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의 以目視目] 멈출 줄 몰라 지쳐 죽은 사나이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0.20 11:55
  • 수정 2022.10.20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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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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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 남는 것이 싫어서 그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빨리 걷기 시작했는데 움직일수록 오히려 발자국은 늘어났고, 아무리 빨리 달아나도 그림자는 떼어놓을 수가 없었지요.

‘내가 아직 느리구나’라고 생각한 그 사내는 더욱 빨리 걷다가 이제는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지요. 발자국은 그가 속도를 내는 만큼 빠르게 좇아왔고 그림자도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더 빨리 질주하던 사내는 결국 숨이 차서 쓰러져 죽고 말았답니다.”

疾走不休 絶力而死 (질주불휴 절력이사: 쉬지 않고 달리다가 힘이 다해 죽다)
<장자> ‘어부’편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멈출 줄 몰라 지쳐 죽은 사나이’이야기는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리 황당하지만은 않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일이 많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이 비유를 읽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오래 전 어느 지인의 일이 떠오른다. 아직 자가용 승용차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인데 아는 사람의 소개로 중고차를 인수해 ‘마이카족’ 대열에 들어섰다. 도로 운전 경험이 전혀 없어 차를 잘 모셔만 두다가 어느 휴일 아침 마침내 용기를 내서 시운전에 나섰더란다. 시내도로를 어찌어찌 움직여 가다보니 슬슬 재미도 느껴졌다. 그런데 곧 고속도로 진입로가 나왔다. 순간, ‘휴일이겠다 운전에 재미도 느껴지겠다’ 내친 김에 좀 달려보고 싶다는 유혹이 생겨 겁도 없이 고속도로로 들어섰다는데. 그는 곧 그것이 실수임을 깨달았다. 다른 차들이 어찌나 빠르게 내달리는지.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차를 세울 수도 없고, 하여 그 차들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같이 달릴 수밖에 없더란다. 앞만 보고 그렇게 달리다 보니 수원이 지나가고 오산이 스쳐갔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고속도로도 달릴만하군’ 하는 여유를 느끼노라니 드는 생각은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지’하는 것이었단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행선을 벗어나 상행선으로 바꿔 타고 다시 집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차를 멈추고 연구해보고도 싶었지만, 쌩쌩 달리는 다른 차들 탓에 하다못해 눈앞에 나타나는 휴게소에 진입하는 것마저도 어려웠단다. 몇 개의 휴게소와 톨게이트 진출 램프를 놓친 끝에야 이정표를 잘 보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차선을 미리 바꾸면서 벗어날 준비를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겨우 벗어난 곳이 대전이었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지만 이런 해프닝을 거친 뒤에 그는 고속도로를 잘 달리고 잘 빠져나오는 요령을 알게 되어 돌아오는 길은 두렵지 않게 올 수 있었다.

멈출 줄을 몰라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니. 지나고 나서야 웃고 말하지만, 지금 그 시간 안에 들어있는 초보 운전자 자신은 얼마나 긴장되고 두려웠을지 상상해보라. 어떤 상황에 빠져 있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도무지 없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매우 캄캄하고 잔혹한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곁에서 바라보는 다른 이에게,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을 벗어난 뒤의 자기 자신에게도, 이 모습은 애처럽지만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마련이다. 중요한 건 이런 일이 얼마든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장자> 속의 어부는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움직여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가면 자신의 그림자는 쉽게 사라질 것이고, 차라리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있으면 발자국도 더 이상은 생기지 않을 터인데, 그것을 모르고 달아나려고만 하다니 그 사내는 어리석음이 지나쳤던 것입니다.

그래도 옳은 일은 한시도 멈추지 말아야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이라면 몸이 수고롭더라도 계속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의 주관으로는 절대 중요한 일이지만 다른 대중들에게는 전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부가 이 비유로 어리석음을 깨우치려 한 상대는 심지어 공자(孔子)였으니.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은 제멋에 빠져 그것이 정말 중요하고 명분 있는 일인가,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인가를 전혀 반성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의 십중팔구는 거기에 자기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또 한 개인의 뒷면을 상징할 수도 있다. 쉽게 보이는 표면의 이면,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흑역사’ 같은 것 말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수치스런 과오나 거짓을 불가피하게 저질렀을 때, 그것을 애써 감추려고 하다보면 더 많은 거짓을 저지르게 되는 수가 있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그것을 아는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을 죽인 죄를 덮어씌울 또 다른 누군가를 물색하고, 그러면서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고 만다. 자신은 아주 감쪽같이 세상을 속였다고 생각할 테지만, 천하가 다 그의 그림자를 알고 비웃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일단 멈춰 서서 생각해보는 게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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