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의 밑줄긋기 44]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박명기 기자
  • 입력 2019.08.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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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드골공항 환승하며 본 대기 중인 항공기들 / 사진=박명기
파리 드골공항 환승하며 본 대기 중인 항공기들 / 사진=박명기

어느 순간 생각이 샘처럼 저절로 솟아났다. 꿈결 같았다. 시작은 책이었다.

좋은 책과 내가 좋아하는 책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혹여 사람처럼 책도 이 둘이 겹칠 때 기쁘기 그지없다.

시인 류시화는 젊은 시절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의 시집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런 그가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법정 스님과 같이 책을 냈을 때 적잖은 감격이 밀려왔다.

 

■ 류시화 시인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의 만남

두 사람의 인연은 류시화 시인이 오래 전 법정 스님이 머무르던 송광사 불일암을 찾아가면서 시작이 되었다.

각별한 인연은 류시화 시인이 스님의 마지막 순간 유언을 받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의 저명한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호수 옆 오두막집 ‘무소유’ 생활이 담긴 <월든>을 좋아했다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천양희 시인은 시 <무소유>를 썼다. 이 시는 법정 스님의 삶을 조명했다. 시에는 생전에 스님이 종교를 떠나 깊은 교유를 한 김수환 추기경도 나온다.

스님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절에 아기예수 생일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를 걸었다. 김 추기경도 길상사로 법정 스님을 찾아오기도 했다.

무소유로 살다 간 法頂스님의

'무소유'란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던 김수환 추기경도 무소유로 살다 갔다

 

거미한테 가장 어려운 것은

거미줄을 뽑지 않는 것처럼

우리한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소유로 살다 가는 것이다

-천양희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 중 ‘무소유’ 전문

 

■ 마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대나무터널이...

소설가 최인호는 1987년 어머니 죽음을 보고 나서 마흔둘에 천주교에 귀의했다. 3년 전 오십셋에 천주교 영세를 받은 소설가 박완서처럼 늦게 말이다.

최인호는 법정 스님과 함께 오랫동안 잡지 <샘터>의 고정 필진이었다. 최인호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열린 작가였다.

그는 법정 스님을 비롯한 불교 인사의 도움을 얻어 한국 불교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선사 소재 소설 <길 없는 길>을 신문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나중에 책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불일암 입구 대나무터널 / 사진=박명기
불일암 입구 대나무터널 / 사진=박명기

나도 조계산 법정스님의 거처였던 송광사 산내 암자 불일암을 찾아갔다. 30여분 ‘무소유의 길’로 명명된 언덕길을 지나 입구인 대나무 터널을 통과했다.

대나무 터널은 마치 끝없는 추락하지만, 신기한 ‘구멍’ 같았다. 봄날이었다. 가벼운 몸집은 벚꽃잎 같았다.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앨리스가 공원을 걷다 작은 구멍을 헛디뎌 끝없이 추락한다. 이후 '5월의 여왕'의 궁전을 찾아가는 모험이 시작된다.

나는 법정 스님의 불일암 마당에 서 있었다. 스님은 영화 <빠삐용> 주인공을 상상하며 ‘빠삐용 의자’를 직접 만들었다.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혔던 건 자기 몫의 인생을 낭비한 죄였거든. 이 의자에 앉아 나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거야.”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유골 안장 / 사진=박명기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유골 안장 / 사진=박명기

다비식을 마치고 수목장을 치른 후 스님의 유골을 모신 곳은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였다. 표지석 옆에는 꽃들로 가득 찬 꽃바구니가 놓여있다.

‘법정 스님 계신 곳-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후박나무 아래 유골을 모셨다.’ 불일암 마당 앞 계단 옆, 빠삐용 의자와 맞보고 있는 자리였다.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나는 불일암 마당을 서성거렸다.

송광사 불일암에 있는 계단 옆에 있는 법정스님이 사랑했던 후박나무 / 사진=박명기
송광사 불일암에 있는 계단 옆에 있는 법정스님이 사랑했던 후박나무 / 사진=박명기

■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 테니까.“

스님은 생전에 많은 에세이(유언으로 자신의 펴낸 모든 책을 절판하라고 남김)에서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구절들을 사랑했다.

<어린왕자>에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만남’, 길들이기에 대한 잘 알려진 구절이 생각났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그렇게 되면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을 볼 때마다 네가 생각날 테니까.”

-<어린왕자> 중,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한 말.

스님은 먹물 옷이 잘 어울렸다. 그리고 잘 생기고 목소리는 꼬장꼬장했다. 부디 오해 말기를... 스님 머리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움에 대한 말이니까.

수목장으로 후박나무 아래 모셔져 있는 법정스님과 후박나무와 맞보고 있는 법정스님 빠삐용의자 / 사진=박명기
수목장으로 후박나무 아래 모셔져 있는 법정스님과 후박나무와 맞보고 있는 법정스님 빠삐용의자 / 사진=박명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집에는 의자가 세 개가 있다. 의자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의자 두 개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의자 세 개는 사회를 위한 것이다.”

스님의 책 <버리고 떠나기>와 빠삐용 의자에는 소로의 자연주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실제로 류시화는 젊은 시절 인도로 떠났고, 법정 스님은 거처였던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았다. 두 사람 모두 평생 자연주의 철학을 몸으로 실천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길들이며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무소유와 자연주의, 인디언의 철학과 <월든>을 공유했다.

 

■ 눈 깜빡거리는 사이, 상념은 키예프공항에 스르르 착륙

류시화 시인은 여전히 시를 쓰고, 책을 펴내고 있다. 하지만 소로와 생텍쥐페리, 박완서-최인호 소설가,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은 푸른 지구별을 떠났다.

눈 깜빡거리는 짧은 사이 상념은 법정 스님의 빠삐용 의자와 소로의 <월든> 속 세 개의 의자를 불러냈다.

아, 여기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공항, 인천 출발 이후 무려 26시간을 거쳐 도착했다. 인천-파리 12시간, 파리드골공항 환송 대기 6시간, 다시 3시간 반. 항공기 좌석도 통로가 아닌 내내 갇힌 채로 중앙 좌석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로 지정된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녀원 / 사진=박명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로 지정된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녀원 / 사진=박명기

기장이 우크라이나 말로 도착을 방송했다. 에어프랑스는 새벽 1시 55분 키예프공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오호라! 그리운 이름들, 류시화 시인이 줄줄이 소환한 법정 스님과 내 인생의 벗들. 그리움이 쌓여 항공기 날개를 타고 여기까지 동행했구나.

키예프 페체르스크 수녀원은 황금 지붕이 아름답다. 유네스코 인류유산인 그곳 금빛 첨탑처럼 그대는 아름답다. 그립다. 그대가 곁에 없어도 나는 그대가 옆에 있는 듯 너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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