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의 인생 바라보기㊶] 풍금은 사랑을 싣고

윤창식 칼럼니스트
  • 입력 2023.03.07 14:26
  • 수정 2023.03.1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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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식-수필가-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윤창식
-수필가
-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황노인은 팔순을 맞아 유럽여행을 시켜주겠다는 자식들의 갸륵한 뜻도 물리치고 남도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50여년 전,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별뫼국민학교 초임 발령장을 받고 내려가던 설레임처럼 초봄의 햇살이 황노인의 얼굴에 어린다.

일부 능선을 오르는 산등성이 길은 황토흙 대신 포장이 깔려 있었으나 물과 뭍이 서로의 발을 밟고선 리아시스식 해안의 모습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황노인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먼발치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별뫼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성산자동차학원 표지판만이 바닷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이곳이 운전 배우는 곳이요?"

"뭐요? 이런 극노인이 어뜩케 차를 몰겄다고 찾아왔소? 참."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자리에 별뫼국민학교가 있었는디..."

"별뫼초교가 없어진 지가 벌써 언젠디 그러요?"

"이봐 젊은이, 학교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가긴 워딜 가요? 없어져 부렀당께요!"

"아, 그렇구먼... 그러면 별뫼교가 없어질 때 교실에 남은 풍금은 어디로 갔는지 혹 아는가?"

"워메 미쳐불겄네. 바쁜께 쩌리 비키씨요." 젊은이는 숫제 황노인한테서 치매끼를 느끼는 듯 퉁명스럽기 짝이 없다. 그때 둘 사이의 실랑이를 잠시 지켜보던 운전교습 팀장이 풍금이라는 말에 귀를 세우며 끼여든다.

"아니, 할아버지가 풍금 얘기를 어떻게 아시요? 그 써금한 낡은 풍금은 풍덕할머니네 집 창고에서 본 것 같은디?"

"아 그래잉~. 자네들은 모를 것이네. 내가 육이오 전쟁 직후 이 학교에 처음 와보니께 거의 다 부서진 책걸상에 열 명 남짓 아동들이 눈을 말똥거리며 앉아 있더군(흠~).

"풍금 얘기부터 해주실라요?"

"별뫼라는 학교 이름이 참 맘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별처럼 산처럼 키우고 싶었다네."

"그래서요?"

"아이들의 심성을 도야하고 인성을 길러주려고 음악시간을 늘릴 요량으로 풍금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던 걸세."

"그래서 선생님이 풍금을 사오셨겠네요. 참말로 훌륭하시네요~"

"아닐세, 낡은 중고 풍금 하나 장만할 돈이 없던 터라 농어민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집집마다 모금을 다녔지.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나는구먼. 물질을 해서 캐낸 소라나 성게 몇 알 내놓는 분, 우뭇가사리 팔아서 모금 보태신 분, 겉보리 몇 되 가져온 분, 고사리 산채 반 소쿠리 가져와서 면목없어 하던 분 등등.”

"그랬구만요~."

"아까 그 풍금이 풍덕 할머니네 있다고 그랬는가?"

"네~. 우리 친구 엄니의 성함이 손풍덕이지라잉."

손풍덕 할머니네는 자동차학원 바로 코앞이었다. 마침 풍덕 할머니는 집 앞 샘가에 앉아 미나리를 씻으며 황노인을 바라본다.

"손풍덕 어린이! 고사리는 그만 씻고 잠시 일어나 보아라."

"아니, 뉘신디 내 이름을 부르시까잉?"

"고얀놈! 선생님을 몰라 보다니."

"오메메 으째야쓰까. 울 선생님이 뭔 일다요? 오메메."(훌쩍훌쩍)

"울지 말고 뚝~. 대체 별뫼초교 풍금이 어찌해서 자네 창고에 있을꼬?"

"(훌쩍) 선생님, 말도 마셔라. 20년 전 우리학교가 없어진다고 포클렌인가 코쿠렌인가 수 십대가 들이닥쳐 학교 건물을 파헤치길래 내가 맨몸으로 막아서서 교실 풍금을 구해냈어요~"

"그랬었구만, 참 잘했어요!"

"힘들고 외로울 적마다 헛간 풍금을 만져보면 위로가 되고 선생님이 생각나곤 했어라."

"자, 그러면 풍금 옆으로 서보세요. 내가 반주를 넣을 테니께 '섬집 아기' 한 번 불러볼까?"

"그때처럼 노래 잘 못 부른다고 대나무 잣대로 손바닥 때릴려고요? 호호."

"손바닥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이번에는 엉덩이를 때려야지. 하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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