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①] 서울 도심여행_동묘 벼룩시장에서 창신동까지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3.10 15:46
  • 수정 2020.03.2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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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동묘 벼룩시장, 사진=이정기기자)
(동묘 벼룩시장, 사진=윤재훈기자)

 중장년층의 홍대거리 <동묘 벼룩시장>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지하도를 막 올라오자 마치 던져놓은 듯 허름한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길에까지 어지럽게 놓인 잡동사니들이 마치 5, 60년대 남대문 시장이라도 온 듯하다. 거리를 메우는 수많은 인파, 대부분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서나 나올 법한데, 간간히 그 사이에 푸른빛의 청년들과 어린 여학생들까지 재잘거린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어둑한 무채색에 가까운데, 거리는 어느 곳보다 소란스럽고 활기차다. 왼쪽으로는 기다란 담장이 서 있고 그 위로는 제법 규모 있는 기와집이 당당하게 서있는데 여기가 <동관왕묘>이다. 국내에서 가장 큰 관우의 사당이다.

이 거리가 바로 ‘중장년층의 홍대거리’라고 한다. 거기에 무한도전의 정형돈과 지드래곤 등이 나온 후에는 젊은 층과 학생까지 가세했다. 근처에 서울(신설동) 풍물시장과 황학동 벼룩시장을 합쳐 하루쯤 넉넉하게 시간을 내어 재래시장 투어를 해도 좋을 것 같다. 옛 재래시장의 향수를 느끼면서 이것저것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부부지간에 나와 소꿉장난도 하면서 걸으면 그야말로 너와 나의 고향이 되겠다.

(벼룩시장 잡화노점, 사진=이정기기자)
(벼룩시장 잡화노점, 사진=윤재훈기자)

장터거리 <옛날국밥>집, 해장국에 막걸리 한잔

이곳은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장터거리로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상인들이 모이며 상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3년 7월부터 2005년까지 추진한 청계천 일대의 복원사업으로, 장사할 장소를 잃은 황학동 벼룩시장 상인들 일부도 합세했다.

사람들 틈 사이로 쟁반을 이고 가는 아주머니를 눈길로 따라가 보니 근처에 <옛날국밥> 집이 보인다. 때를 넘겨 허기를 느끼며 안으로 들어가니 식사 때가 지났는데도 손님들이 제법 앉아 있다. 해장국에 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대낮인데도 저마다 상 위에는 소주나 막걸리병들이 놓여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해장국이 푸른 막걸리병과 나오니 식욕이 당긴다. 가끔씩 전화가 오고 아주머니는 쟁반을 이고 서둘러 배달을 나간다. 마치 허기진 상인들의 뱃속이라도 아는 듯이. 하긴 홀아비의 속사정은 과부가 잘 안다 하지 않는가.
온종일 겨울 추위에 떨다 따뜻한 해장국에 술 한 잔 들어가니 상인들의 뜨건 삶들도 저마다 호기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내가 박정희 때 잘 나가던 사람이야
전두환이 그 애 때는 힘들었지."

약간 불콰하게 취기가 오르는지 앞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한마디 내뱉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도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사내는 소주를 한 병 더 시킨다.

(스리랑카인의 옷파는 노점, 사진=이정기기자)
(스리랑카인의 옷파는 노점, 사진=윤재훈기자)

 누가 싼게 비지떡이라 하던가?

동관왕묘는 공사중이라 길게 양철담장이 쳐져 있는데 그 양쪽으로는 노점상들이 빼곡하다.
“1장에 2천원, 3천원, 2장에 5천원”
어디선가 약간 어눌한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이 빙 둘러싸여 안은 보이지 않는다. 비집고 들어가 보니 아예 몇 사람은 벽 쪽에 눌러앉아 천천히 물건을 고른다. 옷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동안 뒤적거리며 옷을 골라가는 사람들도 몇 있다. 아마도 여기서 옷을 사서 자기 사는 지역에 가 다시 파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10년을 장사했다는 거무잡잡한 사내는 고향이 스리랑카라고 했다. 대담하게 한국의 대표적인 풍물시장에 앉아 당당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 그가 위대해 보인다. 한국말도 곧잘한다.

(노상카페 커피500원, 사진=이정기기자)
(노상카페 커피500원, 사진=윤재훈기자)

 노상(路上)카페에서 수다

그 건너편에는 노상(路上)카페가 있다. 커피 한 잔에 500원이라고 써 있는데, 주인이 없다. 옆에 상인이 다가와 금방 올 거라고 한다. 허름한 CD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를 파는 사내, 눈가의 주름이 한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잠시 후에 아주머니가 와 그에게 커피 한 잔을 사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스리랑카인이 걱정되어 물어보니 대부분 시장 상인들이 동료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곳의 노점들은 1시부터 시작한다. 좁은 시장 골목에 소방차가 경광등을 울리며 지나가 물어보니 재래시장이라 화재위험이 많아 소방 훈련을 자주한다고 한다. 그래서 상인들은 날씨가 추워도 난방 기구를 거의 쓰지 않고 상가들도 추위 속에 문을 열어 놓고 있다. 그렇게 한 세월 그들은 이 시장에 업드려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결혼도 시키고, 내 집까지 마련했으리라.

(관우의 사당 '동관왕묘', 사진=이정기기자)
(관우의 사당 '동관왕묘', 사진=윤재훈기자)

  관우의 사당 <동관왕묘>

동관왕묘(동묘, 관제묘, 관왕묘) 앞에 서니 문이 잠겼다. 수리중이라 당분간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시장 상인을 위해 작은 기와집으로 된 화장실은 깨끗하게 개방되어 있다. 보물 142호로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곳.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 땅에 와 싸움을 하면서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그리고 명나라 신종이 건축 자금과 친필현판까지 지원하여 1599년 동대문 밖에 공사를 시작하여 선조 34년인 1601년에 완공하였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에는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고 지붕은 높은 ‘정(丁)’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은 앞뒤로 나누어져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휘하 장수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과거에는 관왕묘가 서울의 동서남북에 다 지어졌는데 동관왕묘가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중국풍의 건축형태가 묻어나는 17세기의 제사시설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남관왕묘는 동묘보다 먼저 생겨 남대문 밖에 있었으며 서관왕묘와 북관왕묘는 고종 때 만들어 졌다. 그 후 남관왕묘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서관왕묘와 북관왕묘는 조선총독부가 철거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 이 넓은 터에 중국 장수를 보물로 지정해 놓고, 매년 춘추(春秋)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사대(事大)도 대단하다. 하긴 500년 조선 문명이 공자를 섬겼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이 시기에, 그들이 보면 얼마나 신기하고 좋아 하겠는가. 전문화재청장인 유홍준 교수의 이야기대로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쓰여 지기를 기대해 본다.

뒤쪽으로 이어진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청계천이 보이고 빈티지 매장들도 몇 군데 보인다. 시장 안에서 옷 몇 벌만 잘 고르면 돈을 벌어 가는 곳이라고 하니 여기저기 눈길이 가지만, 오늘은 패스다. 근처에 네팔인 거리라고 지도에 나와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 단지 대로 건너편에 네팔 음식거리가 있기는 한데, 식당 몇 개가 전부다. 자그마한 길을 하나 건너니 <창신동 문구완구시장> 골목이 나오고, 왼쪽으로는 청계천이 계속 따라오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오면 좋을 듯하다.

(한블럭만 들어가면 보인는 향수 어린 가옥들, 사진=이정기기자)
(한 블럭만 들어가면 보이는 향수 어린 가옥들, 사진=윤재훈기자)

 한국 의류 생산기지였던 <창신동>

이제 대로를 건너 창신동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6,25 피난민들과 시골서 올라온 사람들이 정착해서 형성된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이었다. 그 후 동대문 주변이란 지리적 특수성으로 창신동은 한국 의류산업의 주요 생산기지 역할을 했으며, 1955년 국내 의류소비 60%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창신동의 미싱 소리는 국내 섬유산업의 발전을 나타내는 소리
였다고 하니 가히 그 비중이 짐작이 간다. 1961년에 평화시장이 조성되고 박정희 정권의 섬유수출정책과 맞물려 창신동에서 생산하는 기성복이 국내물량 70%를 차지했다고 한다. 또한 이곳 동대문 밖 <숭인동, 창신동 일대>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삶의 흔적도 꽤 많이 남아있어, 정순왕후를 따라가는 역사기행코스도 개발되어 있다.

(백남준 기념관, 사진=이정기기자)
(백남준 기념관 영등포 50+센터 여행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사진=윤재훈기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백남준 기념관>

먼저 우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는 유명한 말을 남긴 <백남준 기념관>으로 향했다. 골목을 들어서면 금방 나오는데 풍경은 골목 밖과 판이하다. 수십 년은 족히 된 듯한 집들이 아예 그곳에 뿌리를 내린 듯 여기저기 낡아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그 때에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나 갈 수 있었던 유학까지 갔으니, 그는 시절운도 좋았나 보다. 이 집은 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자그마한 기와집 안에는 입구에 카페가 있고 중앙에는 오색빛 탑이 서있다. 각종 진열품들과 복사물들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다.

(창신동 골목재래시장, 사진=윤재훈기자)
(창신동 골목재래시장, 사진=윤재훈기자)

 도시재생마을 <창신동 골목재래시장>

이제 본격적으로 창신동 골목으로 들어갈 차례다. 대로에서 <창신동 골목재래시장>이라는 간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창신동 네팔음식거리>라고 한다. 네팔 식당을 단 간판들이 서너 개 있는데 한산하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네팔인인 듯한 청년들이 두어 명 지나간다.

이곳은 <도시재생마을>이다. 핵가족화 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는 갈수록 절실한 모델이다. 과거의 새마을운동처럼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는 갈수록 이웃과 단절되고 SNS의 발달로 그 속도는 갈수록 극한으로 치닫는다. 서로 얼굴을 보고 하는 교류가 희박해져 가다보니 인정(人情)은 메말라가고, 인면수심의 범죄가 매일 일어나지만 그것마저도 타성에 젖어 잘 놀라지 않는다. 스스로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자라나는 은둔형 외톨이인 히키고모리의 증가도 나날이 더해져 사회불안요소가 되어간다.

이런 파괴만이 능사가 아닌 차가운 시멘트 벽을 벗어나 공동체를 복원해주는 <도시재생>은 소나무가 태양을 향해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처럼 인간성을 회복시켜주는 강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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