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스토리박물관14] 문명관: 세계일주③...운하와 대륙철도, 여행의 대중화시대 열어

정해용 기자
  • 입력 2022.12.26 12:30
  • 수정 2022.12.2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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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1백년간 단독항해 134명… 지금은 한 해 5명꼴
단독 요트일주 ‘명예의 전당’엔 70대 우승자들도 많아
세계일주 단체패키지 1872년에 첫선… 배와 기차로 222일 걸려
YMCA,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등 청소년 여행에 도움

실종된 ‘항해의 전설’… 그러나 도전은 계속된다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아무리 놀라운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감흥이 시들게 마련이다. 농장에서의 정착생활도 점차 지루해졌을지 모른다. 단독일주로부터 10년이 지난 1909년 11월, 어느덧 75세가 된 조슈아 슬로컴은 여느 겨울처럼 남쪽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리브해가 아니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 오리노코강 리오네그로와 아마존 등을 탐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 7월, 그는 가족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것이 슬로컴의 최후다.

단독일주 기록을 세운 슬로컴의 이름은 장거리 수중탐사항행장비(Underwater Glider)에도 붙여졌다. 길이 10m가 안 되는 이 장비들은 대양을 수천km씩 혼자서 이동하며 해양환경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송해준다. 퍼블릭도메인

그의 이름은 전설이 되었다. 슬로컴의 단독 일주에 고무된 많은 모험가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20세기에는 몇 개의 골든 글로브 요트대회도 창설되었다. 특히 세계일주에 도전하는 요트 항해자들에게는 ‘쥘 베른 컵’이나 ‘조슈아 슬로컴 컵’ 등이 가장 전통 있고 명예로운 트로피로 여겨진다. 항해에 관한 모든 신기록은 그때마다 슬로컴의 기록과 비교된다.

그의 이름은 모든 장거리 항해인에게 수호성자처럼 받들어져 많은 사람이 자신의 배에 조슈아, 또는 슬로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이름을 딴 장거리 해양수중탐사장비는 수천 킬로의 수역을 혼자서 이동하며 실시간 연속탐사를 수행한다.

1968~1968년, 사상 최초로 312일의 논스톱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한 로빈 녹스와 14톤급 요트 수하일리호. 로빈 녹스-존스톤 홈페이지

1898년 슬로컴의 단독 일주 항해는 3년 2개월 열흘이 걸렸지만,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는 그 기록을 312일로, 거의 1/4에 가깝게 단축했다. 70년의 세월이 지나며 배의 성능이나 항해장비가 좋아진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논스톱 일주’였다는 점이다. 조슈아 슬로컴의 항해는 단지 ‘빠르게 돌기’에 목표를 맞춘 것이 아니었다. 기상 환경에 따라 기항지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또 낯선 세계에 체류하며 스케치나 여행기를 쓰는 데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로빈 녹스는 ‘선데이 타임즈’가 마련한 골든 글로브 항해대회에 참가하여 속도기록을 남기는 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최대의 속도로 동쪽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중간 체크포인트에서 필수품을 보급받을 때 외에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최초의 ‘논스톱 항해’이기도 했다.

다시 50년이 지난 2016년에 로빈 녹스의 논스톱 일주 50주년을 기념하는 논스톱 단독일주 요트 항해대회가 다시 열렸다. 1백 명이 넘는 각국의 레이서들이 참가했지만, 대다수가 인도양에서, 그리고 일부는 태평양에서 좌초하거나 포기하거나 침몰해 구조되면서 탈락하고 단 2~3척만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우승자는 74세의 프랑스인 장뤽 반 덴 히데였다. 새 기록은 211일 23시간이었고, 그와 동시에 최고령 논스톱 단독항해자로도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67세에도 이미 논스톱 단독항해로 로빈 녹스의 기록을 경신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인 반 덴 히드는 73세의 나이에 논스톱 단독일주 항해에 성공하여 이 분야 최고령 신기록을 수립했다. (AFP, 게티이미지 뱅크)
프랑스인 반 덴 히드는 73세의 나이에 논스톱 단독일주 항해에 성공하여 이 분야 최고령 신기록을 수립했다. 프랑스인 반 덴 히드 페이스북

단축된 일주코스, 세 바퀴 논스톱 항해 기록도

요트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싶지만, 항해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최소 2~3백일) 망설이던 사람들에게는 1914년 개통된 파나마운하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운하는 1869년에 이미 개통되어 쥘 베른의 작중인물 필리어스 포그의 여행에도 등장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미국의 대륙횡단 열차를 이용하거나 배라면 남아메리카 남단의 혼곶까지 돌아가야만 했는데, 수에즈운하가 생겨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운하를 거치는 단축항로를 이용하는 요트 레이서들은 기존항로보다 시간을 다시 1/4까지 줄일 수 있었다. 21세기로 들어선 지금까지 단축항로를 이용한 세계일주의 가장 빠른 기록은 2017년 겨울 프랑스인 프랑수아 가버가 세운 42일 16시간이다.

항해 소요기간이 짧아지자 오히려 세계일주가 싱겁게 느껴진 사람들도 있었다. 단독항해 일주로도 모자라 두 바퀴, 세 바퀴를 계속해 도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1970년부터 2021년까지 지구를 11바퀴나 돈 세계일주 매니아 존 샌더스는, 그중 세 바퀴는 배에서 내리지 않는 논스톱으로 항해를 계속하기도 했다. 이 세 바퀴 논스톱 항해에 걸린 시간은 657일 21시간(7만1천 해리)이었다. 지금까지 논스톱 단독항해 분야의 최장거리 기록이다. 그는 78세에도 거의 단독으로 10번째 일주를 마쳤고, 단독은 아니지만 11번째 일주항해를 마친 2021년에는 81세였다.

1900년 무렵의 세계일주 항해 코스(위)와 20세기 중반부터의 항해 코스 비교(붉은 선). 종래에는 선박들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를 대륙 남단까지 내려가 우회하였으나, 1869년 수에즈운하, 1914년 개통되면서 세계일주 항해코스는 두 운하, 또는 그중 하나를 통과하는 것으로 표준이 바뀌었다. 퍼블릭도메인

1987년 호주의 요트선수 서지 테스타(Serge Testa)의 단독항해는 지금까지 가장 작은 배를 이용한 세계일주로 기록되었다. 5백일 간의 일주 항해에 사용한 요트 ‘아크로 오스트랄리스’는 길이 11.1피트(약 3.61m)에 불과하다.

미국의 핵잠수함 트라이튼은 1960년 최초의 수중 세계 일주를 기록했다. 핵연료를 사용하여 최대 50일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성능을 과시한 것이다. 북극점에 도달하기 위해 북극 빙하 아래를 항해하는 모험도 바로 이 잠수함이 수행한 것이었는데, 실제에선 빙하의 뿌리가 너무 깊이까지 있었기 때문에 가장 낮은 곳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빙하 아래 갇혀 냉동될 뻔한 위기도 겪었다. 66년에는 소련의 잠수함들도(K-133, K-116) 수중 일주를 완수하며 대응능력을 보여주었다.

1847년 포츠머스항에 귀항한 영국해군의 ‘드라이버’호는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동력선’이다. 1841년 인도양을 지나 중국해역에 파견됐던(‘아편전쟁’ 시기) 1천 톤의 증기선 드라이버는 이후 뉴질랜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남미대륙 케이프 혼을 돌아 7년 만에 귀국했다. 이는 계획에도 없던 세계일주가 되었다.

계획에 의한 세계일주로 동력선 분야 첫 기록을 세운 배는 1853년의 ‘아르고’호다. 1,800톤 77미터 크기, 정원 210명의 대형증기선으로, 300마력의 엔진과 돛을 함께 사용하여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호주 멜버른을 거쳐 일주를 마치는 데 127일이 걸렸다. 지금까지 동력선 분야 최고기록은 2009년 스페인의 ‘얼스레이스’가 기록한 60일 23시간 49분이다.

‘함께 떠나요’ 세계일주 패키지여행의 탄생

영국 ‘토마스 쿡 & 선’ 여행사의 나일강 항해관광패키지 광고(1922년). 이 여행사는 1872년에 이미 세계일주 패키지를 판매했다. 소그룹 단체가 기차와 기선으로 세계를 한 바퀴 돌아오는 데 222일이 걸렸다.

대형 증기선에 의한 세계일주 기록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게 했다. 직업적 뱃사람이나 모험가가 아니더라도 안전하게 제작된 대형 증기선을 타고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1900년 즈음에는 호기심이 있고 경제력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업적인 장거리 여객선(대개 상선을 겸하여 승객을 태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을 타고 다른 대륙으로 향할 수 있었다.

1900년 초기까지도 장거리 운항을 하는 군함이나 상선들이 겨우 1천 톤 안팎이었던 걸 보면, 우리는 일반인의 안전한 크루즈 여행이 그보다 한층 뒤늦게 시작되었을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런데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그린 1872년 가을에 이미 대륙 사이를 운항하는 장거리 여객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뿐 아니라, 순수한 유람 목적의 관광객들이 장거리 여객선과 대륙횡단 철도를 이용해 세계를 일주하는 단체관광 패키지 상품이 1872년에 실제로 판매되었다. 사실 쥘 베른이 어떤 신문광고를 보고 착안하여 상상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소설의 모델이 된 신문광고의 실제 세계일주 여행 패키지에 관심을 가질만하다.

1872년 최초로 세계일주 단체관광 패키지를 판매했던 토마스 쿡 여행사는 이후 여행업과 항공업을 겸하여 20세기 세계를 대표하는 관광여행사 그룹이 되었다. 퍼블릭도메인

당시 런던에서 토머스 쿡(Thomas Cook, 1808~1892)은 이미 지중해나 나일강, 아메리카, 인도 등 인기지역을 여행하는 단체관광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수에즈운하가 개통되고 미국과 인도에 잇달아 횡단철도가 생기자, 그는 이러한 ‘현대적 수단’들을 모두 연결하는 세계일주 패키지 관광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인도,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 주요 지역에 영국의 식민 도시들이 생기면서 안전하게 경유할 수 있는 관광거점이 확보된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유럽 친화적으로 개방된 일본의 요코하마 항구도 있었다.

런던의 부유층을 상대로 관광객이 모집되자 쿡은 자신이 직접 가이드가 되어 222일간의 여정을 인도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항해를 시작해 대서양을 건너고, 뉴욕에서는 침대열차를 타고 대륙을 관통했으며, 샌프란시스코항에서 다시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한 달 가까운 항해에 지쳤을 때, 배는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했다. 유럽에선 볼 수 없는 동양의 음식, 풍습, 예술, 가부키공연 등이 유럽의 영향력 있는 부자들에게 얼마나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을지 짐작할만하다. 19세기 말 유럽에 전파된 자포니즘(일본풍)도 이들을 따라 프랑스와 영국에 전해졌을 것이다. 다시 말레이시아와 인도 대륙열차를 거치고, 인도양-홍해-수에즈운하를 통해 이들은 유럽으로 돌아갔다.

세계 최초의 전문여행사를 세운 영국인 토머스 쿡. (1892년) ⓒGNU free

본래 침례교 전도사이던 토머스 쿡은 당시 영국에서 일고 있던 ‘금주동맹’ 캠페인(1941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음주문화가 성행하여 폭력과 가정파괴 같은 사회문제가 심각하던 무렵이다. 60년대에 쿡은 ‘금주서약’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힐링캠프 성격의 단체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이 주는 유익이 컸던 데다가 단체 여행이 철도회사나 선박회사들에도 이익이 되었으므로 본격적인 사업으로 확장된 것이다. 토마스 쿡의 여행사는 교통 숙박 음식 관광 등을 미리 할인가로 묶어 관광객을 모집하는 패키지 투어를 창안했다. 개인들이 각각의 여유시간, 비용,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코스별 상품들이 나와 20세기를 ‘대중여행의 시대’로 이끌었다. 선박을 이용한 크루즈 투어나 긴 항해시간에 이용할 수 있는 선상 프로그램들도 개발하였다. 여행사 설립 붐이 일었고 유사한 상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1892년에 토머스 쿡은 24개의 그룹을 조직하여 세계일주를 마쳤으며 참여인원은 1천명이나 되었다.

‘토머스 쿡 앤 선(Thomas Cook & Son)’은 가히 20세기 세계 여행업계의 전설이자 선도적 여행사가 되었다. 이후 항공사와 여행사, 호텔 등을 운영하는 종합 여행사 그룹으로 확장되었으나, 21세기 들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영난에 빠져 2016년 공식 파산하였다. 창업 178년만이었다. 이후 중국 투자회사 푸싱그룹이 토마스 쿡 그룹의 일부를 인수한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이후 결과는 알 수 없다(때마침 코로나 펜데믹이 터졌다).

예술가들의 세계일주, 인류를 하나로 묶다

여행을 많이 하는 직업군(群)이 있다. 여행과 운송업 종사자들은 예외로 하더라도, 그들 못지않게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역하는 상인들, 답사해야 하는 역사학 고고학 생물학자들, 다양한 수집가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사진가와 문학 작가, 화가, 투어를 다니는 음악가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와 사진가들은 자신의 여행과정 자체를 기록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인상적인 흔적을 남긴다.

여행사에 의해 설계된 상품이 등장하면서 여행은 대중화되었다. 대개 넉넉한 시간과 경제력을 가진 부유층들이 먼저였지만, 유명작가나 기자들은 출판 매체들의 지원을 받아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작가들이 연재하거나 출판하는 여행기는 세계일주에 들어가는 여행비용을 뽑고도 남을 만큼 인기리에 팔렸던 것 같다.

한동안 ‘발명사업’에 미쳐 많은 재산을 털어 넣고 빚까지 지게 된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그 빚을 갚기 위해 1895년과 1897년 강연여행을 겸한 세계일주 여행을 했다. 그보다 앞서 여행기의 인기를 입증한 사람은 미국 정치인 율리시스 크랜트의 일주여행(1877~1879)이었다(뒤에 대통령이 됨).

러시아의 노벨상 작가 이반 부닌은 세계일주 여행의 경험을 살려 소설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를 쓴다. 몇 날 몇 달을 호화 유람선에서 생활하며, 매일 똑같은 바다, 매일 밤 호화로운 음식과 음악, 파티를 위해 옷을 갈아입는 생활이 마침내 지겨워진다는 것을 극적인 구성으로 그려냈다. ‘끝날 줄 모르는 즐거움의 순환은 승객들을 녹초로 만들고, 배의 엔진은 다시 수고롭게 어둠과 대양과 눈보라를 헤치고 있다.’ 항공기가 등장하면서 대양을 건너는 장기 크루즈항해의 인기가 시들해진 데에는 이러한 원인(지루함)도 있었을 것이다.

<80일간의 세계여행>이 준 감동의 여파도 오래까지 여운이 남았다. 프랑스의 장 콕토는 1936년 뒤늦게 연극무대에 올려진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보고 크게 흥미를 느꼈다. 아는 사이였던 <파리 수아르> 잡지사의 편집장이 ‘쥘 베른 탄생 100주년’이라는 구실을 붙여 80일간의 세계일주 재현한다면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쥘 베른의 1백 번째 생일은 1928년에 지났지만, 콕토는 친구 마스렛 킬과 함께 80일간의 여정에 나섰다. 그러나 긴장감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지체된 일정을 따라잡기 위해 항공기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특약조항을 이용해, 장 콕토는 느긋한 여행 뒤에 마지막에는 비행기를 타고 미 대륙과 대서양을 건넜다.

1936년 세계일주 여행 중 일본에 들른 장 콕토(가운데). 왼쪽은 유럽과 중남미 체류 경험이 있는 일본 시인 호리구치 다이가쿠(堀口大學). 퍼블릭도메인

쥘 베른의 진짜 100번째 생일(1928년)에 필리어스 포그의 여행 경로를 따라 혼자 여행을 한 사람은 17세의 네덜란드 소년이었다. 네덜란드의 두 신문사가 공동으로 기획한 세계일주 이벤트에는 1백명 넘는 소년들이 몰려들었는데, 영어와 독일어가 가능한 소년들 가운데 에세이 시험을 거쳐 선발된 두 사람을 놓고 제비뽑기까지 간 끝에 선발된 팔레 훌트라는 빨간 머리 소년이었다.

1900년대 초반 대서양과 태평양을 운항하던 ‘함부르크-아메리칸 라인’의 1만 7천 톤급 크루즈선 여행상품광고 포스터(1913년). 파나마운하를 통해 카리브해 국가들과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함부르크까지 다녀오는 135일의 패키지가 900달러 이상이라고 소개한다. 퍼블릭도메인

훌트는 매일 일기를 쓰고, 기착지마다 우편이나 전신으로 보고서를 보내라는 등의 규칙을 전달받은 뒤에 코펜하겐에서 출발했다. 사실 혼자 다닌다는 규칙이 좀 까다롭게 보였을 뿐, 이 여행은 충분히 안전하고 심심할 겨를이 없는 여행이었다. 캐나다 철도 회사가 스폰서가 되었고, 여행기간 내내 두 신문이 계속 여행기를 실었으며, 무엇보다 소년은 ‘보이스카우트’ 단원이었다. 여행기간 44일 동안 그는 머무는 모든 도시에서 현지의 보이스카우트 임원이나 단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저 낯선 도쿄부터 바르샤바까지 가는 곳마다 스카우트 연맹이 있었다. 기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여행기의 마지막에는 ‘스카우트는 어디에나 집이 있다’는 문장이 실렸다.

년부터 5년에 걸쳐 자전거로 세계를 일주한 인도의 세 청년(아디 하킴, 잘 바파솔라, 루스톰 붐가라) 보디빌딩 회원들은 가는 곳마다 YMCA 지부에서 묵었다. 사실 20세기 여행에서 국제적 연대를 가진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YMCA, YWCA, 국제적십자소년단(RCY), 그 밖에도 성인 사업가들의 친목 조직인 국제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클럽 등등 민간기구들의 역할은 절대 작지 않다. 어느 기구에도 속하지 않은 청소년들을 위한 유스호스텔 같은 체인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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