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운의 스카이가든 12] 라디오 라디오

권채운 작가
  • 입력 2021.07.05 14:33
  • 수정 2021.09.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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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채운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권채운
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올해는 봄 가뭄 소리가 쏙 들어갔다. 해마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가 바닥을 보여 모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더니 올봄은 때맞춰 비가 충분히 내린다. 비를 맞은 앞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게 솟아나고 베란다의 화초도 저마다 꽃을 피우느라 바쁘다. 햇살 맑은 아침에 베란다에 나와 앉아 있으면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바이올린의 선율이 감미롭다.

CBS FM 음악방송은 아침 9시부터 클래식 타임이다. 클래식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라디오 채널이 맞는 방송이 오직 그뿐이어서 듣기 시작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그 시간에는 주로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보거나 베란다의 화초를 들여다본다. 배경음악은 언제나 FM의 클래식이다. 음악 방송은 청취자들이 보내온 사연이나 신청곡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젊을 때는 나도 신청곡을 엽서로 보내기도 했다. 엽서를 한 묶음씩 사서 그림을 그리고 리본도 붙여가며 어떻게든 당첨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열심을 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는 휴대폰에 앱을 깔아서 간단히 쉽게 신청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금요일마다 ‘나만의 음악앨범’이라는 코너에서 보내온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슬며시 마음이 동할 때가 있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직장 생활을 한 곳이 영등포에 있는 방직회사의 기획실이었다.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회사의 기숙사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공장의 직공들이 기숙하는 방 중에서 하나를 사무실 직원용으로 내주었다. 한방에 7명의 처녀들이 기숙했다. 그때는 사무실에서도 기숙사에서도 직원들을 모두 미스 리니 미스 정이니 하고 불렀다. 기획실의 미스 리는 집이 서울이면서도 출퇴근하기 편하다고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녀는 늘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자그마한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제 몸피보다 더 큰 배터리를 고무줄로 동여맨 채 그녀의 손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침 7시면 그녀가 틀어놓은 라디오의 음악소리에 잠이 깼다. 극동방송의 윤학원씨가 진행하는 클래식음악방송이었다. 학창시절에 간혹 들었던 클래식음악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매일 아침 듣다보니 어느새 나도 미스 리처럼 트랜지스터를 장만해서 귀에 대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애청자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주 신청곡을 적은 우편엽서를 방송국에 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에 나오는 ‘개선 행진곡’

드디어 어느 아침에 나의 신청곡이 흘러나왔다. 자세한 주소까지 진행자가 소개를 했던 것 같다. 기숙사로 우편물이 왔는데 그 안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초대권이 한 장 들어있었다. 본인은 김자경오페라단의 단원이며 시민회관에서 오페라를 공연하는데 꼭 와서 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단한 글이 동봉되어 있었다. 오페라라니, 시골출신인 나는 시민회관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변변한 외출복마저 없어서 같은 방을 쓰는 미스 리의 바바리코트를 빌려 입고 시민회관을 찾아 나섰다. 좌석은 맨 끝자리였다. 무대가 너무 멀어서 누가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개선행진곡’을 부를 때는 그 사람도 합창단의 일원으로 목소리가 섞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페라를 잘 보았느냐는 우편엽서가 왔고 나도 잘 보았다는 답장을 보냈다. 몇 번 엽서가 오가고 우리는 종로의 ‘르네상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페라 관람부터 그를 만나기로 한 것까지 모두 한 방의 동료인 처녀들의 합작품이었다.

시민회관도 모르는 촌뜨기가 ‘르네상스’를 알 리가 만무했다. 결국 서울출신의 미스 정과 동행하기로 했다. 그도 동행이 있었다. 나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이 강렬하게 울리는 가운데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는 얼굴이 동그랗고 키가 몹시 작은 사람이었다. 그와 동행했던 사람과 나와 같이 나갔던 미스 정이 주로 대화를 이끌어 갔다. 그렇게 어색한 만남을 끝으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미스 정은 나를 따돌리고 그와 동행했던 사람과 비밀연애를 시작해서 이듬해 봄에 결혼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클래식음악 사랑은 50년을 이어오고 있다. 아침의 음악 FM뿐 아니라 IPTV가 도입되면서 클래식 채널도 세 개나 있어서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도 듣고, 꿈에도 그리던 짤츠부르그 페스티벌의 여러 연주들도 감상할 수가 있다.

몇 년 전에 클래시카 채널에서 노래하는 그를 보았다. 아니 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이제는 나처럼 늙었고 일개 합창 단원이었던 그가 유럽에서 공연하는 오페라에 주역으로 나설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르네상스’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자그마한 동양인이 서양인들 틈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은 감격스러웠다. 아마도 그의 아들이거나 조카거나 아니면 닮은 사람이었을 것이지만,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난 듯이 너무도 반가워서 비행기를 무대로 꾸민 그 오페라를 끝까지 서서 보았다. 그 오페라의 제목도 작곡가도 그가 불렀던 아리아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 떨림은 지금까지 생생하다.

이따금씩 베르디의 ‘개선 행진곡’이 방송을 탄다. 그 웅장한 울림은 나를 50여 년 전의 숫보기 시절로 냉큼 데려다준다. 클래식음악은 마법인가. 클래식은 그 사람 이름도 잊었지만 TV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그를 보는 순간 바로 알아보았던 마법의 순간을 선물한다.

채널도 잡히지 않는 낡은 라디오는 내다버리라면서 성능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아들이 사왔다. 스마트 폰에 음악FM 앱을 다운 받고 블루투스를 켜니 티끌 한 점 없는 말끔한 음질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기왕에 앱을 깔았으니 예전처럼 음악을 신청해볼까.

‘개선 행진곡’이 방송을 타면 어디에선가 그 사람도 ‘르네상스’에서 만났던, 수줍음 많던 아가씨를 떠올리려나. 우렁찬 ‘개선 행진곡’에 마음이 떨리던 젊은 날은 지나가버렸다. 이제는 부드럽고 황홀한 선율에 마음이 간다.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오렌지 향기를 따라 어디선가 갑갑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클래식 애호가가 엽서를 보내오지 는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불어오는 바람결이 더없이 상쾌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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