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시니어여행기] 강남의 오아시스, 선정릉 탐방기

정충영 여행작가
  • 입력 2023.11.15 15:51
  • 수정 2023.11.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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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너는 '영등포 50+여행작가반' 선생님들의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선릉과 정릉은 2009년 6월 30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문화적 가치가 있는 사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능 안의 유물이나 유골은 없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다 도굴되었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일본이 점점 미워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정현왕후 윤씨 능 뒤편의 금송들의 기상. 촬영=정충영
정현왕후 윤씨 능 뒤편의 금송들의 기상. 촬영=정충영

서울 촌놈의 도심 속 고전 읽기

누구나 제목은 알고 있으나 누구도 읽은 적이 없는 책을 고전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서울이라 불리는 '도서관'에 '고전'을 읽으러 떠난다. 바로 2호선 선릉역에 위치한 선릉과 정릉이다. 합해서 ‘선정릉’이라 일컫는다.

물론 9호선 선정릉역이나 삼성 중앙역에서도 방문이 가능하나 걷기엔 좀 거리가 있다. 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 7분이면 공원 남측 매표소에 도착한다. 회사 일이나 은행 일로 늘 지나다니던 선릉역에 이런 사적이 있다는 것을, 서울 산 지 35년 만에 처음 알게 되었으니 '서울 촌놈'으로 불려도 할 말은 없다.

선릉(宣陵)은 조선 9대 성종(成宗 : 1457~1494, 1469~1494 재위)과 세 번째 왕비 정현왕후 윤 씨(王后 尹氏 : 1462~1530)의 능이고, 정릉(靖陵)은 조선 11대 중종(中宗 : 1488~1544. 1506~1544 재위)의 능이다.

"선릉과 정릉은 2009년 6월 30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문화적 가치가 있는 사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능 안의 유물이나 유골은 없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다 도굴되었다. '역사를 알면 알수록 일본이 점점 미워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선릉과 정릉을 관할하는 사찰은 봉은사(奉恩寺)이며, 선릉과 정릉에서 동북쪽으로 약 1km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릉과 정자각. 촬영=정충영
홍살문에서 바라본 정릉과 정자각. 촬영=정충영

홍살문 넘어 펼쳐진 정릉 이야기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해 입구를 통과하니, 마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 속으로 들어간 듯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빌딩 숲에서 나무의 숲으로 공간 이동하자마자 가을 색동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나를 반긴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노송들을 지나니 느닷없이 넓은 잔디의 바다가 펼쳐진다.

홍살문이라고 부르는 붉은 문 앞에 서니 두 개의 돌길이 저 멀리 T자형 건물을 향해 칸 영화제의 레드 카펫처럼 누워 있다. 두 개의 돌길은 각각 향로와 어로다. 즉 제향을 지낼 때 향이 이동하는 길이요, 제향을 지내러 온 임금이 걷는 길이다.

그리고 T자형 건물을 정자각이라 하고 그 뒤쪽으로 웅장한 중종의 능인 정릉이 마치 거대한 중세의 성처럼 나를 내려다본다. 그 엄숙함에 위축이 되어 나는 향로도 어로도 감히 밟지 못하고 오른쪽 흙길을 밟으며 정자각으로 향한다.

조선 11대 왕인 중종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가 단경왕후, 둘째 왕비가 장경왕후 그리고 셋째 왕비가 문정왕후였다. 1544년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능은 경기도 고양 서삼릉 안에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후 1562년 명종 17년 문정왕후가 남편 중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겼고 본인도 여기와 같이 묻히길 원했다.

하지만 정작 문정왕후의 사후, 여름 장마 침수를 이유로 그녀의 묘는 지금의 태릉에 모셔지게 된다. 생전의 삶과 사후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 유교의 본질이다 보니 당시는 풍수지리나 묫자리에 매우 민감했을 터이다. 만약 그분들이 타임머신 타고 현대로 오신다면 매장보다 더 각광받고 장려되는 대안적 장례방식인 화장이나 수목장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자기가 묻힐 무덤인 피라미드를 짓는데 일생을 바치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 비해서는 낫지 않냐고 항의하실까?

정릉 앞 정자각. 촬영=정충영
정릉 앞 정자각. 촬영=정충영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T자형 건물이다. 지금도 전주 이씨 문중에서 매년 12월 9일 '기신제'로 불리는 제향을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이 제사 지낼 때 헷갈리지 않도록 필요한 제기류와 진설도가 안내판에 명기되어 있다. 나는 옛 건물의 단청색에 늘 매료된다. 특유의 문양으로 붉은색과 청색이 서로를 휘감는데 마치 가을 단풍의 색조가 건물에 입혀진 듯하다.

정자각의 단청. 촬영=정충영
정자각의 단청. 촬영=정충영

중종의 능은 출입이 금해져 있기에 주위에 호위무사처럼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들의 사진을 찍고 떠난다. 지표면을 튀어나온 뿌리들이 마치 근육질 보디가드의 튀어나온 정맥처럼 요동친다. 수백 년간 임금을 지켜온 노송들의 위엄이 느껴진다.

하늘 높이 솟은 금송. 촬영=정충영
하늘 높이 솟은 금송. 촬영=정충영

금송과 정현왕후 능을 지키는 석상들

정릉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금송'을 만난다. 하늘 높이 뾰족하게 솟은 소나무들은 금색이라기보다는 적갈색을 띤다. 잔가지나 잎이 없이 밋밋하게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은 애처로워 보여,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패딩이라도 입혀주고 싶어진다.

좀 더 걸어가니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윤 씨의 능이 우리를 맞이한다. 능 앞을 지키고 있는 문신상과 무신상 그리고 말, 양 등 동물의 석상들이 재미있다. 당시 조선 땅에는 염소는 있었을지언정 양은 없었을 터인데‘ '양의 석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동행했던 윤재훈 작가님의 설명이 설득적이다.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미 페르시아 상인들이 한반도까지 진출해서 무역을 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참 후인 조선 시대 즈음에는 양이나 원숭이의 존재가 많이 알려져 있었을 터이다. 그러니 십이지신에도 포함되고 석상도 만들어지지 않았겠는가? 일천한 역사 지식은 다음에 더 깊이 크로스 체크하기로 마음먹으며 이제 대망의 하이라이트 성종의 능, 선릉으로 향한다.

능을 지키는 문신상, 무신상 그리고 동물들의 석상들. 촬영=정충영
능을 지키는 문신상, 무신상 그리고 동물들의 석상들. 촬영=정충영

에너지 넘쳤던 성종대왕의 삶

1494년 성종 25년, 조선 9대 왕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선릉이 조성되었다. 그 후 1530년 중종 25년 성종의 부인인 정현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동원이강릉 형태로 능이 조성되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 각각에 능을 조성한 형태를 말한다. 하나의 정자각이 두 능을 커버하니 소위 '일타쌍피'인 셈이다.

성종의 능, 선릉에 당도하니 그 풍채와 위엄이 왕비의 능을 능가한다. 왕후 능에는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만 있었는데, 성종의 능은 왕의 능이라 '병풍석'으로 한 번 더 에워싸서 보호하고 있다. 또 여기에는 '성종 대왕 능'이라고 안내판에 '대왕'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종대왕릉. 촬영=정충영
성종대왕릉. 촬영=정충영

성종의 치적은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 못지않다. 그의 국가 통치체제가 정비되었다.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경국대전',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악학궤범', '국조오례의' 등 주요 국가 문서가 완성되었고, 홍문관을 확충하고, 독서당을 신설하고, 양현고를 설치하는 등 젊은 학자들을 우대하고 교육과 문화 진흥에 힘썼다.

세종과 성종 두 대왕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태종 이방원이나 세조와 비교할 때, 학구파였던 점, 조정 대신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인재를 널리 활용한 훌륭한 성군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성종이 통치 이념으로서의 유학에만 충실했던 반면, 세종은 과학이나 국방에까지 힘썼다는 차이는 있다.

또한 성종은 '주요순야걸주 (晝堯舜 夜桀紂)'라는 재미있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데, 낮에는 정치에 힘쓰고 밤에는 자손 만들기에 힘썼다. 그래서 왕후 세 명에 후궁이 14명, 자식만해도 총 31명이다. 대단한 정력가였던 모양이다. 그의 선대왕이자 12남 17녀를 낳은 태종 이방원을 가볍게 제친다.

성종 대왕릉에서 바라본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그리고 비각. 촬영=정충영
성종 대왕릉에서 바라본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그리고 비각. 촬영=정충영

높은 언덕에 위치한 성종 대왕릉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각, 수라간, 수복방, 비각이 보인다. 정자각은 제사 지내는 건물, 수라간은 제사 음식 대기소, 수복방은 관리인 사무소, 비각은 비석이 있는 건물이다. 정릉에서는 정자각만 있었는데 이곳 선릉에선 다 보존되어 있다. 정자각에서 정현왕후 능으로 가는 돌길을 '신로'라 일컫는다. 500년 된 돌길로 향을 옮기는 제관들의 긴장된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콘크리트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선정릉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했던 장소인 '재실'을 구경하고 공원 출구로 나온다. 동행한 윤 작가님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선정릉에 얽힌 역사 이야기, 그로부터 파생된 ’대항해시대부터 아편전쟁까지‘ 세계사 이야기, 그리고 ’환경 기후 문제에 관한 미래 이야기‘까지 끝없이 펼쳐진 천일야화 속에 후딱 세 시간이 지나버린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삼삼오오 공원을 찾는 직장인들로 공원은 붐빈다. 업무로부터,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조선의 두 임금님과 왕비님께서 치유하고 힐링하는 콘크리트 도시 속의 허파가 바로 선정릉이다.

1970년대 급격한 강남 개발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어 도심 속 푸른 녹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나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는, 자연과 역사가 절묘하게 버무려져 있는 소중한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다. 나 같이 등잔 밑이 어두운 서울분들은 꼭 한 번 들러 보시라고 강력히 추천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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