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한마디] "싸우는 거야, 뭐,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지."...84전 85기 노인과 바다

이상수 기자
  • 입력 2024.03.22 11:00
  • 수정 2024.03.2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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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거야, 뭐,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지.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내답게 이 고난을 어떻게 견뎌낼지 생각해.
- 산티아고,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이모작뉴스 이상수 기자] 84일 동안 노인은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다. 그는 쿠바의 늙은 어부 산티아고. 그리고 85일째, 불굴의 산티아고는 자기만큼 오래된 작은 나무배와 함께 망망대해로 향한다. 불운의 사내라는 남들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늘은 꼭 물고기를 잡는 거야.

그는 모든 것이 늙었으나 눈동자는 예외였다.
바다와 같은 색을 지닌,
생기 가득한 그의 눈만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보였다.
- 노인과 바다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가 그의 낚싯줄에 걸렸다. 노인의 힘으론 물고기를 끌어 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5.5m나 되는 청새치가 노인의 배를 끌고 다녔다. 노인도 지치고 물고기도 지쳤다. 어느새 그 거대한 물고기는 노인에게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물고기야, 네가 날 죽일 작정이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하지만 너도 그럴 권리가 있지. 나의 형제여.
난 너보다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상한 존재를 결코 본 적이 없다.
자, 어서 와 날 죽여라. 누가 누굴 죽이든 난 이제 상관없다….”
- 노인과 바다

물고기는 불굴의 노인을 이길 수 없었다. 물고기를 실기엔 배가 너무 작았다. 노인은 전리품을 배 옆에 매달아 항구까지 끌고 갈 생각이었다. 이 물고기는 모욕의 84일을 보상할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사투가 그를 기다렸다. 상어 떼였다.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가 몰려와 노인의 전리품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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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죽을힘을 다해 그의 물고기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지 않은가. 그의 물고기는 점점 살을 잃어갔다. 뼈만 앙상해져 갔다.

그래도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아.
- 노인과 바다

그랬다. 노를 상어 피로 물들이며 끝까지 싸운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죽을지언정 싸움을 포기하진 않았으니까.

바다는 인생이다. 물고기는 삶의 투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다. 그 전리품은 위태롭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상어 떼가 나타나 빼앗아 갈 수 있으니까. 그러면 끝인가. 아니다. 그저 그게 세상사다. 다시 싸우는 거다.

노인은 거대한 뼈만 매단 채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물 한 잔만 마시고 이내 잠이 들었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었다. 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가 사자 꿈을 꾸게 했을까.

ⓒ게티이미지<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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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사자. 어린아이

니체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정신 3단계를 말한다. 낙타. 사자. 어린아이.

낙타는 여기서 저기로 인생이 가라는 대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복종한다. 왜 이리 힘들게 살아야 하나 회의하지만 주어진 의무만 수행할 뿐 다른 방법이 없다.

사자는 자유이며 파괴다. 낙타의 삶을 거부하고 나의 인생을 개척하려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산티아고는 사자 꿈을 꾸었다. 그는 낙타가 아니다. 노인이기를 거부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는 사자다.

니체의 ‘어린아이’는 낙타처럼 주인에게 순종하지도, 사자처럼 파괴하고 저항하지도 않는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다. 어린아이 앞에 있는 모든 것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놀아야 할 대상이다. 아이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인간은 창조적 행위를 하게 된다.

산티아고엔 유일한 친구가 있다. 이웃집 마놀린이란 아이다. 그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인생 반려자다. 모든 사람이 노인을 패배자로 업신여겨도 아이는 늘 그를 지지한다. 노인은 청새치와 상어와의 사투 끝에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를 맞이한 건 마놀린이었다. 마놀린을 보고 노인은 다시 기운을 차린다. 다시 그물을 손보고 배를 수리할 것이다.

마놀린은 헤밍웨이에게 복선이다. 헤밍웨이의 산티아고는 결국 니체의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긴 산티아고는 찾아온 마놀린과 약속한다. 다시 한번 고기잡이를 나가자고. 꼭 무엇을 잡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내 삶에 충실한 거니까. 늘 눈앞에 있는 사건과 오늘 하루에만 충실한 ‘어린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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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노인은 B와 D 사이의 C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가설을 하나 만들었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B는 탄생(Birth), D는 죽음(Death), 그리고 C는 선택(Choice)이다.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수한 선택의 연속이라는 얘기다.

산티아고는 매일 선택해야 했다. 여기서 그만둘 것인지, 돛을 달고 바다로 향할 것인지. 청새치와 상어와 목슴을 걸고 싸울건지 말건지. 그렇게 선택한 다음 그는 일어나는 사건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온전히 맡겼다. 삶의 흐름에 나를 맡긴다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삶의 모험에 적극 편승한다는 것이다.

산티아고에게 ‘노인은 B와 D 사이의 C’이기도 하다. B와 D는 사르트르와 같은 말이지만 C는 다르다. 산티아고에 ‘C’는 선택(Choice)이기도 하지만 중심(Center)이기도 하다.

그의 하루하루는 노인이라는 변두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늘 삶의 한가운데 있었다. 영원한 현역이었다. 그렇다. 스스로 인생이라는 바다로 항해할 의사가 있고, 즐기려는 의도가 있다면 노인은 없다. 항상 삶의 한 가운데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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