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건희의 산책길64]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나는 어떤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

천건희 기자
  • 입력 2024.01.29 14:03
  • 수정 2024.01.3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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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아, 그렇지!”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이모작뉴스 천건희 기자] 젊은 시절 관람했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관람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대표작인데 내용은 단순하다.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라는 두 방랑자가 실체가 없는 인물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내용이다.

1970년 공연(좌), 2016년 공연(우) / 사진=산울림 제공
1970년 공연(좌), 2016년 공연(우) / 사진=산울림 제공

우리나라에서는 임영웅(1934년 생) 연출을 통해 1969년 초연되어, 50년 동안 산울림 소극장에서 약 1,500회 공연, 22만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연극이다.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한국 연극 최초로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1989년)에 초청받는 등 한국 연극사에 큰 획을 그었다. 50주년이 되는 해인 2019년 명동예술극장 공연이 마지막이었고, 그 이후에는 새로운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이번 오경택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역대 최고령 에스트라공인 신구(88세, 고고 역)와 원로 배우들인 박근형(84세, 디디 역), 박정자(82세, 럭키 역). 김학철(64세, 포조 역)과 김리안(소년 역)이 두 달간 단일 캐스트로 출연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럭키 역과 소년 역을 여배우가 맡은 공연이라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무대 위에는 비쩍 말라 구불구불 휜 나무 한 그루와 바위 한 덩이만 있다. 방랑자 고고가 신발을 벗으려고 끙끙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 디디가 나타나 둘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며 소통이 안 되는 대화를 이어간다. 주머니에 든 당근 조각 나눠 먹기, 다해진 모자 바꿔쓰기, 서로에게 욕하기 같은 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가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잠깐 침묵한다. 두 사람은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고도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거만한 포조가 노예 럭키를 밧줄에 묶어 개처럼 끌며 등장한다. 둘은 럭키를 팔아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 가는 중이라고 말하며 함께 대화에 참여한다. 그런데 고고와 디디, 포조의 대사와 행동 역시 상호적인 대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럭키가 8분여 동안 폭발적인 에너지로 쏟아내는 독백도 단절된 언어의 결합인, 해석 불가능한 단어의 나열이다. 어느새 밤이 되고 소년이 관객석 맨 뒤에서 뚜벅뚜벅 걸어 무대에 오른다. 소년은 고도씨는 오늘 오지 않고, 내일은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1막이 끝난 빈 무대 위에는 고고의 신발과 럭키의 모자만이 있다. 2막도 무대는 같고, 조명의 방향과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막연한 기다림은 다시 이어진다. 다음 날, 고고와 디디는 하룻밤 사이에 나뭇잎이 자란 나무를 쳐다보다 ‘목이나 매고 죽자’라며 벨트를 풀어 목을 매는데 벨트 끈이 끊어져 죽는 데도 실패한다. 그런데 다시 소년이 찾아와 고도씨가 오늘은 오지 않고 내일은 오겠다는 것을 알린다. 고고와 디디는 다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럼 갈까”, “그래 가자” 그들은 움직이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춘다. 목매려고 했던 다 낡은 노끈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서서히 암전된다.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오지 않는 고도를 끊임없이 기다리는 이 연극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부조리극으로 불린다. 부조리극(不條理劇)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존주의와 전위 예술이 결합한 형태의 연극 사조이다. 의미 없이 반복되는 행동, 끊임없이 주고받는 말, 막연히 반복되는 침묵은 삶의 무의미함을 보여주어 현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대배우들의 연기력은 기립박수로 이어진다. 팔순이 넘은 고고와 디디역의 신구와 박근형 배우의 자연스럽고 유쾌한 환상의 조합 연기는 놀랍다.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움직이는데, 지루하지 않게 집중하게 한다. 15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작품의 의미를 암시하는 대사나 독백이 위트와 유머로 잘 전달된다.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신발이 자신의 발에 맞지 않아 발에 상처가 났다고 말하는 고고에게 디디는
“발에 탈이 났는데, 신발을 탓하는 어리석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야” 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들이 존재하는 시공간의 한계를 인식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이 무대에 갇혀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습관’이라는 벽에 귀를 막고 그저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희망을 꿈꾼다.
“내일은 모든 게 더 나아질 거야”

2019년 공연 후 단체사진/사진=산울림 제공
2019년 공연 후 단체사진/사진=산울림 제공

고도란 존재를 기다리며 무기력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인간 존재의 의미와 함께 노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소극장만큼의 관객과의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때로는 웃음이 터지고, 기다림의 절박함에 슬픔이 느껴진다. 반복적인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마음에 남는다. 어려운 주제의 의미 있는 고전 연극을 우리나라에 50년 동안 무대에 올려준 임영웅 연출가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대배우들의 연륜과 노력에 더하여 체력에 박수를 보내며, 새로운 오경택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응원하는 마음이다.

공연은 2월 18일까지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월 23~24일에는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세종시(3월 15~16일), 경기 고양(4월 5일~6일), 대전(4월 13~14일)로 이어진다.

나는 어떤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지.....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고도를 기다리며' / 촬영-천건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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