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건희의 산책길63]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주는 삶의 울림…“네 인생은 뭐였어?”

천건희 기자
  • 입력 2023.12.28 13:50
  • 수정 2023.12.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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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 / 사진=뉴시스 제공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 / 사진=뉴시스 제공

[이모작뉴스 천건희 기자]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명동예술극장에서 관람했다. 중국 희곡인 원나라 작가 기군상(紀君詳)의 「조씨고아」를 2015년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하고 국립극단이 공연하여, 대한민국 연극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8년이 지난 올해, 여섯 번째 무대이다. 정통연극으로 서울 공연 누적 100회를 넘겼고, 한 달 가까이 이어진 공연은 전 회차 매진이다.

명동예술극장 전경 / 촬영=천건희 기자
명동예술극장 전경 / 촬영=천건희 기자

12월의 명동은 화려한 조명과 많은 인파로 활기차다. 명동예술극장은 1936년에 개관한 일본인을 위한 전용 극장인 ‘명치좌’가 있던 곳으로 건물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2009년 국립극단 전용극장인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했는데, 명동 한복판에 문화예술 공연을 향유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 좋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막이 올랐는데 무대는 텅 비어있다. 짙은 회색빛 무대 바닥과 자주색 막 외에 화려한 무대장치 없이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로 시작된다. 진나라 장군 ‘도안고’는 음모를 꾸며 재상 ‘조순’을 반역자로 몬 뒤, 조씨 가문 300명을 죽인다. 떠돌이 의원으로 조씨 가문에 은혜를 입은 ‘정영’은 조순의 며느리인 공주의 부탁으로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맡게 된다. 정영에게도 조씨고아와 같은 시기에 낳은 늦둥이 외아들이 있다. 조씨고아를 못 찾는다면 전국의 갓난아기를 죽이겠다는 도안고의 엄포에 정영은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조씨고아로 바꿔치기한다. 정영의 아들이 조씨고아 대신 억울하게 죽은 뒤 정영의 아내는 자결한다.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좌,하성광-우,우정원) / 사진=뉴시스 제공<br>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좌,하성광-우,우정원) / 사진=뉴시스 제공

정영은 조씨고아를 아들로 삼아 키우면서 복수의 날을 꿈꾼다. 20년이 지난 뒤 정영은 성인이 된 조씨고아에게 조씨 가문의 참혹했던 일을 알리고 도안고에 대한 복수를 부탁한다. 조씨고아에 의해 도안고 가문이 멸족하여 복수는 성공한다. 소중한 걸 다 빼앗기고 20년을 기다려 복수가 끝난 뒤, 정영은 조씨고아를 살리기 위해 죽어간 망자들의 환영과 만난다. 반갑게 다가가는데,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장두이(좌)-정진각(우)) / 사진=뉴시스 제공<br>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장두이(좌)-정진각(우)) / 사진=뉴시스 제공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하성광(좌)-이지현(우)) / 사진=뉴시스 제공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하성광(좌)-이지현(우)) / 사진=뉴시스 제공

배우들의 열연으로 몰입의 시간이었다. 복수의 허무함과 삶의 비극을 다룬 무거운 내용인데 전개는 빠르고, 고선웅 연출 특유의 해학과 리듬감으로 러닝타임 15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하성광(좌)-이지현(우)) / 사진=뉴시스 제공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하성광(좌)-이지현(우)) / 사진=뉴시스 제공

어렵게 얻은 자식을 남의 자식을 위해, 정의를 위해 죽여야만 했던 정영(하성광 扮)과 자기 자식을 품고 “그깟 약속, 그깟 의리가 뭐라고....”라며 절규하는 아내(이지현 扮)가 처절하게 다투는 장면에선 눈물이 흐른다. 아내는 숨이 끊어질 듯 울음을 터트리며 아이의 시신을 묻고 본인도 생을 마감한다. 복수가 끝난 뒤 도안고(장두이 扮)에게 “네 인생은 뭐였어?” 라는 말을 들은 정영의 처연하고 공허한 표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 / 사진=뉴시스 제공<br>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 / 사진=뉴시스 제공

무대 연출이 독특하다. 달, 나무, 수레바퀴 등 각종 소품과 배경은 천장에서 하나씩 내려와 필요한 장면에 생동감을 주고 다시 사라진다. 상차림을 전해주는 이가 무대 아래서 올라오고, 모래 무덤이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등 무대는 천장과 바닥 밑까지 활용하는 수직적 움직임으로 채워진다. 검은 옷의 묵자(墨子/ 동양 전통극에서 무대 행동을 돕지만 관객에겐 보이지 않은 인물로 상정되는)는 많은 이들의 죽음을 검은 부채를 펴는 것으로 표현하고, 암전 없이 죽은 인물의 퇴장을 돕는다.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 / 사진=뉴시스 제공<br>
지난 2017년 1월 17일 프레스콜 무대 / 사진=뉴시스 제공

20년간 복수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사람은 조씨고아가 아닌 정영이다. 자신의 가족과 맞바꾼 조씨고아가 복수에 성공하지만 정영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대의명분이 목숨보다 중요했던 시대, 평범한 사람 정영이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의 복수가 얼마나 더 큰 비극을 불러오는지....

빈 무대에 묵자가 나비를 들고서 하는 마지막 대사가 정영의 표정과 함께 마음에 내내 남는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 보면

어느새 한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돌려 보니 늙었네

....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올해 라이브 공연은 끝났지만, ‘국립극단 온라인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다. 다음번 시즌 무대 관람을 벌써 기다리는 마음이다.

촬영=천건희 기자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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