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류광철 前 짐바브웨 대사 “세계정세에 맞춰 외교지도도 바꿔야”

김경 기자
  • 입력 2019.11.19 09:15
  • 수정 2021.06.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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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김경 기자】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요즘, 한국의 외교 상황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에 지난 11월 9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전직 외교관 한 분을 만나 고견을 들어보았다.

주 이라크 대사대리, 주 아제르바이잔 대사, 주 짐바브웨 대사(잠비아, 말라위, 모잠비크 겸임), 본부대사,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 등을 역임하신 류광철 선생님이다. 류 선생님은 서울대 독문과와 인디애나대 행정학과를 나왔고 1981년 외무고시로 입부한 후 2014년 정년퇴임까지 33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다. 재임 기간 중 22년 남짓 해외에서 근무하며 양자 및 다자외교를 두루 섭렵했고, 정년퇴임 뒤에는 신한대학교 석좌교수 겸 국제교류원장, 조선대 초빙객원교수, 국립외교원 명예교수 등을 거쳤으며, 2015년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자문대사와 2019년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 집행위 부위원장직도 지냈다.

Q : 안녕하십니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도 휴식은 뒷전이라고 전해들은 바 있습니다만, 요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A : 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임 중에도 몇 권의 책을 낸 바 있지만, 퇴임 후에는 주로 책을 냈습니다. <외교를 생각한다>, <아프리카를 말한다>, <사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 <통치와 광기>, <살아있는 공포 아프리카의 폭군들> 등 11권의 저서를 발간했지요. 최근에는 서울시의 제1기 정책 컨설턴트로 임명되어서 이제 서울시의 일도 좀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프리카는 기회의 땅

Q : 아프리카에 관한 저술을 많이 내셨군요.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A : 제가 아프리카에서 대사를 지낸 것이 큰 이유지만, 우리가 아프리카 대륙을 너무 등한시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계지도를 보면 아프리카 대륙이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에 위아래에 있는 대륙보다 상대적으로 좁게 보입니다만, 실제는 세계 2위, 3위, 4위의 면적을 가진 캐나다, 미국, 중국을 합한 면적보다 더 넓은 땅입니다. 면적만 넓은 게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아프리카라고 하면 사막이나 정글만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살기 좋고 쓸모 있는 땅도 얼마든지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환경과 문화가 혼재합니다. 즉, 기회의 땅입니다. 중국은 지금 약 2백만 가까운 인구를 투입할 정도로 아프리카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세계는 아프리카를 외면할 수 없을 겁니다.

Q : 그렇군요. 아프리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랄까...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요즘 혼란스러운 ‘국제질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국제정세가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A : 그 이야기라면 몇 시간이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만, 당장 손에 잡을 수 있는 어떤 답을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보다 전문적으로 심도 있게 논해야 할 주제이거든요. 오늘은 그저 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관계의 근본적인 바탕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외교관이 하는 모든 일, 말, 행동은 ‘국익’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

Q : 선생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선 선생님은 왜 외교관이 되었고 또 외교란 무엇인가요?

A : 아주 편안한 질문입니다. 외교란 국가 간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 아닙니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세상사 대부분을 결정짓듯이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무생물이고 실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살아 있는 생동감이 전해지는 생물과 같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죠.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각 나라 선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을 합니까? 우리는 또 이 장면을 지켜보면서 철저하게 국가라는 한 몸으로 빠져들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외교의 요체입니다. 국가를 자기 몸처럼 아끼고 지키며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외교의 역할입니다. 외교는 국가 간의 관계이므로 국가적인 이슈를 다루게 되는데, 현장에서 이를 직접 다루는 주체는 사람, 즉 외교관입니다.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 선수나 마찬가지입니다. 스포츠에 축구, 야구, 농구와 같은 여러 종목이 있듯이 외교도 요즘은 종목이 세분화되어 분야별로 대표선수가 달라집니다. 그렇다 해도 어느 분야든 외교관은 한국의 대표선수이지 다른 나라의 대표선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외교관이 어떤 나라를 특별히 좋아하고 그 나라 사람과 제아무리 친해도 한국 외교관인 이상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을 넘어설 수는 없지요. 외교관의 지상 과제는 국익입니다. 한국 외교관이 한국의 국익을 지키고 신장시키지 못하면 외교라는 용어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허한 거품일 뿐입니다. 외교관이 하는 모든 일, 모든 말과 행동은 ‘국익’이라는 한 단어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외교란, 국가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

Q : 외교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A : 국가의 기능 가운데 외교가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왜 중요한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간단치는 않습니다. 세계에는 240여개에 달하는 많은 국가들이 있는데, 국가 간의 관계가 좋아야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 나라와의 관계는 특히 중요합니다. 이웃 나라와 사이가 나빠 으르렁거리게 되면 가장 먼저 국민이 불안해합니다. 개인도 이웃 간에 사이가 좋아야 평화롭게 잘 지낼 수 있듯이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웃 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흔하고, 그 때문에 국민들이 불안을 겪는 사례가 많습니다. 평화와 안정이 유지되어야 개인도 생업이 번창하고 풍요를 누릴 수 있듯이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나라와 사이가 좋으면 무역과 투자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인적 교류도 증가하여 상호 유익할 뿐 아니라 문화와 관광, 스포츠 등 다른 분야의 교류도 확대됩니다. 외교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국가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입니다. 개인 간에도 때때로 충돌과 다툼이 있는 것처럼 나라 간에도 다툼과 분쟁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때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 외교입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있을 때에도 상호 입장을 조정하고 해결책을 찾아 전쟁을 막는 것이 외교의 역할입니다. 서희는 거란족이 침입하자 상대방을 설득하여 군대를 돌려보낼 수 있었고, 키신저는 냉전 시절에 소련 및 중국과의 경색된 관계를 완화시켰지요. 서희나 키신저가 없었더라면 큰 전쟁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Q : 그렇다면 외교의 역사를 통해서 외교에 관한 어떤 원리나 교훈 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A : 이론적인 원론 같은 것은 없습니다. 외교의 요체는 협상과 타협입니다. 외교에는 상대방이 존재하기에 일방적인 주장은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가운데에서 묘책을 발견하고, 협상을 통해 문제 해결에 이르는 것이 외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외교는 게임이 아닌 거죠. 게임에서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지만, 외교에서는 뚜렷한 승자와 패자는 없습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타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때론 타협 가능성이 거의 없는 문제도 있기는 합니다만…. 독도문제 같은 것이 그런 사례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독도는 문제랄 것도 없고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확고한 우리의 영토이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여깁니다. 국민의 여론이 배후에 있고 국수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다루면 정권이 넘어갈 만한 민감한 이슈를 놓고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정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외교는 비상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상시에 많은 국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상시에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 무역, 투자, 인적 교류, 문화교류 등 민생과 관련된 분야에서 협력이 활발했다면 설혹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해결이 쉽지요. 관계가 밀접할수록 서로 지켜야 할 이익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외교는 늘 필요한 것이고, 국가의 기능 중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투자입니다.

국가 존립에 관한 이익을 평시에 지키는 것이 외교관의 임무

Q : 외교의 역할이 정말 크게 느껴집니다. 역할을 담당하는 외교관의 임무도 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교관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A : 외교관도 법률가, 저널리스트, 학자처럼 전문직이기는 한데, 외교관이 하는 일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는 일이 상당히 광범위한 까닭이지요. 주재국에서는 자기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에 국가 간의 관계에 관한 모든 일을 다루어야 합니다. 정치적, 외교적 성격의 일은 물론 경제, 통상, 에너지, 문화, 홍보, 영사, 행정 등 다양한 일을 모두 맡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주재국의 성격에 따라 다루는 일의 경중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가령 석유 같은 자원을 수입하는 나라에서는 자원 확보가 중요 업무가 될 것이고, 교민이나 본국 방문객이 많은 나라에서는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사건 사고를 처리하는 영사 업무가 중요하게 되지요. 따라서 외교관은 때때로 만물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초임 시절에 선배 외교관이 ‘외교관은 평생 공부하는 직업’이라고 충고를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말의 의미를 피부로 깨닫게 되더군요.

Q : 그래서 그처럼 다방면의 저술을 내게 되셨나보군요.

A :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글쓰기가 일종의 습관이 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외교관을 ‘평시 군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군인은 전시에 국가를 지키고, 외교관은 평시에 국익을 지킨다는 말이지요.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만큼 쓰라린 일은 없습니다. 패자는 승자에게 굴복해야 하고 승자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어야 하지요. 영토를 뺏길 수 있고, 막대한 배상금으로 국민의 허리가 휘어질 수도 있고, 아예 무력으로 통치당할 수도 있지요. 그처럼 국가 존립에 관한 이익을 평시에 지키는 것이 외교관의 임무입니다. 국토가 분단되어 있고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우리 입장에서는 특히 외교가 중요합니다. 평시에 국익을 최대한 신장시켜야 합니다. 전쟁에서 지면 단번에 나라를 쇠망으로 몰아넣고, 외교에서 지면 나라를 야금야금 약화시킵니다. 중요한 외교 교섭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국제행사를 유치하는 일이나 국제기구의 선출직 경쟁에서 실패하게 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국력은 서서히 약화됩니다. 국제무대는 매우 냉정한 곳입니다. 한번 힘이 약화되면 중요한 국익이 걸린 외교전에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평시에 외교력을 길러야 합니다. 외교관에게는 확실히 군인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발령장을 받으면 어떤 오지일지라도 즉시 달려가야 하고, 본부에서 명령이 하달되면 기필코 이행해야 합니다. 그 무기가 총과 포가 아닌 말과 글의 차이일 뿐, 싸우고 지키는 업무는 같습니다. 학자 못지않게 지식이 풍부하고 논리가 탄탄해야 하고, 언론인 못지않게 보고서도 잘 써야 합니다. 외교관은 어떤 사안이 생길 때 적절하게 수집한 정보를 외교 전문의 형태로 본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의 외교 전문을 보면 외교관의 활동상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지요. 본부 데스크에 앉아 있을 때에는 이런저런 정책보고서나 연설문, 회의자료 등을 작성해야 하고, 공관에 근무할 때는 주재국의 전문가들을 만나 청취한 내용을 분석한 후 전문에 담아 본부에 보고하는 것이 주요 임무 중 하나입니다. 외교관은 저널리스트처럼 매일 글을 써야 하는 직업이고 외교관의 리포트는 외교 커뮤니케이션에서 핵심을 차지합니다.

외교관으로서의 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화

Q : 외교관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습니까?

A : 개인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떠돌이 생활자로서의 어려움일 겁니다. 후진국의 경우 험한 기후, 질병, 환경, 자녀 교육의 어려움 등을 흔히 듭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직원이나 교민도 몇 명 안 되는 개도국에서 공관생활을 할 때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과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즐겁게 생활하면 그곳이 천국이고,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긴장 속에서 살면 그곳은 지옥이 됩니다. 부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인들 간에 반목하게 되면 무척 생활이 힘들게 됩니다. 저희 아내의 경우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할 때 요즘 말하는 왕따를 당했던 기억으로 인해 그쪽 방향이라면 화장실도 가기 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후진국에서는 대개 집에 현지인 가사도우미(maid)를 두게 되는데, 이때 부인들끼리 하는 농담에 “마담의 행복은 메이드가 결정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농담 속에 진실이 있지요. 손버릇이 나쁘거나 말썽을 일으키는 가사도우미를 만나게 되면 그 집의 평화는 깨지고 맙니다.

Q : 가정의 평안이야말로 바깥 업무 못지않게 진정 중요한 과제이지요.

A : 물론입니다. 국내에서든 외국에서든 인간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자신과 궁합(chemistry)이 잘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맞지 않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면서 호흡을 맞추어 나가자면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내국과 달리 좁은 공관생활이라 다른 대안이 없어 그저 참고 지내야만 하니 스트레스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정한 사람과 지나치게 친한 것도 종종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서로 친하다고 생각하면 사소한 일에 오해가 발생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공관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인화가 중요합니다. 인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관장이 직원을 통솔하기가 어렵고, 업무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드물지만 공관장과 불화를 빚어 본국으로 소환되는 직원도 있습니다. 해외에서 함께 잘 지내면 평생 동지가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서로 적이 되어버립니다. 외국인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과는 헤어져도 늘 그립고 다시 만나도 너무 반가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거든요. 동질적인 사람과 이질적인 사람들을 동시에 쉴 새 없이 접촉해야 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는 않습니다. 외교관은 이래저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외교관은 그런 스트레스를 잘 견뎌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즐겨야 합니다. 외교부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외교부란 곳은 특수한 곳이어서 인간관계에서 극히 조심해야 해. 함께 근무한 선배나 동료들을 통해서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 정해지는데, 한번 나쁜 인상이 박히면 만회할 기회가 없어. 한 번 같이 근무한 사람을 또 만날 기회는 거의 없기 때문이지.” 저는 그 말의 의미를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본부에서 근무할 때는 잘 몰랐지만 공관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전에 함께 근무했던 사람을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더군요. 내가 본부에 근무하면 그 사람은 공관에서 근무하고, 반대로 내가 공관에서 근무할 때는 그 사람은 본부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설령 다시 만난다 할지라도 15년-20년의 세월이 지나면 영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거든요. 이처럼 특수한 환경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제가 보기에 외교관들은 보호본능이 강합니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지금은 관계가 좋을지라도 나중에 독이 되어 자신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지요. 기자나 교민을 상대할 때도 ‘불가근불가원’의 원칙으로 대하라는 조언을 선배들에게서 많이 받습니다. 이런 점은 한국인의 특성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다른 나라 외교관들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봅니다. 제가 만난 어떤 나라 외교관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헤어지는 것부터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리셉션에서, 각종 파티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웃고 떠들지만 사실 흉금을 털어 놓을 만큼 친한 사람은 드물거든요. 누구와 친하게 지냈다고 해도 금방 헤어지는 것이 외교관이고, 한번 헤어지면 영영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것이 외교관의 생활입니다.

외교관 자녀들, 정체성 잃을 가능성 높아

Q : 자녀 교육에 대한 어려움도 얘기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어려웠습니까?

A : 자녀들을 임지마다 데리고 다니다 보면 그들이 정체성을 잃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교육은 많이 받았으나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외국에서 교육받는 바람에 한국어나 한국 문화 또는 전통적 가치에 대해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면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게 되지요. 자신이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헷갈려 합니다. 한국 내에 뿌리가 약하고 친구도 별로 없는 것이 문제로 작용하지요. 어른들은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옛 추억과 친구들이 있어 금방 적응하지만, 어려서부터 해외에서만 살아온 자녀들은 한국에 들어와도 외국처럼 낯설기만 한 거지요.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들이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므로 국내 대학 입학을 권유하지만, 자녀들은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딱딱하고 경쟁적인 한국 대학보다는 자유로운 외국 대학을 선호하는 겁니다. 부모의 강요로 한국 대학에 입학한 외교관 자녀의 성공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도 큰 아이를 국내 대학에 보냈으나 적응을 못해 다시 외국 대학에 다녔지요. 이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고 시간적, 경제적 낭비도 컸습니다. 큰 아이의 경험을 토대로 둘째 아이는 무조건 본인의 의견을 존중했지요. 그래서 둘째 아이는 별 문제없이 미국에서 대학을 마쳤습니다. 외교관 자녀들은 이렇듯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외교, 조직은 튼튼하지만 4강(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위주로 편중돼있어

Q :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대한민국 외교의 강점과 약점 등 특징에 대해 말씀 부탁합니다.

A : 한국은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이고, 국제기구 선출직에 입후보하면 승률 90% 이상을 거두는 외교 강국입니다. 미국과 EU를 포함 57개국과 16개 FTA를 체결한 세계적인 통상 대국이기도 합니다. 경쟁력이 약한 우리 산업을 육성하느라 온갖 통상 장벽을 쌓고 외국 상품이 밀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과거의 대한민국이 아니지요. 대한민국은 이제 가장 개방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전자제품, 통신제품, 자동차, 선박 등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높은 상품으로 막강한 수출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장과 함께 한국의 외교도 성장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으로 봅니다. 한국의 재외공관 수는 2018년 말 현재 164개에 이르고, 외교관의 숫자도 더디지만 꾸준히 증가 추세입니다. 물론 예산도 그만큼 늘었지요. 전에는 외교 예산이 1조 원, 퍼센티지로는 전체 예산의 1%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2019년 예산은 2조3천억 원에 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 예산의 1%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지만요. 개도국에 공여하는 공적개발원조(ODA)도 해마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개도국에서 한국의 입김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원래 한국 외교의 강점은 끈질기게 들러붙는 것이었습니다. 돈도 없고 실력도 부족한 외교관들이 본국에서 오는 훈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저 주재국의 담당관을 찾아가서 될 때까지 요청하고 또 요청하는 것이었죠. 지성이면 감천인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그런 전법이 꽤 통했습니다. 워낙 가난하고 약한 나라이기 때문에 딱하게 보이기도 했고, 또 한국인의 근면과 성실성이 돋보였기 때문에 그런 전법이 통했겠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한국 외교는 성장했습니다. 잘 사는 나라가 된 지금은 돈이 한국 외교의 강점입니다. 과거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지금은 다들 유창하게 영어를 합니다. 전에는 국제회의 하나 유치하게 되면 이를 어떻게 치를까 노심초사했으나 지금은 수많은 국제회의가 국내회의처럼 개최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규모의 행사라도 척척 잘 치릅니다. 그만큼 한국의 국력과 외교력이 성장한 겁니다. 지금은 외교라는 것이 외교관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외교부에서는 계약직을 고용해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도 하고 외부의 용역으로 국제행사를 치르기도 합니다. 필요한 분야에는 저명인사에게 대사 직함을 주어 외교활동을 돕도록 하기도 하지요. 제가 보기에 한국 외교의 전통적인 강점은 기동력과 신속성입니다.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절도가 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외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던 시스템이 이제는 조직이 일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외교 조직은 상당히 튼튼합니다. 누가 장관이 되고 누가 고급 간부가 되더라도 계획한 외교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외교관 개개인의 자질과 능력도 많이 향상되었고요. 외국어만 하더라도 영어는 물론 다른 외국어에 능통한 외교관이 정말 많습니다.

Q : 취약한 부분도 말씀해주셔야지요? <웃음>

A : 약점을 말하라는 건가요? 글쎄요, 결정적인 약점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 다만 규모에 비해 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 어려움이기는 합니다. 직원과 예산은 늘어났지만, 업무량이 그보다 훨씬 많이 늘어났습니다. 직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늘어난 국제회의와 행사 때문에 직원들은 차출당하기 일쑤라서 본부와 공관 모두 만성적인 직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공관 경험이 있는 직원이 부족해서 본부나 재외공관이나 모두 계약직으로 일손을 메우는 실정입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부족한 인력으로 외교 강국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의 외교가 더 발전하자면 직원 등 외교 인프라를 늘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외교 지평이 확대되면서 부수적으로 일이 늘어난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을 지나치게 벌이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참가하지 않는 국제회의가 없고, 외교관이 활동하지 않는 국가가 없으며, 기업이 진출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지원하고, 동포와 관련된 일이면 무조건 개입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습니다. 그런 정도는 슈퍼 파워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한된 인력과 예산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만성 피로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최근 국가 정상의 해외방문행사에서 연쇄적으로 의전사고가 발생했던 것도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국제행사나 국제회의 등을 냉철히 평가해서 속도와 양을 조정할 필요가 있는 거지요. 질 높은 일을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한국 외교의 취약점 한 가지를 더 들자면 지나치게 4강 위주의 외교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이 네 나라는 당연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들이기는 합니다. 이웃나라이고, 세계를 호령하는 강국이며, 경제적으로도 최우선 순위 국가들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4강에 외교력을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옳은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현재의 4강이 영원히 4강이라는 법도 없습니다. 미국도 옛날과 다르고, 일본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러시아는 잠재력은 크지만 늘 변수가 많은 나라입니다. 요즘 정부가 ASEAN을 중심으로 한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국가들의 순위는 시대환경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균형을 유지하는 자세입니다. 현실에 충실하되 늘 혜안을 가지고 균형을 추구하면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외교정책을 추진해나가야 합니다. 4강과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북한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4강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만일 북한이 무너지고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에도 지금과 같이 4강 위주의 외교로 나가야 할까요? 변화를 예측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는 보다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현재 세계의 GDP 순위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인도, 이태리, 브라질, 캐나다 순입니다. 그러나 2030년이 되면 중국,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 인구로나 영토로나 커다란 나라들의 강세가 두드러질 것이 분명합니다. 세계의 경제지도는 급격히 바뀔 수 있고, 경제력이 바뀌면 외교관계도 그에 따라 바뀌게 됩니다. 한국은 세계정세의 변화에 발맞추어 지금부터 차근차근 외교지도를 바꾸어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국토나 인구로 볼 때 세계를 경영하는 강대국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익에 가장 적합한 곳에 제한된 자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나치게 한곳으로만 나가면 위험하므로 위험을 예방하는 균형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항상 균형 잡힌 시각으로 외교력을 쏟아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국제관계의 근본적인 바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했던 애초의 의도에서 살짝 벗어나 우리나라의 외교와 외교관의 삶에 대해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요동치는 국제관계에 대한 고견을 듣는 자리는 다시 마련하기로 하고 인사동 찻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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