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밟고 지나간 발자국 뒤로는 벌나비들이 따라간다.”
길 위에 서면
누구나 들꽃이 된다
바람에 서걱이는
억새의 울음소리를 듣는다끝없이 펼쳐진 길을 보면
가슴이 뛴다
저 산모퉁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길 위에서, 윤재훈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여행은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잠들어 있는 나의 대지를 깨우는 여정이다.
먼 미지의 풍경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은 발자국에는 여행자의 삶과 애환이 묻어난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커다란 선지식(善知識)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 여행길은 나 혼자만 즐겨서는 안된다. 내가 가는 그 지역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쓰레기와 오염물질만 그곳에 남기고 “돈은 다국적 기업이 다 가져가 버리는 그런 관광을 해서는 안된다.” 그 지역에서 나는 농수산물을 먹고 로컬교통을 이용하고, 그 지역에서 물건을 사고, 지역민과 눈빛을 나누는 <교감 여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라고 동정하거나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봐서도 안된다. 우리 모두는 이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이며, 손잡고 가야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가려면 함께 가라”
라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우리는 어차피 인생이라는 길을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처자식이 굶고 있으면 가장 먼저 이웃집 담을 넘을 수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고, 문 앞에서 마주친 이웃의 슬픈 낯빛은 가장 먼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현대 인류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WWW(World Wide Web)’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이제 인류의 <성곽 시대>는 끝났다. 자기 나라만 굳건히 깃발을 나부끼면 지킨다고 해보았자 바람보다 빠르게 철조망을 넘는다.
또한 우리의 여행은 반드시 <생태여행>이 되어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고 급기야 우리를 집안으로 몰아넣었던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는 지구로부터 크나큰 회초리를 맞았다. 여기에서도 어떤 경종을 느끼지 못한다면 제 2, 3의 슈퍼 바이러스 앞에 인류는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서야 큰 자탄(自嘆)에 빠질 것이다.
그것은 중세 말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 경고>에서도 볼 수 있으며, 기원전 430년 스파르타를 상대로 벌인 고대 아테네의 비극적 재난인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도 알 수 있다. 기실 인류문명의 발상지라는 그리스 종말의 출발점도 역사학자들은 ‘아테네 전염병(Plague Athens)’으로 보고 있다.
내가 좋아서 자연 속으로 나섰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자연과 합일(合一)이 되어야 한다. 일회용품이나 비닐(or 재활용) 등을 사용해서는 안되고, 각종 세제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자연(自然)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 이유를 물어보면 자명하다.
옛부터 우리의 선인들은 경치 좋은 산천으로 나가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꿈꾸었다, 신라의 화랑도나 우리의 전통 종교들도 다 그렇게 산으로 들어갔다.
산 속에 서있는 사찰들도 한 번 보라. 그 품 안에 안겨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산마루와 조화를 이루며 부드럽게 날아갈 것 같은 처마, 시각효과까지 고려한 도톰한 배흘림기둥, 인간들이 살 집도 이렇듯 자연 속으로 들어가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주거환경은 어떤가? 온 도시를 골리앗 같은 빌딩들이 싸고 도는 현대의 도시들을 보라. 너무나 위압적이고 답답하다. 스카이 라인은 커녕 산 정상에서 올라가 보면 온 도시가 아파트 숲에 쌓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물론 좁은 땅이라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라고 해도, 도심으로 들어온 바람마저 빠져나갈 틈이 없어 ‘길을 잃는다.’ 빌딩 사이를 빠져나가지 못한 바람들이 해운대 시가지에서는 폭풍이 되어 몰려온다. 이건 자연에 대한 크나 큰 폭력이다
평생 고생하여
초가삼간 지어놓고
너 한 칸, 나 한 칸,
달님 한 칸 들여놓고
청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이 얼마나 멋진 자연 애찬인가. 넉넉한 선인들의 생각의 품새에 저절로 찬탄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사방이 탁, 트인 정자 문화 속에서도 느낄 수가 있다.
“코로나는 환경파괴에서 오는, 또 다른 이명(異名)”
거기다가 현대인의 캠핑문화를 한 번 보자. 자연에 나가서도 집에서와 똑같은 생활을 하려고 한다. 대형 텐트를 치고, 발전기를 돌리고, 심지어 에어 침대까지 펴두고 보다 넓은 공간을 원한다. 더구나 집에서와 똑같이 퐁퐁과 샴푸 등 온갖 세제들을 쓴다, 이런 살풍경(殺風景)이라니.
사실 자연과의 공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연 속으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집에서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텐데?
지금 우리가 철저하게 느끼고 있지 않는가? “코로나는 환경파괴에서 오는, 또 다른 이명(異名)”이라고. 천산갑, 박쥐 등 지나치게 지구상의 다양한 생명체들을 잡아먹은 인간의 그 잡식성에서 온 것이라고.
45억만 년의 지구의 역사, 거기서 인간의 역사는 불과 20만 년. 소숫점으로도 나타내기 힘든 0,004%에 해당하는 찰나 같은 순간, 이 지상에 잠시 머물고 있는데, 지나온 45억만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보다 더 순식간에 이 지구를 망가뜨려 버렸다. 거기에다 수십 만종의 생명체를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너무나 무지막지한 생명체다.
“이 지구의 바이러스는 인간이고, 코로나는 ‘백신’이다.”
를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지나친 프레온 가스 남용으로 구멍 난 하늘에선 자외선이 폭포처럼 우리의 얼굴로 쏟아지고 있다. 극지에서는 얼음이 녹아 앙상한 뼈만 남은 백곰들이 서로를 잡아먹고 있는 비명이 들릴 듯하다.
물개는 플래스틱에 목이 감겨 숨 막혀 죽고, 세계의 바다에는 미세 플래스틱이 넘쳐 고기들이 먹고, 그것을 다시 인간들이 먹는 살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숨쉬기가 편한 적이 없었다.”
내가 1초에 한 번은 꼭 내 쉬어야 하는 숨, 내 생명 최후의 보루. 그런데 요즘 “이렇게 숨쉬기가 편한 적이 없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이 혹성의 표면에 화흔처럼 남아 있으면 안 될 것이다. 지구상의 많은 생명체 중에서 단지 인간만이 이 지구에 가장 해로운 존재였다고, 화석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코로나가 결코 우리를 버리려고 온 것은 아닐 것이라고 자위하자.’
마지막으로 <환락 여행>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감도 없이 사람을 돈을 주고 사서 비정상적인 짓을 하면서 현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며, 나라 망신까지 시키는 그런 망나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른 나를 찾아보기 위해 떠나온 여행길”,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더 성장한 내가 보인다. 이 에너지를 자양분 삼아 이 지구상에 더욱 유익한 생명체를 꿈꾸어 본다.
“쉬엄쉬엄 걸어가는 배낭 여행자의 발걸음은 지구와의 상생(相生)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약간의 불편을 감내하기 위해 떠나온 지구 위의 여행 아닌가?
“꽃을 밟고 지나간 발자국 뒤로는, 벌나비들이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