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건희의 산책길59] 단절에서 이음으로…춘포도정공장에서 마주 선 나와 너

천건희 기자
  • 입력 2023.08.24 17:21
  • 수정 2023.08.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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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현 개인전 ‘109 and : I & Thou’, 내년 4월 22일까지 이어져

춘포도정공장 전경 / 촬영=천건희 기자<br>
춘포도정공장 전경 / 촬영=천건희 기자

[이모작뉴스 천건희 기자] 무더운 여름날, 공간의 특성을 살린 작품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변화하는 의미있는 전시를 만났다. 조덕현 개인전 <109 and: I & Thou>을 전북 익산군 춘포도정공장에서 관람했다. 춘포도정공장(春浦搗精工場)은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가 일제 강점기였던 1914년, 춘포 들판에서 수확한 벼를 현미로 가공하여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곳이다. 1998년까지 도정공장으로 운영되다 폐업하고, 한동안 방치되었던 공간이다.

춘포도정공장 입구 / 촬영=천건희 기자
춘포도정공장 입구 / 촬영=천건희 기자

황폐했던 춘포도정공장은 서문근 대표와 조덕현 작가의 열정으로 거대한 현대미술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조덕현 작가의 <109 and: I & Thou/you의 고어> 전시는 작년부터 이루어진 <108 and: 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에 이어진 두 번째 전시이다. 109년을 이어온 춘포도정공장의 창고, 정원, 별채 등 독특한 공간에 어울리는 조덕현 작가의 장소 맞춤형 작품들이 궁금했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팻말도 없는 춘포도정공장의 반쯤 열린 녹슨 철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허름한 건물의 녹슨 벽체와 색 바랜 양철 지붕, 넓은 초록 마당 위에는 빈티지 카라반 트레일러가 놓여있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처음 관람한 서쪽 창고 space1,2,3은 세 개의 창고가 한 공간처럼 연결되어 있다. space1 첫 문에 들어서니 거대한 반투명 실크천이 뫼비우스 띠 모양으로 펄럭인다. 환기구에서 들어오는 햇빛의 각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아날렘마(Analemma: 1년간 태양의 위치를 같은 시각, 같은 위치에서 촬영하여 기록했을 때 8자 모양으로 이동하는 현상)의 시각화인데,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생각하게 한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거대한 수조 위에는 버려졌던 고무벨트가 조덕현 작가에 의해 화려한 색을 입고 천장에 무한 루프 형태로 매달려있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얽혀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형태의 설치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춘포교회의 단체 사진을 바탕으로 한 그룹 초상화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아이를 업은 소녀 등 춘포에 살았던 옛사람들을 소환해 장지에 연필로 그린 사진 같은 그림이다. 마치 이곳의 역사를 아는 어제의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는 듯하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과거 도정 시설이 있었던 중앙에는 김용택 시인의 미발표작, 짧은 시들이 투명 아크릴에 적혀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읽히는 시구들이지만, 마음에 남는 시어들이다.

시분 / 촬영=천건희 기자
시분 / 촬영=천건희 기자

건물 앞 메타세콰이어 숲 주변 정원에 20개의 시분(詩盆 /시를 담은 질그릇)이 놓인 시의 밭에서도 김용택 시인의 시를 만날 수 있다. 김용택 시인의 서정시를 넣고 물을 담은 이 그릇이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풍경을 상상해보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전시장 안의 작은 전시실인 음(音)의 정원에는 윤이상의 음악이 흘러 평화로운 느낌을 더한다. 벽과 바닥에 자라는 풀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유리창 밖 식물의 변화, 열린 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다양한 공간을 이용한 설치 작품들은 자연스럽고 멋지다.

이춘기씨 일기 / 촬영=천건희 기자
이춘기씨 일기 / 촬영=천건희 기자

실존 인물인 춘포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던 이춘기(1906~1991)씨가 쓴 일기 필사본을 빼곡히 붙여 놓은 작품은 감동이다. 그가 1961년부터 3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 내려간 일기는 역사적 사료로 인정되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조덕현 작가는 이 일기를 스캔해 피라미드 같은 탑을 만들었다. 정갈한 글씨로 빽빽이 쓴 글과 함께 일기장 상단 여백을 활용해 직접 그린 삽화의 수준도 놀랍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 남겨진 어린 아들들을 돌보는 양육의 어려움 등 개인사를 포함해 춘포 지역의 시대별 모습 등이 적혀 있는 일기를 읽다 보니 마음이 먹먹하다.

안성기 트리뷰트 / 촬영=천건희 기자
안성기 트리뷰트 / 촬영=천건희 기자

별채에서 이루어진 <안성기 : 트리뷰트>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배우 안성기에게 헌정하는 현대미술전이다. <칼레이도스코픽(kaleidoscopic)/변화무쌍한> 벽면에는 동서고금의 영화 포스터 2,000여장이 붙여져 있고, 그 앞에는 실물보다 큰 안성기의 전신상이 다양한 높낮이로 전시되어 있다. “현재는 다분히 영화적 상상의 산물일 수 있지 않을까”라며 안성기에게 헌사를 바친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는 마음이다.

서문근 대표 / 촬영=천건희 기자
서문근 대표 / 촬영=천건희 기자

1300여 평의 넓은 전시 관람은 옛 도정공장의 흔적들과 하나로 어우러진 다양하고 의미있는 작품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또한 혼자서 춘포도정공장을 관리하는 서문근 대표의 애정어린 상세한 설명 덕분에 더욱 행복했다. 계절이 다른 시기에 다시 방문하여 작품의 변화를 보고 싶다.

만경강 변의 춘포는 농업 수탈의 슬픈 역사를 지닌 곳으로 1914년 당시 ‘이리’였던 익산과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 「춘포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인 폐역 춘포역에는 역사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어 함께 관람해도 좋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오래 방치된 공장을 개인이 인수해 예술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서문근 대표의 노력과 끈기에 존경하는 마음이다. 이 공간이 계속 잘 이어지기를 응원한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춘포도정공장 내외부에 설치된 작품들을 철에 따라 정원을 가꾸듯 손보고 살피는 ‘실험적’ 프로젝트를 조덕현 작가와 같이 진행한 김용택 시인의 말이 마음에 깊이 남는다.

“예술이라는 게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것이구나” / 김용택 시인

조덕현 개인전 <109 and: I & Thou>는 춘포도정공장에서 내년(2024년) 4월 22일까지 이어진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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