지에서 갑자기 떠나온 것은 바로 아내 소피아를 피해서였다.

카잔의톨스토이 박물관 겸 교육센터
카잔의 톨스토이 박물관 겸 교육센터.  ⓒ카잔의 톨스토이 박물관

소문난 부부불화와 전격적인 ‘탈출’

부부는 본래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나 톨스토이가 50대에 접어들 때부터는 갈등이 심했다. 그 시기는 구체적으로 톨스토이가 도시 빈민들의 실상을 접하고 나서 빈민과 농민들을 위해 본격적인 구제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와 겹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귀족적인 생활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 깨달음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았으며, 되도록 말보다는 실천으로 그 신념을 지키려고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참회록>을 비롯하여 ‘성서’나 다른 경전들을 해석한 책들, ‘노자 도덕경’의 번역, 그리고 교훈적 내용이 들어간 동화와 우화를 쓰고 고전동화들을 쓰기 시작했다.

빈민구제를 위하여 자기 작품의 저작권들을 기증했고, 귀족들의 댄스파티에 가기보다는 자기 영지의 농민들과 함께 농사일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즐겼다. 영지 안에 작은 학교를 열어 농민의 아이들을 데려가 가르치기도 했고, 이를 위해 손수 교과서를 만들거나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나라의 교육제도를 직접 돌아다니며 알아보는 등 교육활동에도 힘썼다. 금주금연을 시작하고 채식주의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지의 농민(당시 ‘농노’라고도 부르던)들을 해방해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한다든지, 그들에게 농지를 나눠준다든지, 저작권을 비롯한 전 재산을 빈민과 사회에 내놓는다는 등의 계획을 밝히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톨스토이 운동’(지금까지 세계적인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이 시작되었으며, 명성은 더욱 퍼져나갔다. 그에 비례하여 다른 귀족들로부터의 시기와 질투가 자라나고 그에게서 약점을 잡으려는 정부의 감시와 견제가 강화되었다.

야스나야 폴라냐- 소피아와 가족들
왼쪽 소피아와 가족들. ⓒ야스나야 폴라냐박물관

하지만 무엇보다 큰 저항은 집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내인 소피아는 집으로 손님이 찾아올 때마다 남편이 그들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장이라도 작성하지 않을까 우려하여, 감시와 끼어들기로 대화를 방해하기도 했다. 간섭은 점차 노골화되고 심해졌다. 톨스토이가 차라리 가산을 놓아두고 아스나야 폴라냐를 떠나려 할 때는 자살소동도 벌어졌다. 첫번째 소동은 톨스토이가 55세 때 벌어졌다.

톨스토이는 아내의 재산에 대한 집착과 감시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연민 때문에 차마 집을 떠나지 못하면서 마음고생을 감내했다. 하지만 갈수록 갈등의 골은 깊어갔다. 소피아는 남편이 재산과 관련한 비밀유언장을 감춰둔 것이 없나 해서 남편의 서재를 뒤지거나 남편의 비서들과 목소리를 높여 다투기도 하고 저작권을 지키기 위해 그 자신의 이름으로 된 출판사 간판을 집안에 내걸기도 하였다.
1909년 스톡홀름에서 국제평화회의가 기획되었을 때 톨스토이는 기꺼이 초청에 응하여 중요한 연설을 하려 했지만, 소피아의 반대로 끝내 가지 못했다. 1900년대 세계가 격변하는 그 중요한 시기에 평화사상의 큰 지도자인 톨스토이는 고작 가족에게 발목이 잡혀 아스야나 폴라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82세의 가출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최후의 결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실제 ‘비밀유언장’은 그해 7월 22일 야스나야 폴라냐의 숲에서 작성되었는데(유서의 내용은 저작권을 ‘모든 이에게’ 개방한다는 식으로는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해석에 따라 모든 저작권 일체를 큰딸 알렉산드리아에게 위임한다는 내용으로 작성됨), 이를 알아낸 소피아는 거의 히스테릭한 상태에 돌입했다. 톨스토이가 7월부터 따로 적기 시작한 ‘비밀일기’를 보면 하루하루 전쟁 같은 나날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있거나 없거나 남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마당에 드러눕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톨스토이는 하루라도 편히 살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함을 느꼈다.

10월 27일, 소피아가 잠에서 깨어날까봐 불도 밝히지 못한 채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야밤의 탈주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긴박하게 이루어졌다. 아무 준비도 없이 한밤중에 갑자기 잠이 깨워진 큰딸 겸 비서 알렉산드리아와 그 친구 이바노프나가 두 사람을 배웅했고, 82세의 톨스토이는 마차로 자세카역에 도착한 뒤 아내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려고 가장 빠른 시간에 떠나는 화물열차를 잡아타고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

아스타포보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톨스토이는 소피아 안드레예브나를 줄곧 떠올렸다. 그러나 끝까지 그녀를 부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톨스토이에게 소피아가 바로 이곳에 와 있다고 말할 틈을 찾지 못했고, 소피아는 끝내 그의 손을 잡아보지 못했다.

숲속에 누워 있는 톨스토이, 일리야 레핀, 1891년
숲속에 누워 있는 톨스토이, 1891년. ⓒ일리야 레핀, 유화 

묘비 없는 무덤에 평범하게 묻히다

매일 환자의 용태를 적은 의사들의 메모가 건물 밖에 게시되었다. 그 내용은 러시아의 모든 신문에 중계되었다. 환자는 잠시 기운을 되찾는 듯도 했지만 11월 5일 밤부터 고열이 지속되었다. 환자는 온종일 혼수상태에서 신음을 내거나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새벽, 대기하던 가족과 친지들이 차례로 방에 들어가 임종한 뒤 아침 6시5분 톨스토이는 숨을 거두었다.

단 하나의 단어가 생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타전되었다. “서거”
누구도 그 단어의 의미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국자들은 이 죽음이 사회적 소요로 번질까 긴장하고 있었고, 시민들과 세계의 팬들은 애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까지 관사에서 조문받았다. 철도원들로부터 지역 농민, 군인, 주민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한 농부의 아낙은 머리 위로 어린아이를 치켜들고 외쳤다.

“이 사람을 기억해라.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해 살았다.”
한 청년이 외쳤다. “민중의 아들인 저는 러시아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의 사람입니다. … 당신은 이곳에서, 농민들 가운데서 죽게 된 것을 행복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이들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 더더욱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에 꽃을 바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고향 아스나야 폴라냐에 비석도 없이 가장 평범한 무덤으로 묻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하지만 장례열차가 아스타포보를 출발해 아스나야 폴라냐로 가는 길 내내 철로변과 육로는 도처에서 몰려든 인파와 그들이 가져온 화환, 꽃들로 뒤덮였다. 러시아의 문인 예술가들 대다수가 애도했고 가능하면 장례식에 참여했다.

톨스토이 장례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되었다. 서거 후 사흘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아스나야 폴라냐에 접근하는 교통이 물리적으로 통제되었다. 그런데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른 수단을 찾거나 혹은 걸어서 야스나야 폴라냐로 찾아왔다. 학생들도 있었고, 지식인들도 있었고, 인근의 농민들과 노동자들도 있었다. 장례위원으로 1백 명이 참석했다. 

- 당시 37세의 문학가 발레리 브류소프(V.Y. Bryusov)의 참가 기록

야스나야 폴라냐의 톨스토이 가족 사유지. ⓒ게티이미지뱅크

그 시각 이후로 아스타포보의 관사는 톨스토이가 있던 방에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채 보존되었고, 이후 역의 이름도 톨스토이역으로 바뀌었다. 모스크바와 아스나야 폴라냐에 박물관과 기념관이 세워지고, 그가 근무했거나 작품에 등장시킨 지역들(세바스토폴이나 카프카스, 사마라 같은)마다 기념관이나 기념 명칭들이 생겨났다.

그는 그 자신이 봉건 귀족이었음에도 전통적으로 농민 노동자들을 ‘지배’해온 황제의 권력이나 국교회의 위선에 대하여 개혁을 요구하고 농노해방을 지지함으로써 귀족들보다는 민초들에게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봉건제도란, 황제나 왕 아래 ‘공-후-백-자-남’의 귀족 영주들이 국토와 권리를 분할해 다스리는 제도다. 수천에서 수만까지 각자 자기 영지의 백성을 거느린 귀족 영주들은 왕권의 대주주 격이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영주들의 지지와 협력이 없이는 종이호랑이가 되고 만다. 때로는 귀족들 사이에서 왕이 추대되기도 한다. 톨스토이는 그중에서도 공작 외가와 백작 친가의 혈통을 가진 강력한 귀족이었다. 게다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같은 블록버스터급 명작소설의 작가로서 러시아는 물론 유럽사회와 아시아까지 폭넓은 인기와 지명도를 얻고 있는 유력자였다.

생페테르부르그에서는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사람이 있는 웬만한 도시에서는) 톨스토이가 자기 모습을 숨길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찾아와 인사했으며, 더러는 순식간에 군중이 모여들어 그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가진 힘을 당시 언론인 알렉산드르 수보린은 이렇게 평했다.

우리에게는 두 명의 황제가 있다. 니콜라이 2세(황제)와 레프 톨스토이다. 둘 중에 누가 더 힘이 센가. 니콜라이 2세는 톨스토이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의 왕관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니콜라이의 왕관과 왕조를 확실히 흔들고 있다.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저주하고 교회는 그를 파문시켰다. 톨스토이는 그에 응답했다. 그의 응답은 글을 통해, 또 외국 언론을 통해 퍼지고 있다. 톨스토이를 건드리려고 해보라. 전 세계가 소리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정부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야 할 것이다.

- 언론인 알렉산드르 수보린(1901년 5월)

1900년 전후는 유럽을 휩쓴 시민혁명의 물결이 러시아까지도 밀려들어 오던 때다. 젊은 장교들의 쿠데타 미수사건(1825년)을 시작으로 농민혁명과 프롤레타리아혁명(1917)까지 일련의 긴장된 사건들이 1백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 시기에, 개혁사상가이자 농민들의 수호자인 톨스토이의 이름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배층에게는 ‘뜨거운 감자’였고, 민초들에게는 가장 존경하는 이름이었다.

귀족층들로부터 그를 헐뜯는 이야기가 많이 생산되었지만, 당대 귀족들의 실상이 어떠했는가. 대놓고 톨스토이를 비난할 자격이나 능력을 갖춘 귀족은 거의 없었다. 사치향락의 권리를 잃고 싶지 않은 귀족들은 겨우 뒷전에서 익명의 음해공격을 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익명의 음해, 투서, 가짜뉴스들이 난무했다. 발신자 주소를 꾸며서 보내오는 비난과 협박의 편지나 소포들도 받았다. 

ⓒ게티이미지뱅크
톨스토이 공원 기념비. ⓒ게티이미지뱅크

비폭력 무저항- ‘사티그라하’의 비조

예를 들어 우리가 지리산에 관해 이야기 한다고 비유해보자.

백무동을 다녀온 사람도, 뱀사골을 다녀온 사람도, 피아골을 다녀온 사람도 모두 지리산을 보고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천왕봉이나 노고단이나 바래봉 또는 만복대나 반야봉에 오른 경험으로 지리산을 이야기하려고 할 것이다. 계곡 이야기끼리도 다 같지 않고, 봉우리 이야기끼리도 다 같지 않다. 모두 지리산에 관한 사실적 이야기지만 지리산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 되지는 못한다.

톨스토이는 거대한 산과도 같아서 어떤 부분부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를 정하기가 쉽지 않다. 시대의 걸작을 낳은 대문호, 위대한 사상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아나키스트), 존경받은 권력자, 박애사상가이자 구제(자선)운동가, 뛰어난 교육자(그가 세운 톨스토이 학교가 당대 농촌에 수백개나 세워지기도 했다), 세계적 지성, 자연주의자… 여기까지 얘길 하고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아직 빠져있는 것 같다. 정치개혁 종교개혁 사회개혁, 그리고 인간 자신의 양심적 거듭남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온몸으로 실천하려는 노력이 그의 중요성과 진정성을 스스로 증명했다. 자기 재산의 사회 기부나 농사일의 실천, 정치권력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용기 같은 것들은 그 단면이다.

그는 평화주의자였다. 톨스토이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권력자들이 걱정했던 집단소요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교통통제를 뚫고 하관식에 참가한 사람들만큼은 톨스토이의 진지한 지지자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줄곧 설파한 것은 폭력적 수단을 불사하는 외형적 혁명이 아니라, 양심의 회복을 통한 진정한 내적 혁명, 그리고 수단으로서는 비폭력무저항의 방법이었다. 후일 그의 비폭력무저항 정신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인도인들을 이끈 사티그라하(비폭력무저항, 1919년)의 원칙에 잘 나타났고,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1929~1968)에게도 이어졌다. 이것은 톨스토이가 민초들의 권리, 인간의 평등, 기득권의 혁신을 똑같이 요구하면서도 볼셰비키들(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정파)과 다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작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은 1917년에, 톨스토이 유산의 관리자였던 딸 알렉산드리아는 3년 형을 받고 모스크바의 한 수도원에 유폐되기도 했고, 1929년에는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그의 측근들과 지지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파리 런던 또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러시아 툴라 지방 야스나야 폴리아나에는 레오 톨스토이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야스나야 폴리아나 국립박물관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톨스토이와 함께한 예술가들

톨스토이 노년에 그의 삽화를 주로 그렸던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의 아들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다. 보리스의 대표작 ‘닥터 지바고’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자주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노벨문학상과 평화상에 해마다 추천되면서도 그것을 받지 못했으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1958년 스웨덴 한림원이 떠안긴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됐다.

톨스토이는 음악을 사랑했다. 동시대인인 차이코프스키(1840~1893)와도 교분이 두터웠는데, 차이코프스키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톨스토이야말로 동서고금 최고의 작가이자 예술가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평했다. 차이코프스키가 가르치는 러시아음악원의 샬리아핀은 톨스토이의 집에서 열리는 하우스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자주 쳤으며, 아직 학생이었던 라흐마니노프는 떨리는 마음으로 톨스토이 앞에서 ‘베토벤 9번’을 연주했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집에는 두 대의 피아노가 있었고, 그 자신이 자주 취미연주를 했다. 

젊은 판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생리학의 대가 메치니코프(1845~1916)와의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메치니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 재직할 때 톨스토이와 친해졌고, 지역 판사인 형과 함께 어울리며 법정 얘기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톨스토이와 개인적 연분이 없는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은 이 소설을 보고 나서 “여기 비하면 나의 작품 열 권이 전혀 가치 없게 느껴진다”고 극찬했다.

러시아 혁명 후 파리로 망명해 살았던 노벨문학상 작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1870~1953)은 젊은 시절 톨스토이를 자주 방문한 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1937년에 <톨스토이의 해방>이라는 평전 성격의 회고집을 남겼다.

당대 러시아의 3대 문호로 이반 투르게네프(1818년생), 도스토옙스키(1821년생)와 톨스토이(1828년생)가 꼽힌다.
투르게네프는 생애의 많은 부분을 독일과 프랑스에서 지낸 서구적이며 진보적인 성향의 문인이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며 슬라브-민족주의에 가까운 성향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와 마주친 적이 없으며, 어쩌면 의도적으로 피한 듯한 정황들도 전해진다. 투르게네프와는 33세 때 파리에서 만난 뒤 교유가 시작되었는데, 열 살 더 많은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가 사회운동에 천착할 때마다 “순수한 소설가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충고하곤 했다.

1901년 작품 ‘부활’을 출간하고 러시아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 뒤 톨스토이는 건강이 나빠져 흑해 지역으로 요양을 떠난 적이 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젊은 소설가 안톤 체홉과 막심 고리키가 찾아왔다. 막심 고리키는 좌파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후일 살상을 일삼는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향해 사람들을 죽이지 말라며, 저 유명한 칼럼을 통해 “우리가 형제들을 죽이려고 혁명했는가?”라고 ‘질타’했다.

서재에서 작업중인 톨스토이, 일리야 레핀 작품. ⓒ게티이미지뱅크

톨스토이는 ‘노자 도덕경’ 번역 외에도 ‘4복음서의 통합판’이나 부처의 가르침 등 종교의 경전들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풀이한 책들을 썼다. 그가 남긴 작품은 권수로만 450권을 넘는다. 이런 작업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성서 구절을 딴 책 제목일 것이다.

러시아의 소비에트 시절, 톨스토이의 무덤은 변변한 안내판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채 잡초에 묻혀있었다.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자유로워진 여행길을 따라 톨스토이의 독자들이 전 세계로부터 야스나야 폴라냐를 찾기 시작하면서 톨스토이 관련 유적들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와 함께 제정시대부터 소비에트 시대까지 줄곧 공개가 금지되어 있던 문서, 삭제되었던 문장들이 100년 세월의 빗장을 열고 비로소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문호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에 대해 그동안 많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1백여 년이 지나서야 인류는 톨스토이의 사상을 재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큐레이터 & 도슨트 = 정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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