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②] 서울 도심여행_동묘 벼룩시장에서 창신동까지 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3.17 12:58
  • 수정 2020.03.23 15:0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창신동 골목재래시장 50+ 시니어들과 함께 함께, 사진=윤재훈)
(창신동 골목재래시장 50+ 시니어들과 함께, 사진=윤재훈)

창신동 재래시장의 앙상블··· ‘아지매소리’, ‘오토바이소리’, ‘재봉틀소리’, ‘스팀다리미소리’

동묘풍물시장과 동관왕묘, 백남준 기념관을 구경한 일행들은 이제 대로를 건너 창신동으로 우르르 건너간다. 그 발걸음들이 마치 초등학교 소풍이라도 나온 듯 들떠있는 아이들 같다. 입구에 세워진 <창신동 골목재래시장> 팻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앞에 바로 좁은 골목이 양 갈래로 펼쳐진다. 구수한 장터 아지매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족발 순댓집, 떡볶이, 해장국 집 등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하다. 배추를 직접 심어 김치와 된장을 담그고 조미료는 전혀 쓰지 않는다는 장수갈비 식당에서는 김치와 동치미들을 직접 팔기까지 한다. 골목은 그리 길지 않지만 뒤섞인 목소리들이 6,70년대 아련한 향수를 단숨에 소환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토바이 소리 요란하다. 좁은 골목에서 옷감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너무 많이 지나다니다 보니 걸을 때 조심해야 한다. 여기저기 하수구에서 무럭무럭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니 그래도 일감은 제법 있는 듯하다. 다리미 스팀 김이 많이 날수록 골목은 더욱 활기를 띤다. 창신동의 재봉틀 소리는 이 나라 경제성장의 소리였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의류역사는 경제효자산업으로 기억된다.

(김광석 15년 거주 왼쪽 첫번째 집, 사진=윤재훈)
(김광석 15년 거주 왼쪽 첫번째 집, 사진=윤재훈)

거리에서 마주 친 ‘김광석’의 체취

이제 일행은 <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등을 불러 7080세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김광석을 찾아간다. 그가 1975년부터 15년 동안 살았다는 골목길, 허름한 3층집, 어디선가 금방 통기타의 허름함과 ‘여행을 떠나요’ 노랫소리가 들려올 듯하다. 집 앞에는 자그마한 동판이 붙어 그를 추억한다. <거리에서>를 나지막히 부르자 안에서 바로 사람이 내다본다.

(안양암, 사진=윤재훈)
(안양암, 사진=윤재훈)

대한불교 원효종 총본산 ‘안양암’

조금 올라가니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 요화 <배정자>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는, 대한불교 원효종 총본산 <안양암>이라는 사찰이 나온다. 안동 권씨 소유로 1889년 성월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찰에는 마애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괘불도, 지장시왕괘불도(地藏十王掛佛圖) 등 서울특별시 지정 유형문화재 7점과 문화재 자료 12점이 소장돼 있다. 암반 위에 새겨진 마애불 위로는 전각이 세워져 있고, 뒤로 올라가며 무슨 연유인지 암반 사이로 뚫어진 자그마한 굴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음피움 봉제박물관 찻집 밖 절벽 전망, 사진=윤재훈)
(이음피움 봉제박물관 찻집 밖 절벽 전망, 사진=윤재훈)

채석장 절벽을 바라보며 무료 원두커피 한잔의 여유 ‘이음피움 봉제박물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이음피움 봉제박물관>으로 간다. 이음피움이란 ‘서로를 잇고 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종일 골목에는 쉼 없이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입구에서 우리는 먼저 도슨트 설명을 듣고 봉제체험을 했다. 그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니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들이 천정에 걸려 빙빙 돌아가면 마치 패션쇼를 하는 듯하다. 4층으로 올라가면 전망 좋은 카페가 있다. 개인컵을 지참하면 원두커피가 무료다. 나름 커피도 맛있고 조용하다. 일제시대 조석총독부를 짓기 위해 석재를 재취했다는 채석장 절벽도 보이고 창신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 앉아 찻잔을 앞에 두고 시낭송을 하거나 가볍게 김광석 노래를 들어도 좋을 듯하다.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사진=문화재청 제공)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사진=문화재청 제공)

지장암에서 만난 보물1621호 '목조비로자나불좌'

여기서 10여분 걸어가면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장암>이 나온다. 이곳은 불상을 만들 때 안에 넣는 복장유물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등 자료들이 있다. 특히 보물 1621호인 조선시대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대웅전 삼신불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중앙불(佛)이며, 1924년 강재희 거사가 지장암을 중창하면서 모셨다고 한다.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탈고한 비우당, 사진=윤재훈)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탈고한 비우당, 사진=윤재훈)

비우당(庇雨堂)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

인근에는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탈고한 <비우당>이 있다, 낙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이곳은 본래 조선 초 세종 때 유관이라는 정승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우산각(雨山閣)이 있던 자리다. 그는 태조부터 세종까지 4대에 걸쳐 35년간 정승을 지냈지만 울타리도 없는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아 비만 오면 천정에서 빗물이 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비가 오면 아내에게, “우산도 없는 다른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꼬?”하며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걱정했다는 청백리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외가 쪽인 이수광이 집을 고쳐 살았는데, 이때 그도 ‘비를 근근이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비우당(庇雨堂)이라 불렀다. 정말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최근 복원되었는데 본래 자리에서 약 300m 떨어진 곳에 만들었다.

(지봉유설, 사진=윤재훈)
(지봉유설, 사진=윤재훈)

조선문화 백과사전 ‘지봉유설’

지봉유설은 이수광이 52세 광해군 6년(1614년)에 비우당에서 탈고했으며, 당대의 모든 지식과 정보가 총 망라된 <조선문화 백과사전의 효시를 이룬 작품>이다. 17세기 초반의 저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세계의 정보가 담겼는데, 이것은 그가 세 차례 명나라 사행(使行)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고유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세계문화를 수용하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후대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등의 저술에 보이는 백과사전적 학풍도 바로 지봉유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후 실학이 지향한 실용적 개방적 학풍도 지봉유설이 제공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이수광은 국학자들에 의해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 받기에 이른다. 이 책은 한 가지 사실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여 일시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오랜 시일 보고 들은 것을 메모해 두었다가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분류 편찬한 것이다. 이수광은 “학문하는 사람은 실천에 힘써야지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학문은 폭넓게 섭렵하고, 설령 이단이라고 해도 선입견에 빠져 배척하기 보다는 그것이 갖는 유용성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이수광은 이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고 있어, 현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술에 대한 경구도 있는데, 즐기는 사람으로서 귀담아 들여야 할 듯하다.

"함부로 술 마시는 사람 치고 일찍 안 죽은 사람 없으며,
술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여색보다도 더 심하다."

고 비판했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성리학 이념을 완전히 버린 방외인적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상체계의 수용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또한 세계 50여 개국의 지리와 기후, 물산, 풍속, 역사 등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조선사회를 고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세계와 공존하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일찍이 서문에서 이 책의 편찬 동기를 “예악(禮樂)의 나라로서 이름난 우리 문화와 행적이 뛰어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자지동천’, 사진=윤재훈)
(‘자지동천’, 사진=윤재훈)

단종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전설이 깃든 ‘자지동천’

비우당 뒤에는 한복 자주고름의 유래가 된 정순왕후 송씨가 염색한 옷을 말렸다는 자지동천(紫芝洞泉 또는 자주동샘)이 있는데, 그녀가 천을 넣자 천에 저절로 자주색 물이 들었다고 한다.
이 자줏물이 든 무명은 비싸게 팔렸으며 여염집 아낙네들이 이것을 사서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예쁘게 꾸몄는데, 이것이 그 유래라 한다. 바로 옆에 글자가 새겨진 바위도 있다.

(정업터, 사진=운재훈)
(정업터, 사진=윤재훈)

정순왕후의 비참한 생애를 담은 ‘정업원 터’

<정업원 터>를 찾아간다. 정업원은 세조가 정순왕후를 노비로 강등시키고 다른 사람들이 범하지 못하도록 보낸 곳이다. 이곳은 왕실에 혼자 남은 여자들이나 나이 먹은 궁인들이 노후를 의탁하던 절을 말한다. 그러나 계유정난(1453년)으로 실권을 잡은 세조는 1455년 즉위하여 어린 조카 단종을 귀양 보내고 결국은 사약까지 내린다.

···새 울음 끊긴 새벽 산마루에 달빛 걸려있고
피맺힌 봄 강물에 지는 꽃이 더 붉구나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내 애끊은 소리 듣지 못하고
슬픈 내 귀에 소쩍새 울음만 들리는 것이냐
-단종 ‘자규시’ 중

그 후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숭인동 동망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세 명의 시녀와 함께 여생을 보냈으며 시녀들이 동냥해 온 음식으로 끼니를 잇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인근에는 여인들의 나라의 눈을 피해 시장을 열어 그녀를 도왔다고 하는 여인시장터가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은 세조가 영빈정이라는 집과 넉넉한 양식을 주었으나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정순왕후 송씨는 81세까지 이곳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냈다.

개국공신이며 세조의 장자방이면 생육신의 한 사람인 신숙주가 수양대군에게 정순왕후를 자기 노비로 달라고 했지만 세조는 그것만은 거절하고 정업원에 살게 했다고 한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하면 나타나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조롱하였고. 백성들은 그를 가리켜 절개 없는 숙주나물이라고 했다.

임종 직전에 성종이 문병 와서 조언을 묻자 그는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 했다고 한다. 많은 시와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많은 작품들은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청룡사 동쪽에 동망봉에 오르면 정순왕후가 조석으로 올라와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동망봉이 있다. 이곳에서는 단종과 마지막 이별을 한 애끓은 장소인 영도교 또는 영영 이별했다고 부르는 영리교(永離橋)도 내려다보인다. 1771년 영조 47년 정순왕후가 단종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낸 곳이라는 것을 알고 정업원구기비를 세우고 동망봉(東望峰)과 처마에 있는 전봉후암 어천만녀(前峰後巖 於千萬年)이라는 친필을 하사했다고 한다.
"앞산 봉우리 뒷산 바위 천만 년 영원하리라"
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청룡사, 사진=윤재훈)
(청룡사, 사진=윤재훈)

단종과 정순왕후의 마지막 밤 ‘청룡사’

바로 그 옆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내며 이별한 장소인 청룡사의 <우화루>가 있다. 이곳은 조계사 말사로 서울에 있는 4대 비구니 사찰에 속한다. 이 절은 922년(태조 5년)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되었다.

도선국사가 왕건의 아버지 왕륭에게 고려건국의 예언과 이씨 왕조가 일어날 한양의 지기를 억누르기 위해 개성주변에 10개의 절과 전국에 3,800개의 비보사찰을 짓도록 했으며 청룡사도 그중에 하나라고 한다. 그 후 비구니 혜원스님을 주석시켜 조석으로 종을 울려 삼국통일을 축원하도록 했으며, 그때부터 비구니 도량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건국을 도운 것은 무학대사였는데, 역사의 언저리마다 스님들이 등장한다. 하긴 그 시대에 스님들은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이 아니었던가.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